[임시정부 100년] 남재희가 본 ‘장건상’과 혁신정당의 추억
[아시아엔=남재희 전 국회의원, 전 노동부 장관] 60년쯤 전의 일이라 대강의 이야기는 맞지만, 세부사항은 부정확할지 모르겠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1953년도 입학생들은 민병태 교수의 영국 정치학자 해롤드 라스키 교수의 페비안사회주의에 관한 강의에 관심을 가졌었다. 그래서 그들은 연구동아리인 ‘신진회(新進會)’를 결성했다. 그 신진회는 후배기에도 오래 계속되어 4·19 때는 남북대화촉진학생연맹을 결성하는 주체가 되기도 하였다.
같은 학번인 서울법대의 여러 명의 학생들도 신진회를 본받아 ‘신조회(新潮會)’를 결성했다. 고려대학교 경제학과에는 ‘협진회(協進會)’라는 동아리가 있었는데 그 동아리는 순수한 친목모임이었으나, 그 가운데 임진강을 건너 평양을 다녀온 김낙중 군(서울대에서 전학)이 있어 얼마간 정치성향을 띄기도 했다. 이 세 대학의 동아리들이 모임을 갖고 공동으로 세미나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4·19학생혁명 후에는 이 세 동아리의 출신들이 모여 통합하기로 결정하고 명칭을 ‘신조회’라고 통일했으며, 동인지도 몇 차례 발행하였다.
모임 장소는 을지로 입구 삼각동에 있던 주석균 선생의 농업문제연구소였는데, 그 연구소의 직원들이 퇴근하고 난 후에 이용하기로 하였다. 이따금 나중에 유명해진 경제학자 박현채 씨가 퇴근하는 것을 마주치기도 했다. 그 모임에서 임시정부 요인인 장건상 선생,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선구자인 전진한 선생,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서 필명을 날리다가 혁신정치에 참여한 고정훈 씨 등을 초청하여 간담을 가졌었다.
장건상 선생은 체구가 작은편이었다. 미국 유학도 한 것으로 알려진, 임정 요인 가운데는 학력이 높은 분 같은데, 중국에서의 활동에 관해 설명한 것으로 기억한다. 내용은 다 잊어버렸고, 하나 뚜렷이 기억에 남는 것은 그가 중국에서 여행을 할 때 당나귀를 타고 다녔다는 것이다. 당나귀를 타고 서안(西安)도 가고 연안(延安)도 갔다는 이야기인 것으로 기억하는데, 연안 부분은 불확실하다.
4·19 후 혁신세력은 폭발적이라고 할 정도로 들고 일어섰다. 지금은 ‘진보파’라 하지만, 그때는 ‘혁신계’라 했다. 그 ‘혁(革)’ 자는 가죽을 뜻하는 것이기에 익살꾼들은 혁신계를 ‘가죽신’이라고 농담하기도 했다. 4·19 후 혁신계의 주류는 사회대중당으로 뭉쳤다. 그리고 일부가 혁신자주연맹을 결성했다.
참의원과 민의원의 총선거가 치러진 후 다시 이들은 이합집산하였는데, 통일사회당이 주류 정당이었다. 거기에 민의원에 당선된 혁신계 5~6명 전원이 참여했다. 그 중 민의원 한 사람은 당성이 매우 희박하여 당원으로 간주되기가 어려운 정도였다. 통일사회당의 실질적인 당대표는 서상일 씨이지만 그는 고문으로 뒤로 물러앉고, 이동화 씨를 정치위원장으로 임명하여 당대표로 하였다.
그 다음으로 세력이 있는 당이 사회당인데, 당대표는 이름있는 최근우 씨였다. 그 정당을 정계에서는 근로인민당계라 했다. 5·16 군사쿠데타 후 가장 혹독하게 당한 정당으로 최백근 조직부장은 사형되고 최근우 당대표는 옥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세 번째 정당이 혁신당이다. 당대표는 장건상 씨였지만 드물게 당사에 가보면 권대복 정책위원장이 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 권대복 씨에 관해 좀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그는 나의 오랜 친구인데 국학대학을 나오고 진보당의 청년학생조직인 ‘여명회’의 책임자가 되었다. 그래서 진보당 사건 때 재판정에 선 두드러진 인물이 되었다. 진보당에 가입한 사람 가운데는 사립대학 출신들이 많은 것 같다. 서울대학 등 공립대학에서는 서울대 수학과를 나오고 동양통신 기자를 하여 진보당의 비밀당원이 되어 유명해진 정태영 씨가 있기는 하나, 예외적이다.
권대복씨는 영등포학우회라는 것을 조직하여 그 회장이 되기도 하였는데, 그 당시 영등포는 같은 서울이면서 한강 북쪽의 서울과는 동떨어진 어떤 면에서는 시골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여 영등포학우회가 가능했던 것 같다. 국학대학의 친구들과 이 영등포학우회의 친구들이 여명회의 주류가 된 것 같다. 따지고 보면 진보당의 조직은 수적으로는 얼마 되지 않았던 것 같다. 다만 이승만 정권의 실정에 반발하여 표가 쏟아지다시피 한 것이 아닌가 한다.
마지막으로 사회대중당 고수파 이야기를 해야겠다. 검사 출신인 김달호 씨는 성격이 매우 강직하고 고집스러워 사대당의 법통을 계속 고집하여 혼자 당사를 지키다시피 했다.
4·19 후의 혁신계를 말함에 있어서 정당들보다 중요했던 것이 민족자주통일연맹(민자통)이었다 할 것이다. 이 민자통에는 모든 혁신정당과 진보적인 사회단체, 인사들이 참여했었다. 그러나 얼마 후 민자통이 내세운 남북협상론에 반대하여 통일사회당이 이탈, 중립화통일연맹(중통련)을 결성하는 분열을 보였다. 그러나 통일운동의 대중적 주체는 민자통이었다. 그들이 서울시청 앞에서 벌인 2대 악법 반대 군중집회와 그 뒤에 이어진 혜화동 장면 총리 사저 쪽으로의 횃불 데모는 군사쿠데타 세력에 구실을 주었을 뿐 일대 실책이었다는 것이 사후의 평가이다.
나의 장건상 선생에 관한 인상은 그가 대중정치가라기보다는 어느 정도 지식 수준이 높은 인테리 정치인이라는 막연한 것이다. 혁신당의 주요활동은 권대복 씨가 맡아 했었다. 그는 “소해 장 선생, 소해 장 선생”을 입에 달고 살았다. 또한 곽순모라는 인사가 있었는데, 그는 학력은 별로 없으나 진보사상 연구에 힘을 써서 <사회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소책자를 내기도 하였다.
한 가지 꼭 추가할 얘기가 있다. 5·16 군사쿠데타가 난 다음 날인 17일 권대복 군이 내가 근무하던 민국일보로 찾아와 앞으로 혁신계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를 상의했다. 나는 무조건 잠적하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신숙 씨 등 지도적인 혁신계 인사들이 쿠데타를 지지하는 성명을 내서 혼란스럽다고 했다. 그는 잠적하지 않아 혁신계의 일망타진에 걸려들어 오랜 형무소 생활을 했다. 새로이 창간되어 관심을 끌었던 진보적인 언론 <민족일보>의 인사들도 거의 모두 구속되어 그 사장인 조용수 씨는 사형에 처해지기도 했다(조용수 사장은 오랜 후의 재심에서 무죄가 확정되었다).
민국일보의 정치부 기자로 혁신계 취재를 담당했던 나에게도 수사관이 들이닥쳤으나 요행히 체포를 면할 수 있었다. 나중에 알려진 바로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이석제 법사위원장이 미국 측이 박정희 씨의 공산당원 전력을 의심하고 있으니 혁신계를 일망타진하여 그 의심을 풀도록 하자고 건의하여, 그와 같은 엄청난 비극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장건상(張建相, 1883~1974)
경북 칠곡 출신으로, 유년 시절 한학을 하고, 신학문에 입문해 게일(J. Gale) 목사로부터 영어를 배웠다. 와세다대학 정치학과에 입학했으나 독립군 투신을 모색하며 미공사관 무관에게 군사훈련을 받다 발각되어 퇴학당하고, 게일 목사의 주선으로 미국에 유학했다. 대학 졸업 뒤 1917년 상해로 가서, 신규식이 설립한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했으며, 임시정부 외무차장에 임명되었다. 1921년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대회에 참석해 정치부위원으로 선출되어,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3인터내셔널 3차대회에 참석, 레닌과 만났다. 코민테른과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 사이의 연락업무를 담당했고, 의열단으로 활동했다. 임시정부 국무위원. 해방 후 여운형과 노선을 함께 했고, 1950년 총선에서는 옥중출마로 전국 2위 최다득표로 당선되었다. 이승만-박정희 정권 기간 혁신당 운동을 이끌며, 수차 투옥되었다. 호는 소해(宵海). 1986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필자 남재희
1933년 충북 청주 출생. 서울 법대를 나와 한국일보에서 언론인 생활을 시작했다. 민국일보를 거쳐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역임했다. 1978년 제10대 총선에서 정계에 입문해 네 차례 당선되었고, 민정당 정책위의장, 노동부장관(문민정부)을 맡았다. 균형 잡힌 시각으로 좌우 모두에게 존경받는 우리 시대 대표적 문사(文士)이자, ‘진보파’에 애정 어린 고언을 아끼지 않는 정치원로다. 저서로 <양파와 연꽃>, <정치인을 위한 변명>, <진보열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