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100년] 장강(長江) 만리(萬里)에 청춘을 묻고···김의한 할아버님 정정화 할머님께
[아시아엔=김선현 오토인더스트리 대표, 서울장학재단 이사, 국립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위원] 창밖으로 영경방(永慶坊) 골목이 내려다보여요. 할머니가 중국에 와서 처음 살았던 곳. 할머니 얘기 속에 수없이 나오던 그곳이에요. 저는 지금 임시정부 다큐 제작을 도우러 상하이에 와서, 할아버지 할머니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어요. 지금은 고급 상점이 즐비하게 늘어서 옛 모습은 찾을 길 없지만 발걸음 닿는 곳마다 두 분을 만날 수 있어요.
할머니.
100년 전 10월 증조부님께서 할아버지와 함께 상해 임시정부로 망명을 하시자, 할머니는 연로하신 시아버님을 모시겠다는 일념으로 다음 해 정월 그 멀고 막막한 길을 혼자서 찾아오셨어요. 이 골목 어딘가에서 할머니는 증조부님과 할아버지를 다시 만나 임시정부 식구가 되었겠죠. 상해에 막 도착한 스무 살 고운 할머니 모습이 눈에 선하게 보이는 것 같아요. 할머니는 여기 사는 동안 독립자금을 모으기 위해 여섯 번이나 압록강을 건너셨죠.
그로부터 26년간, 할머니는 조용히 최선을 다해 맡은 일을 하셨어요. 역사도 이름 내걸고 감투를 써야 기억해 주는데…. 아무도 알아줄 리 없는 일들을 할머니는 반평생을 바쳐 정성을 다하셨어요. 어른들 수발들고 병자들 간호하고 아이들 가르치며, 임시정부의 초라한 살림을 꾸리느라 애태우셨겠지요. 저는 할머니가 그런 분이라 사랑하고 존경해요. 할머니는 단심(丹心)을 갖고 계세요.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는 변함없는 순절한 마음. 할머니는 조국에게도 주위 사람들에게도, 그 마음을 지키며 사셨어요.
할머니는 가끔 두꺼운 노트에 밤늦도록 뭔가 쓰시곤 하셨어요. 하루는 궁금해서 그 노트를 펼쳐보니, 첫 장에 한문으로 사자성어 같은 게 쓰여 있었어요. 그 아래 “어린아이가 태어나 첫울음을 울 때 그 아이의 일생을 누가 짐작하겠는가”라는 해석이 달려 있었어요.
정판서댁 셋째 딸로 태어났을 때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겪어낼 할머니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그 누가 짐작이나 했겠어요. 연필로 꾹꾹 눌러쓴 그 노트에는 할머니의 일생이 담겨 있었어요. 태어나서부터 행복한 어린 시절의 기억이며, 중국에서 독립운동한 이야기들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었어요. 저는 그 얘기들을 마치 소설책처럼 재밌게 읽곤 했어요.
아마도 1973년 어느 날이었을 거에요. 꽤 쌀쌀한 날씨였어요. 대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할머니가 그 노트를 태우고 계셨어요. 저는 깜짝 놀라 말리려 했지만, 할머니는 이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이런 것 남긴들 다 부질없다고 하셨어요. 이미 절반쯤 타버린 노트는 그렇게 한 줌의 재가 되었지요. 그 노트는 저에게도 소중한 것이었어요. 그렇게 소중한 기록이 사라진 게 너무나 안타까워요.
저는 지금도 무엇이 그렇게 할머니를 상심하게 했는지 궁금해요. 원칙을 저버린 조국의 모습 때문이었을까요? 오히려 멀어져가는 통일의 가능성에 절망하셨을까요? 아마 둘 다였겠죠?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었을 때를 또렷이 기억해요. 할머니는 혹시 할아버지 소식을 알 수 있을지 기대가 컸던 것 같아요. 늘 침착하고 동요가 없던 할머니가 평소와는 달리 상기된 모습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일기장을 태운 것은 그 다음 해였죠.
할아버지.
할머니는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저에게 들려주셨어도, 할아버지 얘기는 거의 하지 않았어요. 아버지도 그랬어요. 왜 그랬는지 늘 궁금했는데 작년에 아버지가 쓴 책 <영원한 임시정부 소년>을 읽으며, 그 이유를 알았어요. 그 책에 나온 한 줄의 글귀. “내가 조금만 빨리 걸었더라면….” 의용군에서 탈출해 집으로 돌아왔건만, 할아버지가 바로 전날 납북되신 걸 알게 된 아버지의 마음이 그 한 줄에 담겨 있었어요. 저는 그 글귀를 보고 정말 펑펑 울었어요.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뵙지 못한 후회를 평생 안고 살았던 거예요.
타국땅에서 망명객으로 살면서, 함께 보낸 세월 전부가 독립운동이었던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 얼마나 서로 애틋하게 의지하며 지내셨을까요. 그런데 다른 곳도 아닌 해방된 조국땅에서 남편과 아내가, 아버지와 아들이 갑자기 생이별을 당해야 하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겠어요. 북에서 혼자 외로이 지내셨을 할아버지 생각에 차마 얘기조차 꺼낼 수 없었던 그 애통한 마음을 이제야 알 것 같아요.
어제는, 송경령(宋慶齡) 능원(陵園)에 다녀왔어요. 그곳에 있는 증조부님 묘지 터를 찾아보았어요. 증조부님께서 칠십 노구를 일으켜 망명하신 지 100년이 지났어요. 아직도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타국의 공원 한구석 풀만 무성한 곳에 누워계신 증조부님.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하다 타국에서 순국하신 분께 이래도 되는 건지, 대한민국에 묻고 싶어요. 아버지는 올해 초에 다시 증조부님 서훈 신청서를 냈어요. 그 신청서에 이렇게 쓰셨더군요.
“훗날 독립유공자가 되기 위해 독립운동에 나선 분은 단 한 분도 없습니다. 누가 시켜서 독립운동에 나선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독립유공자 서훈 안 받아도 그만입니다. 그러나 손자로서 절절한 사정이 있습니다. 이제 제 나이 아흔을 넘겼고,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 조부의 유해를 모셔오는 일입니다. 상하이 만국공묘에 조부와 나란히 누워 계시던 신규식 선생 등 여러분이 문민정부 출범 이후 국내로 모셔졌지만, 조부만은 독립유공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모셔오지 못했습니다. 자비로 모셔 오려 해도 만국공묘가 송경령 공원에 편입되어 중국의 국가유적지가 되었기 때문에, 정부 간 교섭이 아니고서는 삽 한번 뜰 수 없는 형편입니다. 백범 선생의 무릎에 앉아 어린 시절을 보낸 저의 평생의 소원 세 가지 중 임시정부기념관 건립은 이제 곧 이루어집니다. 통일에도 서광이 비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 유해를 모셔올 길이 없습니다. 납북된 아버지는 평양의 애국열사릉에 계시고, 어머니는 대전 국립현충원에 계십니다. 할아버지는 임시정부 어른들이 세워준 묘비도 파괴된 채 중국 땅에 쓸쓸히 누워계십니다. 대한민국 100년을 맞아 제국에서 민국을 잇는 할아버지의 유해를 꼭 조국에 모셔오고 싶을 뿐입니다.”
25년전 처음 서훈신청을 했을 때 대통령장으로 확정되었다는 축하인사를 받고 기뻐했던 일, 그 후 영문도 모르는 채 보류되었다는 통보를 받고 실망했던 일, 보류하기 위해 내세운 이유에 대한 반증을 찾아 제출하면 또 다른 이유를 내세우고 또 그 반증을 찾아 제시하면 또 다른 이유를 만들고…. 그렇게 사반세기가 흘렀어요. 그 과정에서 마주치게 된 우리 사회의 민낯을 보는 것은 저에게도 무척 힘든 일이었어요.
요즈음 한반도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어요. 통일에 대한 희망이 싹트고 있어요. 그러나 우리는 강대국들 사이에서 여전히 우리의 운명을 스스로 정하지 못하는 상황이에요. 국내에도 친일세력에서 이어져 온 반통일 세력의 방해도 만만치 않아요. 임시정부가 꿈꾼 나라는 아직 갈 길이 멀어요. 저는 증조부님이 중국에 묻혀 계신 것보다 대한민국이 아직도 이런 모습인 게 더 가슴이 아파요.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반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셨어요. 그러나 그토록 염원하던 해방된 조국은 감사는커녕, 할머니를 감옥에 가두었어요. 할아버지가 이북으로 끌려가신 뒤 할아버지 소식을 들으려고 북으로 간 옛 동지들을 만난 것이 죄였어요. 할머니를 닦달한 형사는 그 옛날 독립자금을 모으러 압록강을 건너다 체포되었을 때 취조하던 바로 그 왜경의 순사였으니 그 모멸감과 배신감이 어떠했을까요. 할머니의 일생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을 거예요. 그렇게 끔찍한 배신과 좌절을 겪고도 할머니는 끝까지 단심을 지켜내셨어요. 할머니는 조국을 조금도 원망치 않고 돌아가실 때까지 사랑하고 안타까워하셨지요.
힘들 때마다, 저는 할머니를 생각해요. 할머니는 저에게 인간에 대한 믿음을 물려주셨어요. 할머니가 행하셨듯이, 어떤 벽에 부딪혀도 원망으로 나 자신을 무너뜨리지 말자고 수없이 다짐했어요. 할머니는 누구라도 너그럽게 아우르며, 엽렵한 손매로 임시정부의 대소사를 해결하셨지요. 평생 스스로 닦고 살겠다며 지으신 할머니의 호 수당(修堂)의 의미를 34년간 저를 보듬어주시면서 가르쳐주셨어요. 저는 부족하지만, 할머니의 가르침을 지키며 살고 싶어요. 우리나라는 위기 때마다 민초들이 나서서 목숨을 바쳐 지켜왔다고 하시던 할머니 말씀을 저는 믿어요. 역사의 큰 물줄기는 아무도 거스를 수 없어요.
할아버지 할머니.
두 분의 일점혈육인 아버지는 2004년에 임시정부기념사업회를 설립했어요. 처음에 우리는 증조부님, 할아버지, 할머니를 위한 기념사업회를 하자고 했어요. 그러나 아버지는 임시정부기념사업회를 설립하자고 고집하셨지요. 그것이 일신의 안위나 이익보다 나라를 위해 살았던 두 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길이었기 때문이겠지요. 임시정부기념관 건립과 정기적인 방북 성묘 그리고 젊은 세대에 임시정부의 역사를 전하는 일을 15년간 꾸준히 하고 있어요. 임시정부기념관은 현 정부의 중점 사업 중 하나가 되어, 2021년 완공을 목표로 진행되고 있어요. 젊은 학생들에게 임시정부의 정신을 이어가도록 그 역사를 가르치는 사업도 매년 중국·러시아·일본에 흩어져 있는 임시정부 유적지 답사를 하며 이어가고 있어요.
하지만, 애국지사 후손 방북 성묘만은 2006년 한번 성사되고 다시 갈 기회를 만들지 못하고 있어요. 분단 이후 처음으로 북쪽에 있는 임시정부 인사들 묘역에 성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감격스러운 일이었어요. 우리 가족도 성묘단의 일원으로 재북인사릉에 계신 할아버지 묘소에 갈 수 있었어요. 평양으로 향하는 제 호주머니에는 대전 국립현충원 할머니 묘소에서 떠온 한 줌 흙이 들어 있었고요. 할아버지 묘 앞에서 절을 올린 뒤, 할머니 영정을 할아버지 사진이 담긴 비석 옆에 나란히 세우고 그 흙을 뿌려드렸어요. 열한 살에 혼인하여, 소꿉동무로 연인으로 또 동지로 40년을 함께 하셨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분단으로 헤어진 지 55년 만에 재회하는 순간이었어요. 당신의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 모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하늘나라에서나마 해후하시기를 눈물로 기원했어요.
이태만 지나면, 국립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이 모습을 드러내요. 그것은 대한민국이 70년 넘게 풀지 못했던 숙제이자, 아버지의 숙원이었어요. 우리 역사를 여기까지 끌어주신 임시정부 모든 어르신께, 그리고 장강(長江) 만리(萬里)에 청춘을 묻으신 할아버님과 할머님께, 그리고 이국땅을 헤매며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께 영원한 “독립의 집”을 지어드리고 싶어요. 그곳에서 부디 마음 놓으시고, 대한민국의 앞날을 밝힐 미래의 주역들을 지켜보아 주세요.
증조부님께서 망명하신 100주년에,
한없는 존경과 그리움을 담아 손녀 선현이 올립니다
* 정정화(鄭靖和, 1900~1991)
조부와 부친이 판서를 지내 “양대판서댁”이라 불린 명문에서 태어나, 열한 살에 김의한과 혼인했다. 3·1운동 이듬해 망명한 시아버지와 남편을 좇아 상하이로 갔다. 임시정부의 밀사로 독립자금 모금을 위해 국내에 여섯 번이나 들어왔고, 환국할 때까지 임시정부 안살림을 책임지며 백범과 임정 요인들을 뒷바라지했다. 1982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수여되었다.
*필자 김선현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는 오토인더스트리의 경영을 맡아, 국내 굴지의 자동차 부품 제조회사로 키워내고, 금탑산업훈장(2016)을 받았다. 부친(김자동)을 도와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를 설립, 독립정신을 일깨우는 사업을 펼치고 있다. 한국자동차공업협회 이사, 서울장학재단 이사, 국립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위원.
* 이 글은 도서출판 삼우반이 제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