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100년] 이준식 독립기념관장이 외할아버지 광복군 총사령 지청천 장군께
[아시아엔=이준식 독립기념관 관장] 할아버지, 저 준식이에요. 독립운동을 하느라고 혼기를 놓치고 해방 이후에는 만학과 직장생활로 나이 서른이 넘어 늦게 결혼한 딸이 우리 나이로 서른여덟에 낳은 아들, 그것도 할아버지께서 건강이 좋지 않아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여길 때 본 손주라고 각별하게 이뻐하셨던 외손자 준식입니다. 기억하시죠?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입니다. 할아버지께서 일본 육군중위로 복무하면서도 나중에 일기에 쓰셨듯이 “혁명의 길을 찾느라 고심 참담하다”가 결국 목숨을 걸고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계기가 된 게 바로 3·1운동 발발 소식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올해는 할아버지께서 망명하신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저로서는 개인적으로도 올해가 더 남다른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할아버지에 관해 가장 많이 물어보는 게 지청천 장군이 맞나, 이청천 장군이 맞나 하는 겁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오랫동안 꿈꾸어 오던 만주로의 망명을 1919년 6월 결행에 옮기셨습니다. 발각돼 잘못 되면 죽을지도 모르는 고난의 길을 선택할 때 이제 서른 살이 된 부인과 갓 태어난 막내딸을 비롯해 세 자녀의 모습이 눈에 밟히셨겠죠? 망명에 성공하더라도 남은 가족이 걱정되셨을 겁니다. 그래서 망명 사실을 될 수 있는 한 감추기 위해 지대형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이청천이라는 가명을 쓰셨다고 하더군요.
성은 할아버지의 어머니 성을 따라 이씨로 바꾸고, 이름은 일제 식민지배와 항일독립운동의 경계선인 압록강을 건너면서 지은 “昔日隋唐乙破泉 何處隱在宗下魂 我慾碁年滅倭賊 只有靑天寫綠寒(지난날 을지문덕 장군이 수와 당의 군대를 대파했음이여/어느 곳에 그 뜻이 스며 있는가/이제 왜적을 멸하고자 결심 더욱 굳히니/푸른 하늘이 압록강물에 비추었도다)”라는 한시에서 따와 청천으로 바꾸셨다죠. 그러나 저는 청천이라는 이름에는 푸른 하늘 곧 독립을 되찾기 전에는 다시는 조국을 찾지 않겠다는 큰 뜻이 담겨 있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렇죠? 할아버지 제 말이 맞죠? 할아버지께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할아버지께서 망명 이후 걸은 길은 신흥무관학교 교성대장, 서로군정서 사령관, 대한의용군 부사령관, 대한독립군단 여단장, 대한의용군 총사령부 총교관, 고려혁명군사관학교 교장, 국민대표회의 군사위원, 국민위원회 군무위원장, 정의부 군사위원장 겸 총사령관, 한국독립당 군사위원장 겸 한국독립군 총사령관 등 무장투쟁과 독립전쟁의 외길이었습니다. 나중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무부장과 한국광복군 총사령도 지내셨습니다.
만주에서는 1920년 청산리전투를 비롯해 여러 차례의 전투를 이끄셨습니다.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있을 때 지으신 시조(백두산 천지변에 칼을 짚고 우뚝 서서/조국강산 바라보니 기쁨보다 눈물겨워/언제나 천병만나 거느리고 짓쳐볼까 하노라)에서 노래한 것처럼 ‘천병만마’를 이끌고 ‘조국강산’을 되찾기 위해 일제와 최후의 일전을 벌이는 것이 할아버지의 소망이었습니다.
물론 그 소망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만주든 연해주든 남의 땅에서 무장 독립군을 꾸리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일제의 탄압은 물론이고 만주와 소련 당국도 독립군의 활동을 방해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몇 차례 죽을 고비도 넘겼습니다. 그래도 할아버지와 동지들의 뜻은 결코 꺾이지 않았던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할아버지께서는 나중에 만주에서 힘들게 독립군을 이끌고 무장투쟁을 벌이던 때가 당신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보람 있던 시절이었다고 회고하고는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할아버지의 일생에서 가장 빛나던 시기는 한국독립군 총사령관으로 일제와 여러 차례 전투를 벌인 1932년부터 1933년까지의 2년 동안이었을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1932년 초부터 한국독립군을 이끌고 북만주와 동만주 일대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때로는 일본군에 밀리기도 했지만 일면파, 쌍성(보), 경박호, 동경성 등지에서는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한국독립군이 거둔 가장 큰 승리는 간도임시파견대를 상대로 벌인 1933년 6월의 대전자령전투였습니다. 간도임시파견대는 함경북도 나남에 주둔하던 일본육군 보병 제19사단 제75연대를 중심으로 구성된 부대였습니다. 그리고 동만주 일대에서 반만·항일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토벌’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그런 일본군 부대와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으니 할아버지께서 얼마나 뿌듯하셨을지 충분히 짐작됩니다.
실제로 대전자령전투는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와 함께 무장독립운동의 3대 대첩으로 일컬어집니다. 논자에 따라서는, 전과라는 측면에서 대전자령전투가 최대 대첩이라고도 합니다. 기록마다 차이가 있어서 정확한 내용은 알기 어렵지만, 노획물의 규모로는 독립군이 치른 전투 가운데 전례가 없는 전과를 거둔 것만은 분명합니다. 대전자령전투 승전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께서는 더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독립전쟁을 준비하려는 구상에 따라 1933년 말 만주에서 중국 관내로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그 구상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군대 창설 움직임과 연계되어 한국광복군 창군으로 결실을 맺었습니다.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국군으로 한국광복군이 출범했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총사령을 맡았습니다. 영광스럽지만 책임감의 무게도 남다른 직책이었을 것입니다. 애초에 중국국민당 정부는 광복군을 중국군사위원회에 예속된 중국군대로 간주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할아버지께서는 김구 주석 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요인들과 함께 중국정부를 상대로 맹렬한 외교전을 벌여, 결국에는 한국광복군이 한국독립을 위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대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만들었습니다. 한국광복군은 비록 남의 땅에서 출범했지만, 자주적인 군대였습니다. 독립운동의 역사에서 한 획을 그은, 지금의 대한민국 국군에도 많은 것을 시사하는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총사령을 맡으면서 할아버지가 밝힌 한국광복군의 대일항전 구상은 중국 관내에서 만주로 세력을 확대한 뒤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진공해 일제와 최후의 결전을 벌인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한국광복군은 병력을 확대하고 중국, 영국, 미국과의 유대를 강화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한국광복군은 연합군의 일원임을 자임했습니다. 중국과 군사협정을 맺고 있었고, 인도-미얀마 전선에서 영국군과 합동작전을 펼쳤습니다. 해방 직전에는 CIA의 전신인 미육군 전략첩보국(OSS)과 함께 한반도 침투를 위한 독수리작전을 추진하기도 했습니다.
한국광복군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일제에 선전포고를 할 수 있었습니다. 연합국이 카이로선언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공인하게 된 배경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의 대일항전이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할아버지와 독립운동가 여러분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비롯해 외삼촌, 이모부, 어머니가 모두 독립운동을 하신 게 제 삶에는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제가 독립운동사를 전공한 것부터가 그렇습니다. 저는 중학교 다닐 때부터 역사를 공부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당시만 해도 학계에서도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독립운동사에 관심을 가진 것 자체가 어머니가 들려주시던 만주, 연해주, 중국에서의 할아버지의 독립운동 행적과 결코 무관할 수 없겠죠. 제 주위의 사람들은 제가 단순히 연구자의 길을 걷는 데만 그치지 않고 친일청산 등을 둘러싼 역사운동에 적극 나선 것도 제 몸속에 독립운동가 후손의 피가 흐르기 때문일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거리의 역사학자로 활동하면서 제가 하는 일이 제2의 독립운동이라고 이야기를 하고는 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일제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이루고 사람들의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는 민주주의 국가를 만들려는 한 가지 마음으로 독립운동을 했듯이, 저도 할아버지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이 품고 있던 꿈, 아직은 다 이루어지지 않은 뜻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게 지청천 장군의 후손으로서의 할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저는 지금 독립기념관 관장으로 있습니다. 독립기념관은 말 그대로 우리 민족이 일제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공공기관입니다. 독립운동의 역사를 중심으로 국난극복사와 민족발전사를 연구하고 국민에게 알리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저는 독립기념관장으로서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의 역사를 국민에게 제대로 알리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지 60년도 더 지났지만 걱정하시던 바가 제대로 해결되었는지 생각하면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할아버지와 동지분들이 꿈꾸던 민족통합, 자유와 평등의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완성하는 것은 저희 후손들이 반드시 풀어야 할 과제라는 다짐을 드립니다. 2019년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대한국민으로서 독립정신을 물려준 할아버지에게 다시 한번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할아버지께서 망명하신 100주년에 외손자 이준식 올림
*이청천(李靑天, 1888~1957)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광복군 총사령. 일본육사를 26기로 졸업하고, 중위 때 만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독립군 양성에 진력했으며, 김좌진(金左鎭) 장군과 함께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여단장에 임명됐다. 본성(本姓)은 지(池)씨였고, 일본육사 재학 시절에는 석규(錫奎)라는 이름을 썼으며, 청천은 그가 망명하면서 지은 가명이다. 1930년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해 군사위원장을 맡았고, 1940년 임시정부가 광복군을 창설하자 총사령으로 취임했다. 해방되고 나서 귀국해 대동청년단 단장으로 활약했으며, 대한민국 수립 후에는, 제헌국회의원, 무임소장관 등을 역임했다. 호는 백산(白山).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필자 이준식
195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이청천 장군의 따님으로 여성광복군으로 싸운 지복영(池復榮) 여사의 아들이다. 연세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고,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소 연구교수,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상임위원, 근현대사기념관 관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독립기념관 관장을 맡고 있다. 2012년 황조근정훈장 수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