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100년] 더불어민주당 박용진 의원 “여운형 선생님, 융화·상생·통합의 길 걷겠습니다”
[아시아엔=박용진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몽양 선생님, 선생님께선 1947년 정부수립 직전 암살로 돌아가셨고, 저는 1971년생이니, 선생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지 24년 뒤에 한반도에 태어났습니다. 세상을 떠나신 지 72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른 오늘까지, 그동안 변화한 세상 이야기를 짧은 편지에서 어찌 설명하고 풀어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먼저 제 소개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저는 현재 대한민국 제20대 국회의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지역구는 선생님께서 영면해 계신 강북구에 있습니다. 제가 다닌 대학교 근처에 선생님께서 암살당한 혜화동 로터리가 있고, 제가 사는 곳인 강북구에 선생님의 묘소가 있어 가끔 선생님의 사진 속 얼굴을 떠올리고는 합니다만, 저는 늘 선생님이 궁금했습니다. 어떤 분이라고 한마디로 말씀드리기가 너무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공산당 활동을 했고 레닌과 트로츠키를 만났는가 하면, 일본 수상 초청으로 제국주의 심장 도쿄에서 일제 고위 관리들과 회담을 하고 조선독립의 사자후를 토하는 연설로 이름을 날리셨지요. 그런가 하면 조선 스포츠계의 개척자이십니다. 영화로 제작되어 유명한 <YMCA야구단>, 상해 푸단(復旦)대학의 조선인 축구단 결성과 동남아시아 원정경기, 해방 직후 대한체육회 회장으로 런던올림픽 참가를 끌어냈는가 하면, 선생님 자신도 권투선수, 체조선수 등 만능 스포츠맨이셨습니다. 참으로 폭도 넓고 다양한 정열의 소유자이십니다.
그래서인지 선생님은 어느 한 주의나 주장에 얽매이는 일을 싫어하셨고, 통합적인 사고와 구상을 주장하셨습니다. 미-소의 대립,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의 진영 대립, 남과 북의 지역적 대립 등으로 갈등과 분단으로 치닫던 상황에서, 선생님의 주장은 좌우합작이었습니다. 우파 민족주의와 좌파 사회주의와는 다른 ‘제3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었습니다.
‘몽양은 현실을 모르는 몽상가’라고 할 수 있을지언정, 진정 민중과 민족의 안위를 생각하는 정치인이라면 전쟁과 파국으로 상황이 몰려가는 것을 알면서도 편협한 진영논리를 펼칠 수는 없는 일이라는 것은 그 뒤 한국전쟁의 비극과 대한민국 안에 끊이지 않는 좌우대립과 진영갈등의 현실이 증명합니다.
해방 직후 좌우합작 노선의 길을 걸으면서 우파로부터 ‘공산주의자’, ‘친소주의자’로 배척받고, 좌파로부터는 ‘기회주의자’, ‘친미주의자’로 비판받았던 선생님의 정치적 행보는 극단주의적 세력들에게 그만큼 위협적인 존재였다고 봅니다.
결과적으로 패배한 노선이고 실패한 노선이라고 할지라도, 그 선택을 단순히 주장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도모하고 실천함으로써 세상을 바꾸려 노력했던 선생님의 발걸음을 지금도 많은 이들이 아쉬워하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오늘 정치상황도 극단적인 주장, 과격한 요구, 이념적 편향에 휩싸여 미래지향적인 사고와 주장이 설 자리가 좁아지고 있습니다. 여전히 남북의 대립과 갈등은 계속되고 있고, 여당과 야당의 대립은 투쟁의 양상으로 격화되고 있습니다. 각 당의 내부에서도 파벌의 좁은 칸막이 안에서 자기들끼리만의 논리로 정치가 해야 할 역할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는 많은 고민을 합니다. 대학 시절 학생운동을 했고, 진보정당 창당멤버였고, 격정적인 주장과 투쟁의 결과 감옥생활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 경험만으로 대한민국의 복잡한 현실을 풀어나갈 수 없고, 미래지향적인 구상을 만들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진보의 말은 날카롭고 시선은 매서웠으며, 행동은 단호했습니다.
진보의 이름으로 세상의 문제를 고발하고 부딪혀 가는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에너지가 분명하지만, 그 틀 안에 갇혀서는 제대로 된 변화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보수의 이름으로 사회의 안정을 추구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이미 만들어진 기득권의 벽 안으로 사회의 역동성을 가두는 것이고, 많은 이들을 좌절하고 분노하게 합니다.
그래서 저는 한때 혁명의 열정에 들떠 있던 청년이자, 진보정당 창당과 세력화에 헌신했던 현실 정치인으로서 선생님께서 꿈꾸었던 융화와 중도의 길을 오늘 통합과 상생의 정치로 현실화 하고자 합니다. 어쩌면 왼쪽에서 도모하는 융화와 협치와 공존의 모색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국민에게 국가의 안위와 국민의 민생복지를 위해 일할 역할을 위임받은 현실 정치의 오른쪽 세력들과 협력해 협치가 가능한 정치시스템의 도입, 개헌을 통한 제도적 혁명의 길을 꿈꾸고 있습니다.
벨기에처럼 인종과 언어, 종교, 문화가 다른 국민들이 하나의 국가체계 안에서 서로 협력하고 조화를 이루며 살아나가는 많은 나라들이 있습니다. 각자 주장하는 것을 앞세우고, 각자 다른 의견을 배격하게 된다면 국가는 하나로 통합될 수 없고, 사회는 최대다수의 최대이익을 실현하는 공동체가 될 수 없습니다. 분열의 벽을 부수고, 융화와 통합의 큰 울타리를 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정치의 소명이라고 봅니다. 비록 실패하고 좌절되었지만, 한반도의 분단을 막고 전쟁과 살육의 비극을 막기 위해 고독하고 고단한 좌우합작의 길을 걷고자 하신 선생님의 노력이 오늘에도 필요한 이유입니다.
이 길이 얼마나 험하고 어려운 일인지는 선생님을 봐서도 알거니와, 저 역시 겪고 있는 일입니다. 제게도 아직 남아 있을지 모르는 진영논리의 편안함과 손쉬움을 하나씩 내려놓고자 할 때마다 제게 던져진 ‘기회주의’, ‘배신’의 비판은 힘들고 아픕니다. 어쩌면 해방 이후 좌익처럼 혹은 우익처럼, 상대를 욕하고 테러하고 증오를 발산할 선동을 앞세우는 일은 오히려 쉬운 일입니다.
편 가르고 대립하는 일이 더 편한 길을 걷는 것일 수도 있음을 잘 압니다. 그러나 그 결과 민족의 운명과 국민의 삶은 얼마나 비참해 졌습니까? 오늘날에도 정치인이 자기 편익의 진영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국민의 평안을 도모해야 할 정치가 국민의 분열과 파멸의 미래를 가져오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도 저도 아닌 중립으로서의 중도가 아닌 공동체의 복원과 미래지향적 통합을 위한 융화와 상생의 정치를 이루겠습니다. 이 다짐이 그저 화려한 말의 성찬에 그치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하고 늘 스스로 점검하면서 매일 매일 자기 역할을 해나가겠습니다.
영면해 계신 강북구의 작은 동산에서 어리석은 후배의 뒤를 지켜봐 주시고, 하늘나라에서는 대한민국의 건승과 한반도의 평화를 응원해주십시오.
대한민국 제20대 국회의원 박용진 드림
* 여운형(呂運亨, 1886~1947)
경기 양평에서 태어났다. 호는 몽양(夢陽). 1918년 신한청년당 결성을 주도하고, 총무간사로 활동했다. 재일유학생의 <2·8독립선언>을 조직하고 3·1운동에 참여했으며,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했다.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애쓰고 외무부 차장으로 활동했다. 고려공산당에 가입했으며, 쑨원(孫文)의 권유로 중국국민당에 입당했다. 1944년 8월 일제 패망을 예견하고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해 해방조국 건설에 나섰고,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과 인공 부주석을 맡았다. 단정을 반대하고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다, 1947년 서울에서 암살당했다. 200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필자 박용진
1971년 전북 장수에서 태어났다. 대학 시절 민주화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1998년 국민승리21 언론부장을 시작으로 진보정당운동에 뛰어들었다. 민주노동당 창당멤버로, 대변인 등으로 활동하며 당내 정파 대립을 극복하려 애썼다. 2012년 민주통합당 대변인, 2015년 더불어민주당 정책위 부의장을 거쳐 현재 제20대 국회의원(서울 강북을)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