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100년] “뭉치면 살고 길이 열린다”시던 이동녕 선생께

왼쪽부터 김구 박찬익 이동녕 엄항섭 선생.

[아시아엔=이종억 연안이씨 태자첨사공파 보학(譜學)연구소 소장] 석오 이동녕 선생께서는 1869년 9월 2일(양력 10월 6일) 새벽 충남 목천(木川)에서, 문과급제하고 예문관(藝文館) 응교(應敎)를 지낸 연안이씨(延安李氏) 태자첨사공파(太子詹事公派) 24세(世) 범오(範五) 이병옥(李炳?) 공과 광주 안씨의 2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선생의 11대조 해고(海皐) 이광정(李光庭, 1552~1629) 공은 문과급제하고, 대사헌·이조판서를 거쳐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 연원부원군(延原府院君)에 책봉되었으며, 조대왕 때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고,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마테오 리치가 펴낸 세계지도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를 조선에 최초로 들여온 분입니다.

또한, 정조대왕 치세(治世) 명신(名臣)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영의정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은 선생의 7대조 증(贈) 이조판서 이만성(李萬成) 공의 외손이 되십니다.

이렇게 가계를 적어 올리는 까닭은 선생이 쌓은 광복의 공훈이 양반의 자손이었기에 가능했다고 주장하려는 게 아니거니와, 독립운동의 역사를 가문의 사업으로 환치(換置)하려는 것도 아니올시다. 돌이켜보면, 한말(韓末) 명문거족의 후예 가운데 백성과 손을 잡고 풍전등화(風前燈火)의 국운을 일으켜 세우려 애쓴 선각자가 몇이나 되겠으며, 경술국치 이후 나라를 되찾으려 누대의 기득권을 초개같이 내던진 집안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선생은 당신의 자아(自我)를 흔하지만 단단하기 이를 데 없고 변치 않는 돌에 견주었습니다. 선생의 아호(雅號) 석오(石吾)는 왕조사회의 특권을 배격하고 공화(共和)의 새 시대를 열겠다는 다짐이자, 일제의 그 어떤 감언이설이나 억압에도 흔들리지 않겠다는 독립정신의 선언이었습니다. 선생이 쓰신 광무 2년(1898) 10월 29일자 <제국신문> 사설을 다시 한번 읽어봅니다.

밤낮 힘쓰고 할 사업은 고작해야 저희들 조상을 위해 서로 잡아먹고 헐뜯어가며 조정에 원수를 심어놓으니, 이 나라 일은 모두 잡칠 뿐이다. 여지껏 정부에 이런 괴이한 병균이 없어지지 아니하니, 이것은 자신이 먼저 이롭다고 나라 일을 돌보지 않은 데 있다.

팔도 백성을 대접하는 데 귀천을 달리하여 어느 도는 더하고 어느 도는 덜하여 동서남북 분간하기를 남의 나라 같이 하니, 어찌 백성들의 마음이 합심할 수가 있으리요. 이는 양반이 저의 이(利)만을 생각하고 국세(國勢)를 돌아보지 아니하여 백성들까지도 합심이 못되게 하는 근원이라 할 것이다.

우리 말을 곧이들은 이들은 어서 사사로움을 내다버리고 내가 힘을 들여 남의 이(利) 본 일을 생각들 하시오. 편당이 아무리 많고 명색이 암만 달라지든 하는 일이 다같이 나라를 이롭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면 아무리 위험이 있고 속한 곳이 다르다 해도 그것이 나라를 돕고 나라를 보호하는 일이 될 것이요.

조선의 국시(國是)였던 사대(事大)는 진취(進取)의 기상을 앗아갔습니다.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사회는 안으로 곪기 마련이라, 권세를 잡은 사대부들은 화이부동(和而不同)의 군자행(君子行)을 따르기는커녕 동이불화(同而不和)를 다투는 소인배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조선의 첫 번째 병폐였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선생께서 목놓아 부르짖은 선공후사(先公後私)와 불편부당(不偏不黨)의 금도(襟度)는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첩경(捷徑)이라 할 것이니, 선생이야말로 선비 중의 선비요, 선비를 뛰어넘은 선비셨던 것입니다.

후인(後人)은 선생의 삶을 기리어, “석오(石吾) 선생이 무궁한 세월을 통해 후손에게 주는 값비싼 교훈이 있다면 비록 나라가 외침(外侵)을 당해 국권(國權)을 잃었을망정 그것이 곧 민족(民族)의 종언(終焉)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고 썼습니다. 과연, 선생께서는 국망(國亡)의 기로에서 출사(出仕)의 뜻을 접고, 독립협회에 가담해 개화와 민권의 기수로 나서 구국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그것은 환로(宦路)가 열어주는 입신양명(立身揚名)의 탄탄대로가 아닌, 형극(荊棘)의 길이었습니다. 만민공동회의 선두에 섰다가 훗날 헤이그에서 순국하시는 이준(李儁) 열사와 함께 옥고를 치렀고, <제국신문> 사설을 통해 독립의 정론을 폈습니다. 을사늑약 때는 결사대를 조직해 덕수궁 대한문(大漢門) 앞에서 연좌시위를 감행, 조약 파기를 외치다가 왜놈 헌병에게 혹독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1906년 만주로 망명, 이상설·여준 선생과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해 독립의 씨앗을 길렀고, 1907년 국내로 돌아와 안창호 선생 등과 함께 신민회(新民會)를 결성했습니다. 대성학교(大成學校) 오산학교(五山學校) 설립을 도왔으며, 상동학교(尙洞學校)를 세워 직접 학생들을 가르쳤고, <대한매일신보> 발행을 지원했습니다.

이처럼 선생은 언론인으로서 교육자로서 자강운동을 이끈 선각자였습니다. 선생은 7대조 이만성 공의 종손으로, 가문의 선조들이 나라로부터 하사받은 근기(近畿) 일대의 막대한 토지를 처분해 독립의 제단에 바쳤습니다. 하지만, 선생은 평생 단 한 번도 이를 내색한 적이 없으셨습니다. 선생의 부친 이병옥 공은 독립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보내다가 일제에 발각되어 고초를 겪었고, 1924년에는 일제의 회유를 일축(一蹴)하다 옥고를 치렀습니다.

또한, 선생은 독립전쟁을 준비한 군략가(軍略家)요 혁명가였습니다. 1910년 만주로 다시 망명한 선생은 경학사(耕學社)와 신흥학교(新興學校) 설립과 운영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신흥학교는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으로서, 독립군 정예(精銳)를 벼리는 자주독립의 풀무였습니다. 그랬기에, 임시정부는 선생에게 군무총장의 중책을 맡겼던 것입니다.

3·1운동 직전까지, 선생은 만주·연해주·상해를 오가며 동포사회의 생업 안정과 신분 보장을 도모하면서, 해외독립기지 건설에 진력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최재형 선생, 홍범도 장군과 권업회를 꾸리고, 민족종교 대종교를 민족 대동단결과 독립정신 고취의 발판으로 삼은 게 이 무렵이었으며, 1918년 선생과 대종교의 김교헌, 조소앙·조완구·김좌진·여준 등 민족대표 39인이 연서명한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로 3·1운동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마침내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될 때, 선생은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으로 선임되어 민국(民國)의 출발을 주관하고, 임시의정원 의장 세 차례, 국무총리 세 차례, 내무·법무·군무총장의 중임을 잇달아 수행했습니다. 그뿐입니까. 임시정부가 내부 파벌 싸움과 열강(列强)의 홀대(忽待)로 이름뿐인 신세가 되었을 때, 대통령 직무대행·국무령을 맡아 민족대동단결을 호소했으며, 가장 어려운 시기에 주석(主席)에 네 차례나 추대되었습니다.

선생의 생애 전반이 3·1운동의 에너지를 응축하는 데 쓰였다면, 생애 후반은 오로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키고 가꾸는 데 바쳐졌습니다. 선생은 독립의 방략을 설계하고 실천한 건국(建國)의 아버지이자, 영원히 변치 않는 불멸의 민족혼(民族魂)이라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후인은 “가장 어려운 때 태어나서 가장 용기(勇氣) 있게 싸우다 간 위대(偉大)한 겨레의 파수병(把守兵)이라”고 추앙했던 것입니다.

임시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옮기던 도중인 1940년 3월 13일, 선생께서 치장(?江)에서 급성폐렴으로 서거(逝去)하신 지 어느덧 79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유언은 오직 하나 민족의 대동단결과 독립정당의 통합이었습니다. 임시정부는 국장으로 선생의 가시는 길을 모셨으며, 광복 후 유해를 봉환해 사회장을 거행했고, 대한민국 국회는 1996년 의사당 로텐더홀에 흉상을 세워 선생의 유지(遺志)를 따르기로 약속했습니다.

아직도 많이 부족합니다. 무엇보다, 선생께서 구해내신 이 나라는 여태껏 분단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으며, 반쪽조차도 갈등과 정쟁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 이 나라 지도자들의 용렬(庸劣)한 국량(局量)과 갈대만도 못한 세태(世態)를 하늘에서 굽어보시며 통탄(痛嘆)하실 선생님을 생각하면, 실로 모골이 송연한 지경입니다. 부디 후학들에게 평화와 번영으로 달려갈 지혜와 용기를 주소서.

석오(石吾) 이동녕 선생 탄신 150주년을 다섯 달 앞두고,

후손 이종억(李鍾億) 올림

* 이동녕(李東寧, 1869~1940)
“同胞여! 우리나라가 온전한 자유(自由)를 누리며 굳건한 獨立을 되찾는 데는 하나는 내 同志들의 團結이요, 둘은 우리 同胞들의 團結이며, 셋은 모든 大韓民族이 大同團結함에 있으니, 오로지 뭉치면 살고 길이 열릴 것이요, 흩어지면 멸망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民國 2년(1920) 3·1절, 석오(石吾) 이동녕(李東寧)>

필자 이종억
194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연안이씨 태자첨사공파 보학(譜學)연구소 소장, 연안이씨대종회 편집위원을 맡아, 종중에서 석오 선생 추모사업을 주관하고 있다. 석오(石吾) 선생은 필자의 5대조 이국녕(李國寧) 선생과 같은 항렬의 족친으로, 필자의 조모 청주 한씨와는 외사촌 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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