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100년] ‘제국의 대신에서 민국의 국민으로’ 김가진 선생께

[아시아엔=김위현 명지대 사학과 명예교수] 아직도 상하이에 잠들어 계신 선생님이 안타까워서 조국으로 모셔오기 위해 몇 가지 시도를 하였으나 모두 여의치 못하여 참으로 참담한 심정이었습니다. 이런 감정으로 글월을 올릴 용기가 나지 않아서 미루어 왔습니다.

동농 김가진 선생(오른쪽)과 아들 김의한(왼쪽) 며느리 정정화 그리고 손자 김자동

돌이켜보면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겠다는 의지 하나로 칠십 노구를 이끌고 이국땅 상하이에 망명하여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다가 결국 광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뜨셨습니다. 상하이에 망명하셨을 때 대한민국임시정부 인사들과 교민 그리고 중국의 재야지도자들마저 지대한 관심을 보였고, 망명하신 지 4년 만인 1922년 77세를 일기로 영면하셨을 때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상하이 교민사회 그리고 서울의 각계 인사들까지 수많은 애도(哀悼) 인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광복(光復),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거치면서 75년이란 세월이 흘렀건만, 아직도 선생님의 유해는 반장(返葬)되지 못하고 있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수차례 상하이에 가서 묘지를 찾았으나 묘비와 묘원 자체가 훼손된 뒤라서 헛걸음을 하였습니다. 수년 전 선생님의 가족들과 함께 송경령능원(宋慶齡陵苑)을 방문하여 묻혀 계시리라 짐작되는 어느 잔디밭에 절을 올렸습니다. 주과포(酒果脯)도 준비 없이 그저 절만 드리려니 주위 사람들 보기에도 민망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동농 김가진 선생의 손자 김자동 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과 증손녀 김선현씨

여러 해 전 유해 반장을 하려고 하였으나 먼저 서훈(敍勳)을 받아서 국가적인 협조가 되어야 가능하다 하여서 유보되었던 서훈신청서를 보완하여 다시 제출하고 오해가 있었던 부분에 대하여 사료(史料)로 해명을 하였으나 새로 추가된 위원이 잘못 알려진 사실을 가지고 문제를 제기하므로 또다시 보류되었다고 들었습니다. 부분적인 해명과 설명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것 같아서 제가 2009년에 모든 사료(史料)를 취합하여 <동농김가진전(東農金嘉鎭傳)>이라는 책을 출간하였습니다.

또, 조선민족대동단기념사업회에서는 2002년 여름 동농 서세 80주년을 기리고 조선민족대동단기념사업회 창립을 기념하는 ‘동농 김가진과 한국민족운동’이라는 주제로 학술세미나를 개최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해를 넘기면서도 별 진전된 소식이 없습니다. 이 실마리가 풀리는 대로 이국땅에 외로이 계시는 선생님의 유해를 꼭 모셔 와서 영원히 편안하게 계실 안식처에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선생님은 선각자였고 개혁가이며 진정한 관료였습니다. 그래서 저뿐 아니라 올바른 사회개혁을 원하는 젊은이들이 차츰 선생님의 행적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존경하는 이들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우선, 선생님은 정치개혁을 주도하였습니다. 첫째는 갑오경장이었습니다. 1894년(고종 31) 동학군이 봉기하자 청일 양국군이 자국민 보호를 구실로 군사를 파견하였는데, 일본군이 경복궁까지 진주하자 교전이 벌어져서 위험한 상황이었음에도 궁 안으로 들어와 고종을 배알하고 폐정개혁(弊政改革)을 상주하여 윤허를 받아 군국기무처를 설치, 208개의 개혁안을 만들어 내각이 결의·공포하게 한 일을 주창하셨습니다.

둘째는 1900년 중추원의장(中樞院議長)에 서임(敍任)되시면서 조세를 인상하고 토지대장과 호적대장을 새로운 양식으로 바꾸셨습니다. 또한, 인지제도와 형법개정 등을 제기하시어 중추원이 의회와 유사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셨습니다. 산업진흥에도 노력을 다하셨습니다. 중앙정부의 관료가 산업진흥에 관심을 두고 발전안을 제출하여 실행하게 하셨습니다.

종목국(種牧局)을 설치, 소득증대를 위해 우수 종자를 수입하여 마장리와 청파동에 서양식으로 종축장을 설치하고 소, 말, 양, 돼지를 기르게 하였습니다. 잠사회사를 설립하고 요원양성을 위해 교습소를 만들어 양잠업을 발전시켰습니다.

다음은 새로운 문물제도를 도입하려 하신 일입니다. 하나는 전보총사를 설치하고 전선을 가설하여 세계 여러 나라와 통신하게 하신 일이요, 둘은 일본상인들이 침투하자 석유회사를 설립하여 미국석유를 직수입하여 일본의 독점을 막으려 하신 일이요, 셋은 박람회가 무엇인지도 모르던 시대에 농상공부대신으로 박람회사무소위원장을 맡아 성공리에 박람회를 마쳐 팔괘장(八卦章) 훈장을 받으신 일입니다.

그뿐 아니라 선생님은 모범관리였으며 외교관으로는 자주외교를 진행하셨습니다. 관료로서는 남보다 더 실력을 갖춘 탓으로 겸직을 하면서도 각종 업무를 무난히 처리하셨습니다. 안동부사 시절 기우제(祈雨祭)를 올리실 때 조금도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원칙과 관습을 중시하여 모범관료의 면모를 보여 관민을 감동시켰습니다.

외교관으로서 국가의 위의(威儀)와 체통을 지키셨습니다. 우선 우리나라 최초로 동경에 공사관을 설치하고 태극기와 절모(節?)를 세우게 하셨습니다. 반청자주(反淸自主)의 외교를 실현하기 위하여 “불욕군명(不辱君命) 무손국체(無損國體)”, 즉, 임금의 명령을 욕되게 하지 않고 국가 체면을 손상되게 함이 없게 한다는 신념으로 임하여 국위를 손상하지 않았습니다.

주일본판사대신으로 계실 때 공사들의 공식 모임에서 청국공사가 “동양의 독립국은 청국과 일본뿐이다”라고 발언하자, 선생님은 분연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서 비분강개한 어조로 “조선은 당당한 독립국가이다. 오랜 역사와 사직(社稷)을 가지고 있는 독립국이다. 누가 황탄무계(荒誕無稽)하게 우리를 타국에 예속되었다고 하느냐?”라고 항변하여, 중국공사가 더 이상 나서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교육에 대한 관심으로, 교육구국(敎育救國)을 주장하기도 하셨습니다.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으로 문벌 타파, 과거제도 폐지 등이 이루어지면서 교육의 기회균등과 학교교육의 제도화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895년(조선개국 504년)에 홍범(洪範) 14개조를 발표하였는데, 그 11조에 “나라 안의 총명한 자제들을 널리 파견하여 외국의 기술과 기예를 견습시킨다”는 실용적이고 과학적인 학문을 추구하여야 한다는 윤음을 내리자 교육의 중요성을 익히 알고 계셨던 선생님은 황해도와 충청남도 관찰사로 계시면서 많은 공립학교를 설립하도록 하셨습니다. 한글교육에도 관심이 많으셔서 한글학교를 설립하여 직접 교장을 맡으셨을 뿐 아니라 학교의 기술교재 서문을 쓰는 등 열정적인 노력을 기울이셨습니다.

선생님께서 개화기에 각 분야에 방향을 제시하시고 몸소 뛰어들어 각고의 노력을 하신 결과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각 분야는 엄청난 발전을 보았습니다. 그동안 뒤돌아보고 근원을 생각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못하였으나 이제는 여유를 가지고 밀알이 되었던 개화기의 선각자들의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날이 오기까지 굽어살피어 주소서.

*김가진(金嘉鎭, 1846~1922)

정치가·항일운동가. 호는 동농(東農), 본관은 안동(安東), 예조판서 응균(應均)의 아들. 1886년(고종 23)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부수찬(副修撰)·주차일본공사관참찬관(駐箚日本公使館參贊官) 등을 거쳐 주일본판사대신(駐日本辦事大臣)으로 수년간 도쿄(東京)에 주재했다. 귀국하여 공조판서·농상공부대신(農商工部大臣)·법부대신·중추원의장(中樞院議長)·대한협회회장(大韓協會會長) 등 많은 내외 요직을 지냈다. 3·1운동 직후 대동단(大同團)에 가담해 총재로 추대되고, 1920년 상해(上海)로 망명, 임시정부 고문으로 활약하다가 병사했다. 한학(漢學)에 능통하고 서예(書藝)에도 뛰어났다. 독립문 편액을 썼다.

*필자 김위현
현 명지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중국 하북대학교 겸임교수. 동북아유목민족사를 연구하여 많은 저서와 논문이 있다. 사법시험·외무고시 출제위원, 동북아역사재단 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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