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100년] “영화 ‘암살’ ‘밀정’의 쌍권총 명사수 김상옥 외할아버지께”
[아시아엔=김세원 독립운동가 김상옥의 외손자] 외할아버지께서 독립만세를 외치신 3.1절 독립운동 그 날이 벌써 100년 전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이 날의 감동이 할아버지의 인생을 전업 독립운동가로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지요.
34년의 생애 중 한 개인으로서 서울을 중심으로 삼남지방을 포함한 국내와 중국 상해 등지에서 일제에 강점당한 국권회복을 위해 다양한 독립항쟁 방략을 폭넓게 지속적으로 실천하신 할아버지께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할아버지는 무인의 후손답게 소년 시절부터 정의감과 모험심이 강하고 용맹 과감하여 석전(石戰)의 용사로 불렸고, 호협·대범한 성격으로 강한 실천력을 겸비한 인물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피난지 충남 한산에 살고 있을 때,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할아버지의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의거’ 역사를 보고 배운 기억이 떠오릅니다. 비록 생전에 뵐 수는 없었지만, 그때 교과서를 통해 할아버지를 만나게 된 저는 할머님(정진주鄭眞珠), 어머님(의정義正), 형님(효기孝起)과 함께 자랑스러운 할아버지를 더욱 추회(追懷)할 수 있었습니다.
몇 년 전, 어느 제작자가 만든 <암살>, <밀정>이라는 영화에서 쌍권총 명사수이셨던 할아버지를 모델로 하는 배우들이 등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영화 <암살>에서 여성 명사수의 이름 ‘안옥윤(安玉尹)’의 경우, 성씨(姓氏) ’안(安)‘은 안중근 의사를, 가운데 ‘옥(玉)’자는 김상옥 의사의 끝 함자를, 마지막 ‘윤(尹)’자는 윤봉길 의사의 성씨를, 각각 인용하였으며, <밀정>에서 쌍권총의 투사 김장옥(金長玉)은 할아버지(金相玉 義士)를 모델로 했답니다.
1923년 3월 15일 동아일보는 ‘계해벽두의 대사건 진상’을 양면 호외로 보도했습니다.
달포 전 12월 초 상해에서 서울에 잠입하신 할아버지께서 1923년 1월에 결행하신 “세 차례 서울 한복판 시가전”, 조선 천지를 진동케 했던 ‘일당 천의 독립전쟁’에 관한 기사였습니다.
1월 12일 총독부 폭파의 절대적인 성공을 위한 폭탄 성능 실험을 겸하여 독립운동 탄압의 본산인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셨습니다. 1월 17일 삼판통 매부의 집을 ‘서울 한당(韓黨) 혁명사령부’로 삼고, ‘사이토’ 총독을 서울역에서 처단코자 때를 기다리며 은신 중, 당일 새벽 5시 은신처를 기습한 일본경찰과 총격전을 벌여 4명을 처단하며 대설 덮인 남산의 정복순사 천여 명 포위망을 뚫고 신출귀몰한 방법으로 탈출에 성공, 일본 경찰에게는 충격과 공포를, 일반 경성부민들에게는 엄청난 경탄과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1월 22일 효제동에서 일본 군경 천여 명이 채소밭으로 둘러싸인 효제동 73번지 일대 5가옥을 4중으로 포위하자 양손에 권총을 쥐고 5가옥을 넘나들며 3시간여 단신 대항하는 시가전을 벌여 일제(日帝)를 쩔쩔매게 했고, 적 16여명을 사상케 하면서도 끝까지 항복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일제에게 민족적 자존심과 기개를 유감없이 표출하셨습니다.
상해를 떠나오실 때 할아버지께서는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소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서나 만납시다. 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라고 다짐하셨지요.
결코 일본제국주의의 불의한 힘에 정복당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하신 그대로 실천하셨습니다.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절망에 무릎 꿇기를 거부한 채, 두 손에 권총을 움켜쥐고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두 눈을 부릅뜬 채로 그렇게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김상옥 할아버지께서 실행하신 단병대첩 ‘서울 시가전’ 의거는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한편, 우리 겨레의 기백을 떨친 ‘승리의 표상’으로서, 전 세계에 우리 겨레의 뜨거운 독립의지를 전파하고, 3.1독립운동 후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어 쇠잔해가던 우리민족의 독립항쟁에 연속적 의열투쟁을 촉발시키는 충격적인 독립운동이었습니다.
“장부차세(丈夫此世) 안사구구(安事區區)-남자가 세상에 나와서 어찌 구구하게 살랴! 한번 세상에 나온 보람이 있게 살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8살부터 소년 노동자로서 험한 노동으로 생계를 담당하던 십대 중반, 철이 나면서 자신의 장래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그 길을 찾아 이웃들처럼 동대문교회에 나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지식과 문명을 배우게 됩니다. 낮에는 가족을 위해 노동을 해야 하기에, 교회에 야학을 세워 자신처럼 불우한 청소년들을 위해 배움의 길을 열어주고 자신도 함께 공부합니다. 사정상 문을 닫게 되어 동흥야학을 세우고 함께 배움의 길을 계속했습니다.
1910년 21살 되던 해 봄에는 황성기독교청년학관 영어반에 입학하는 기쁨도 있었습니다. 청년학관 학생이 된 그는 서울의 전문학교 학생, 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을 사귀게 되었고, 그들과 함께 하면서 청년학관 청년부장으로 봉사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에서 만난 청년 학생들은 3.1독립운동 직후 혁신단과 암살단을 꾸리는 데 큰 자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정 형편 때문에 할아버지께서는 1년도 안되어 공부를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현실을 받아들이며 권서인 겸 매약 행상을 하는 삼남지방(충청, 전라, 경상) 여행을 5개월간 다녀왔습니다. 기독교 서적 보급, 기독교 전파, 매약 후 독립의식을 고취하는 계몽연설을 하였고, 일제(日帝)에 수탈당하는 실상도 목격했습니다. 생각보다 상당한 수입을 얻었으며, 귀한 만남도 있어 훗날 의병 출신을 주축으로 대한광복단을 채기중 선생 등과 결성, 1916년 5월 한훈 등과 전남 조성의 일본헌병 분대를 습격, 민족반역자 숙청 및 무기를 탈취하였습니다.
서울로 돌아오신 할아버지는 영덕철물점을 개업하여 말총모자 창안, 양말, 장갑, 농기구 등을 생산 판매하며 직공 50여명과 함께하는 번창하는 기업의 20대 경영주가 되었습니다. 그중 말총모자는 동포들로부터 크게 환영받는 히트상품으로 일본 상품배척과 국산품 애용운동의 가장 성공적인 상징물이었습니다. 영덕 철물점은 일제하 1920년대 물산장려운동의 몇 년 앞선 원조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직공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공인조합(工人組合)을 만들고, 일제의 경제 침탈에 공동 대응하는 동업조합(同業組合)을 만들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수행하는데 앞장섰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노조와 경총의 효시라고 사료됩니다.
사회공헌을 위해 손정도 목사(후에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 등과 백영사(白英社)를 조직, 사회계몽과 인재 양성사업을 하였으며, 직공들과 일어사용 금지, 금주, 금연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자신을 지적, 정신적, 육체적으로 계발하면서, 경제적 성공도 이루는 한편, 그 시대의 과제를 외면하지 않고, 생업을 바탕으로 공익과 사회적 책임의식을 발휘했습니다.
할아버지는 3.1독립운동이 계기가 되어 생업을 제쳐두고 독립운동가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1919년 3월 1일 직공들에게 직접 제작한 태극기를 주어 탑골공원의 독립선언식과 시내 만세시위에 자신과 함께 참여했으며, 오후 돌아오는 길에 동대문 근처에서 여학생을 장검으로 위협하는 일제 경찰을 제압하고 장검(현재 독립기념관에 전시)을 탈취했습니다.
3.1독립운동을 지속, 확산하기 위해 청년학생 동지들과 혁신단을 조직, <혁신공보>를 비밀리에 6개월 이상 계속 발간 배포하던 중, 김 의사는 경찰에 체포되어 40여 일간의 극악한 고문, 고초를 받고, 증거부족으로 풀려났으나, 자금 등의 한계로 계속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평화적인 독립운동의 한계를 깨닫게 된 할아버지는 동지들과 혁신단을 암살단으로 전환하고, 이때부터 줄기차게 일제 지배의 총본산 조선총독부의 총독을 비롯한 일제 식민지 수뇌부의 전면적 타도에 생명을 걸었습니다. 김동순을 파견한 만주 김좌진 부대와 연계, 한훈의 결사대를 합류시켜 암살단을 조직, 서울에서 무장특공대를 양성하여 총독 등 고위 지도층을 숙청하고, 일제기관을 파괴하여 일대혁명을 일으키기로 하고, 만주 길림군정서에 군자금 5천원을 지원하였습니다. 1920년 8월 24일 미국 의원단 42명의 서울 방문을 계기로 총독처단, 총독부 폭파, 종로시가전을 추진, 무기 및 탄약 준비, 자동차 3대 및 자금의 확보 등 거사 준비 완료했으나, 일경의 예비검속에 걸려 동지들이 모두 체포, 구금되자 김 의사는 피신, 동지 유득신 등의 도움을 받아 10월 말 중국으로 망명하였습니다.
망명지 중국에서 의열단 재조직에 참여하고, 배중세, 고인덕 등과 밀양 한봉인 집에서 폭탄 제조, 같은 해 12월 최경학이 밀양서에 투탄했고, (제2차 망명) 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과 협의하여 임시정부 독립자금 모금차 국내로 들어와 서울, 충청, 전라 등지에서 임시정부 독립자금을 모금하고, 일제 경찰에게 고문을 받아 병중에 있었던 여성동지 장규동을 대동, 상해로 탈출했습니다.(제3차 망명)
상해에서 1922년 4월 ‘한당(韓黨) 혁명사령부장’에 피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옹호하고 지원하는 활동을 했으며, 임시정부 요인들과 교유하며, 많은 책을 읽어 지식을 넓혔고, 중국인등 외국인과도 교유하며 국제적인 안목을 키웠습니다.
1922년 11월 중순, 김구, 이시영, 조소앙, 신익희 등 임정요인 및 김원봉 등과 협의, 식민통치 심장부인 서울에 무장 독립운동의 비밀기지인 ‘한당(韓黨) 서울혁명사령부’를 두고, 총독을 비롯한 일제 고관 및 친일파 처단, 총독부 폭파 및 시가전 등 거사를 전개하기 위해, 무기를 지원 받고 동지 안홍한을 대동, 12월 초 국내에 잠입하였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스스로 생명을 내려놓으신 1923년 1월22일 그날까지 혁신단, 광복단, 암살단, 의열단 그리고 ‘한당(韓黨) 혁명사령부장’으로서 마지막까지 소임을 다하셨습니다.
상해임시정부에서 고락을 함께 하셨던 임정 요인 동지들과 여러 중국인 지인들이 사후(死後) 할아버지께 추모의 글을 이렇게 들려 주셨습니다.
– 임시정부의 법무총장이었던 이시영(李始榮) 선생은 「추도문」에서 “김상옥 선생은 동서고금에 비할 데 없이 거룩하시고 독특무이한 상품(上品)의 한 분이시므로 ‘비호장군(飛虎將軍)’의 칭호를 받으시며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임시정부 외교총장 조소앙(趙素昻) 선생은 “…… 일개 군관의 아들로 소학교도 마치지 못하고 굶주림과 추위가 뼈에 사무치는데도 애국심을 길러…… 조국의 장엄한 존재를 위하여 민족의 탁월한 권위를 찾아오기에 바빠하는 김 열사 상옥선생도 있더라 …… 김 선생은 호걸이었다. 일개 노동자였다. 일개 애국자였다. 일개 장군, 일개 의협사, 일개 혁명가, 일개 신자, 일개 영웅이었다. …… 마침내 피바다 속에 자기를 장사 지내고 조국 승리를 부르고 비장한 최후를 밟으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중국인 지인, 장제스 총통의 고위 비서관 천거푸(陳果夫)는 “求國之仁”(나라를 구한 덕망있는 인물)이라는 휘호를, 문인 동유화는 만장(輓章) 중에 “萬馬軍中舊虎勇, 叱咤-聲天地寬(일만군사 달리는 속에서 범 같은 용맹 날리고 노호하는 한마디 소리에 하늘과 땅이 진동한다) 라고 칭송했습니다.
** 당시 김 의사는 “신출귀몰한 동대문 철물점 홍길동”으로 전국에 알려졌는데, 충남 홍성 출신 방경한 애국지사는 어린 시절 부친으로부터 전해 듣고 결심한 대로 훗날 독립투쟁에 헌신하였다고 증언했습니다.
** 평전 저자 이정은 박사의 말 “김 의사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분출한 사회 특권층이 아닌 보통사람들인 비노블레스의 오블리주의 대표적 사례이다. 김상옥은 식민지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적절한 처신을 하였으면 편안하고 풍족한 삶을 누리며 가족들과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 있었던 삶을 박차고 독립운동의 길에 들어서 재산과 가족의 안전과 자신의 생명을 바쳤다.”
‘죽지 못해 살지요.’ 바느질 하시던 할머님(鄭眞珠)은 아들(泰用)도, 딸(義正)도, 큰외손자(孝起)도 먼저 하늘로 보내시고 모진 세월 아픈 마음을 고통으로 삭히셨지요. 할머님은 피에 푹 젖고 11발 총탄 자국이 선명한 할아버지의 옷을 빨아서 이불 속에 넣고 꿰매어 감추셨던 그 옷을 6.25동란으로 피난 갈 때 잃어버리신 것을 못내 아쉬어 하셨습니다. 비록 육신은 떠나셨으나, 사부(思夫)의 정이라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유품이었는데 ….
치열했던 독립항쟁의 터, 효제동. 태어나고, 살았고, 최후를 맞이한 효제동에 대한 미흡한 관심과 결여된 역사 보존 인식의 현실이 너무 아쉽습니다.
기념조형물은 그날의 치열한 독립운동 현장으로 국민들을 인도하고 당해 독립운동 사적은 당시의 실체를 보여줌으로 대한의 얼, 우리의 민족정기가 살아 숨 쉬는 현장이 되어야 합니다.
후대인 우리는 외세의 식민폭압정치에 고통과 희생으로 점철되었던, 불행했던 역사의 현실을 피부로 느껴보며, 강력한 힘과 능력을 가진 번영하는 나라를 만들고, 국가를 송두리째 빼앗기는 어리석음과 고통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나라를 삼키고, 폭압과 수탈의 식민지 정책으로 이 땅을 유린했던 일제의 후대들은 이 현장을 통해 선대들이 저지른 부끄러운 만행의 역사를 바르게 인식, 인정하며 역사 왜곡을 멈추고, 진정한 이웃나라로 거듭날 수 있게 하는 역사 증언의 현장으로 존재해야 할 것입니다.
후손이 힘이 있으면 조상의 키가 한 뼘 더 커진다는데 …. 그렇지 못해 할아버지께 정말 죄송합니다.
큰 호떡 하나에 중국돈 1각을 했으나, 그것조차 사먹을 돈이 없어 두끼 세끼 굶기를 밥먹듯이 했다는 독립운동 선열들은 그런 상황을 초연하며 국권을 회복하고자 모든 것을 희생하고 헌신하셨습니다.
할아버지와 함께 하셨던 모든 동지 어른들께 엎드려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모두 천상에서 함께 영생을 누리시기를 빕니다.
*필자 김세원
김상옥 의사 외손자, 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 총무이사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