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100년] 절대자유·평등사회 꿈꾼 아나키스트 백정기 의사

백정기 의사 관련 기사. 동아일보 1933년 11월 11일자

[아시아엔=김명섭 한국근대현대사학회 연구·홍보이사, 한국아나키스트독립운동가기념사업회 학술이사] 오늘은 아직 찬 기운이 가시지 않았지만 봄 향기가 상큼한 3월 17일 밤. 지금으로부터 86년 전인 1933년 그날을 기억하는 후손들이 충북 제천에, 경기도 평택에 모여 기념행사를 가졌습니다.

행사 후 돌아와 가만히 그날 밤을 생각해 봅니다. 일본 침략자들을 오랫동안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던 흑색공포단의 백정기 의사와 원심창·이강훈 세 분이 중국 상하이 홍커우구 무창로의 중국요리집 송강춘에 태연히 앉아 있던 그날 밤 그곳을.

당시 의사님과 두 동지의 몸에는 1년 전 윤봉길 의사가 홍커우공원에서 적장들을 폭살한 폭탄 1발과 수류탄 1발, 권총 2자루와 실탄 15발이 감추어져 있었지요. 일본인 동지인 야타베 무우지는 거사 장소인 한 블록 앞 일식요리점 육삼정 정문 앞에서 주중 일본공사 아리요시가 나타나면 신호를 보내기로 했지요. 참으로 숨 막히는 일촉즉발의 순간입니다.

사실 이번 거사는 백 의사께서 고향인 전북 정읍군 영원면 은선리에서 1919년 3·1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중국 봉천으로 피신해 항일투쟁 최일선에 뛰어든 지 14년만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천재일우의 기회이지요. 24살 젊은 청년이던 의사님은 고향과 서울에서 일본 경찰에게 쫓겨 중국 북경으로 망명, 당시 독립운동 3거두인 이회영·김창숙·신채호 선생들과 동고동락하며 신사상을 받아들였지요. 이때 중국 최초의 아나키스트단체인 재중국무정부주의자연맹을 만든 데 이어, 상하이에서 1928년 결성된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에도 한국대표로 참가하셨지요.

저 중국 남방 끝쪽에 있는 푸젠성(福建省) 취안저우(泉州)에 이을규·정규 형제와 함께 내려가 항일 농민자위군을 훈련시키는 민단편련처운동에 참여하는 한편, 1930년에는 중국 북쪽 끝인 북만주 길림성 해림에 가서 김좌진 장군·김종진 등과 함께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해 재만동포들의 항일 독립기지 건설에 전력을 쏟으셨지요.

허나,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김좌진 장군과 김종진·김야운 동지들이 살해당하고, 일제 만주침략 준비가 본격화되어 눈물을 머금고 상하이로 힘겹게 탈출해 오셨을 때 얼마나 상심이 크셨습니까.

만주 독립전쟁의 좌절에 크게 상심하셨을 텐데, 상하이에 와서도 의사님은 쉼 없이 항일전선에 나서셨지요. 의열단 참모 출신의 아나키스트 동지 류자명 선생이 조직한 남화한인청년연맹에 참여해 함께 기관지 <남화통신>을 제작하시고, 중국인과 일본인·미국인 등이 참여하는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해 행동대로 흑색공포단도 조직하셨지요.

항일구국연맹 맹원들은 친일적인 외교정책을 펴던 난징정부 외교부장 왕징웨이(汪精衛)를 암살하려다 부관을 죽이고, 샤먼(廈門)에 있는 일본영사관을 폭파하기도 했지요. 특히 백 의사님은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열리는 천장절 행사에 폭탄을 던지려 했다가 초청장을 주기로 한 일본기자가 약속을 어기는 바람에 윤봉길 의사에게 기회를 빼앗겼다며 분통해 하셨지요.

1933년 3월 17일 육삼정에서 벌이려는 이번 거사는 이처럼 언제든지 항일투쟁을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던 흑색공포단 단원들이 보름여 동안 온 힘을 기울여 준비해온 회심의 한방이었지요. 일본대학 출신이며 연맹의 서기부 책임자인 원심창 의사의 보고에 의하면, 일본 정부의 밀명을 받은 아리요시 주중공사가 오늘날 2천억 원에 해당하는 4천만엔의 비밀자금을 갖고 중국국민당 정부 각료들을 매수하여 만주를 포기하도록 교섭하려고 육삼정에 모인다는 것이었지요.

이에 남화연맹 의장 류자명과 흑색공포단 책임자 정화암 등이 단원들 전체를 불러 의견을 물었지요. 헌데, 단원들 모두 자신들이 이 죽음의 거사를 실행하겠다고 자청하는 바람에 제비뽑기를 하게 됐지요. 다행히 1년 전 홍커우공원에서 윤봉길 의사에게 기회를 빼앗긴 백 의사님이 당첨되었고, 해방 후 광복회장이 되는 이강훈과 재일민단 단장을 역임하는 원심창 동지가 동행하게 되었지요.

실행위원들은 즉시 아리요시 공사의 사진을 구하고, 놈이 타고 갈 차량의 번호와 연회장소 위치 등을 면밀히 알아내었지요. 이어 거사현장이 될 육삼정을 직접 답사하고, 작전계획을 짰지요. 먼저 놈이 연회를 끝내고 나와 차에 오르면 정문과 차량에 폭탄과 수류탄을 던져 경호원과 놈을 처치하고, 실패하거나 저항이 있을 경우 권총으로 확인 사살한 후 도주하기로 하였다지요.

물론 실행위원들이 잡히거나 총에 맞아 죽는다 하더라도 상하이와 베이징·난징 등 중국 각 신문사에 거사 목적을 담은 선언문이 뿌려질 예정이었으니 아쉬움도, 후회도 없다 하셨지요. 몇 차례 예행연습까지 마친 후, 거사 당일 저녁 류자명 의장이 마련한 송별회에 11명의 동지들이 모였다지요. 백 의사님은 “저승에서 만납시다”라는 쿨한 작별인사를 남겨 동지들을 눈물짓게 하셨지요.

이런 치밀한 준비와 비장한 각오를 갖고 마침내 세 동지는 운명의 그날 3월 17일 밤 9시경 송강춘의 문을 열었던 것이지요. 허나 잠시 후 어디서 대기했는지, 악명높은 상하이 일본총영사관 형사들과 경찰대 수십명이 유리창문을 깨고 들어와 세 동지를 모두 체포하고 말았죠. 일본 요인의 암살을 계획한다는 정보를 입수해 원심창에게 접근한 일본인 밀정이 일본총영사관에게 의거계획을 밀고해 체포조를 대기해 두었으니, 원통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요. 이것이 이봉창·윤봉길 의거와 함께 ‘해외 3대 의거’라 일컬어지는 육삼정 의거라 하겠지요.

비록 3의사는 검거되어 일본으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받았지만, 계획대로 중국 각 신문에 거사계획이 대서특필되었지요. 이로써 장개석과 일본군이 만주를 장악하려 벌인 추악한 밀약이 폭로되어 일제 공작을 막는 데 성공하였지요. 나가사키 재판소는 주동자인 백 의사님과 원심창 지사에게 무기징역을, 이강훈 지사에게는 15년형을 선고했지요. 백 의사님은 재판장에게 “우리는 정당한 행동을 하다가 죽는 것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우리가 아나키스트라는 것을 인식하라!”고 소리치셨지요.

오랜 시간 폐결핵을 앓았던 의사님은 1년만인 1934년 6월 5일 적국의 옥중에서 끝내 숨을 거두었으니, 나이 39세의 일이지요. 통탄할 일입니다. 일제에 의해 형무소 야산에 버려졌던 의사님의 유해는 환국한 김구 선생의 각별한 당부와 원심창 등 동지들이 어렵게 찾아내어 이봉창·윤봉길 의사와 함께 서울 효창공원에 잘 안장해 주셨지요. 의사님의 유언처럼 무덤 위엔 늘 님을 그리는 후학들의 마음이 담긴 꽃 한 송이가 놓여 있습니다. 그립습니다. 비록 몸은 뵈올 수 없지만 뜻은 널리 살아 절대자유와 평등사회를 꿈꾸는 청년들 가슴에서 뛰고 있으니 부디 영면하소서.

*백정기(白貞基, 1896~1934)
전북 정읍 출생. 3·1운동에 참여하고, 만주 봉천으로 망명했다. 북경에서 이회영·신채호·정화암 등을 만나 아나키즘에 입문해, ‘절대자유’와 ‘평등사회’ 건설을 모토로 가장 비타협적인 독립운동의 길을 걸었다. 1925년 상해 5·30 총파업 당시 중국인 아나키스트들과 노동운동에 뛰어들었고, 농촌 자치운동에도 가담했다. 1931년 극동 3국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일제 기관 파괴·요인 암살·친일파 숙청 등을 결행하는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을 조직하고, 이회영․정화암 등과 남화한인청년연맹을 결성했다. 1933년 주중일본공사 아리요시를 처단하려다 체포되어 무기형을 받고, 옥중에서 순국했다. 호는 구파(鷗波).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김명섭 교수, 아나키즘 연구가.

*필자 김명섭
1966년생. <재일한인 아나키즘운동연구>로 단국대 대학원에서 문학박사를 받았다. 한국근대현대사학회 연구·홍보이사, 한국아나키스트독립운동가기념사업회 학술이사, 용인독립운동기념사업회 학술이사, 위례역사문화연구소 이사 등을 맡아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한국 아나키스트들의 독립운동>, <자유를 위해 투쟁한 아나키스트 이회영> 등을 썼다. 단국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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