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100년] 올곧게 살다 외롭게 가신 국무령 만오 홍진 선생님께

독립운동가 만오 홍진 선생

[아시아엔=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 만오 선생님, 인사부터 먼저 여쭙겠습니다. 채현국이올습니다. 일제가 패망하자 선생님이 임정요인들과 도착한 상하이에서, 학병들 숙식을 도맡고 귀국을 주선하느라 분주하던 채기엽의 아들입니다.

선생님과 함께 신한민주당을 만든 이상정(李相定, 1897~1947) 장군을 따라 찾아뵈었을 것이라 짐작합니다. 이상정 장군의 부인이자, 전투기 조종사로 이름을 날린 여성독립운동가 권기옥(權基玉, 1901~1988) 여사의 집을 아버지가 마련해드렸으니까요. 그때 아버지는 채종기라는 이름을 썼습니다. 기억하시겠습니까?

아버지는 교남학원(嶠南學院, 현 대륜고등학교) 1회 졸업생입니다. 이상정 장군의 동생으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쓴 시인 이상화(李相和, 1901~1943)가 교사로 있었고, 이육사 선생이 다닌 학교입니다. 아버지는 소싯적부터 사업을 만드는 재주가 비상했습니다. 그러나 식민지 백성으로 치부(致富)하고 산다는 건 사람의 도리가 아니지요. 조부가 관동대지진 때 학살당한 원한을 어찌 잊겠습니까. 아버지는 왜놈과 싸우겠다고 무작정 중국으로 건너갔는데, 이상정 장군은 만날 길이 없고, 전쟁터를 넘나들며 장사를 해 번 돈을 독립운동 하는 분들에게 뒤로 드렸답니다.

선생님이 1945년 12월 환국하시고, 아버지는 다음 해 여름 배편으로 부산에 내려 가족이 살던 대구로 돌아왔습니다. 굳은 얼굴이었습니다. 해방은 되었으되 38선이 그어졌고, 남쪽에서는 친일파들이 뱀대가리를 내미는 형국이라 표정이 밝을 리가 없지요. 제가 태어난 게 1935년, 아버지가 대구경찰서 폭파 미수사건에 연루돼 중국에 간 게 1937년. 안 그래도 아버지가 낯선데, 어린 저는 아무것도 모르고 풀이 죽었습니다.

해방 후 대구는 좌익의 기세가 등등했습니다. 저보다 여덟 살 위인 형도 그쪽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서둘러 아들 둘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대구에서 미군정에 반대하는 큰 데모가 일어나 사람들이 떼로 죽고 다친 게 두 달 뒤였으니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었나 봅니다. 낙원동 입구에 살았는데, 아버지 얼굴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습니다. 중국에서 빈털터리가 되어 귀국한 터라, 사업 구상하러 밤낮 없었겠지요.

어느 날, 아버지가 집에 들어왔습니다. 매달리고 싶어 뛰쳐나갔더니, 웬걸 대구 때보다 더 굳은 얼굴이었습니다. 무서울 정도였습니다. 곁으로 다가가지도 못하고 겁에 질린 아들은 아랑곳없이, 아버지는 땅이 꺼질 듯 한숨만 내쉬었습니다. 어찌 이럴 수가 있나. 만오 홍진 선생께서 외롭게 돌아가셨다니. 그 어른이 어떤 분인데, 해방된 조국이 이래 대접해도 되는가. 나라 꼴이 어떻게 되려고 이러는가…. 그때가 1946년 가을. 70년이 더 지난 일이지만, 지금도 아버지의 장탄식이 눈에 선합니다.

만오 선생님. 선생님은 약관(弱冠)의 나이에 대한제국 판사와 검사를 지냈습니다. ‘소년급제’를 하신 셈입니다. 출세한 자들이란 대개 자기나 자기 가족밖에 모르는 치사한 위인들이거늘, 선생님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내 손으로 어찌 의병을 벌 준단 말인가! 선생님은 법복을 벗어 던지고, 독립지사들 변론에 나섰습니다.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시절 민주화운동을 변호하던 양심적인 변호사들이 있었는데, 제 친구 강신옥도 그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그분들의 비조(鼻祖)가 선생님이십니다.

선생님은 더 나아가셨습니다. 3·1운동 연락 책임을 맡고, 민족대표 33인이 일제에 몸을 맡기자,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13도대표자회의’를 소집했습니다. 세 임시정부 중에서 유일하게 국내에서 수립된 한성임시정부는 이렇게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상하이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법제위원장,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통합에 힘쓰셨습니다.

우리 독립운동이 지역·종교·이념으로 갈려 서로 반목하는 상황이 닥칠 때마다, 선생님은 일제에 맞서 하나로 뭉쳐야 한다고 준열하게 질타하셨습니다. 1926년, 선생님이 국무령(國務領)에 취임한 직후 내놓으신 3대 시정강령을 기억합니다. “비타협적 자주독립운동 진작·전민족대정당 창당·피압박민족과 연맹 체결.” 그것은 해방과 건설을 진정으로 바라는 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아니 누구든 동의해야만 하는 독립운동의 원칙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저는 “비타협적 자주독립운동”에 주목합니다. 당시 이승만이나 김성수가 외치던 ‘외교론’이니 ‘준비론’이니 하는 구호들이 민족을 얼마나 현혹했습니까. 열강의 비위나 맞추고 일제의 눈치나 살펴서 해방이 되겠습니까. 설령 독립이 된다 한들, 우리 민족 손으로 새나라를 건설할 수 있겠습니까. 동포들이 항일에 목숨 바칠 때, 유학 가고 연줄 만들어서 독립의 열매를 가로채겠다는 야비한 수작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일제가 항복하고 미군이 들어오자, 실제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까.

만오 선생님. 어르신께 올리는 편지 글월에 이렇듯 울분을 마구 쏟아내는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민족의 반역자들, 역사의 배신자들에 대해서는 선생님께서 더 통분하셨을 겁니다. 후인(後人)이 모자라서 여태껏 청산을 마치지 못했으니, 그것이 죄스럽고 원통하여 춘치자명(春雉自鳴)의 독설을 적고 말았습니다.

선생님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자주독립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와 함께 우리 독립전쟁의 3대 대첩인 대전자령(大甸子嶺)전투. 임시정부의 분열상을 극복하고자 선생님은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만주로 가서, 신숙(申肅, 1885~1967) 선생, 지청천(池靑天, 1888~1957) 장군 등과 함께 한국독립군을 창설했습니다. 이 한국독립군이 1933년 6월 중국군과 연합해 일본군에 대승을 거둔 전투가 바로 대전자령전투입니다.

선생님은 항일구국전선에 투신한 이래 변함없이 민족대단결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이 한국독립당으로 통합하는 물꼬를 터주셨고, 그 한국독립당의 독단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1945년 2월 충칭(重慶)에서 신한민주당을 만들어 일체 사심을 버리고 화합하자고 호소했습니다.

“본 당은 전민(全民)이 공동으로 마땅히 앞으로 하여야 할 임무의 집단행동을 수행하는 데 있으며, 같은 사상이나 같은 주의, 혹은 어떠한 계급의 정치단체는 결코 아니며 정권을 욕망하는 정당도 아니며, 민족을 구하고 맹국(盟國)을 광복하고 민주를 실천하는 애국주의의 결사(結社)라.”

선생님은 참으로 올곧게 사셨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수레바퀴는 선생님께서 애쓰신 대로 굴러가지 않았습니다. 해방 후 주도권을 잡은 세력은 미군을 등에 업은 이승만과 친일지주들의 한민당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 환국하시어 정국이 돌아가는 꼴에 통탄하며 가난과 병마에 시달릴 때, 그들은 친일부역 정상배들로부터 거둔 정치자금을 물 쓰듯이 뿌리면서 분단을 영구화하는 모략을 획책하고 있었습니다. 미군정 정치담당 버치(L. Bertsch) 중위의 문서에 나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는 서울에 올라와서 선생님께서 고생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약간의 돈과 양식을 전해드렸다고 합니다. 상하이 때였다면 집도 구해드렸겠지요. 하지만 수중에 돈이 마른 형편이라 자주 찾아뵙지는 못했답니다. 쌀 몇 말을 어렵게 구해 들고 갔는데, 아뿔싸 이미 돌아가신 뒤였다니, 이런 망극한 일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아버지는 원체 말이 없는 분이라, 자세한 저간의 사정은 나중에 소설가 이병주 씨에게 들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이승만이 어떤 사람인지 확인할 수 있는 일화 하나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대성학교 출신 김성일 선생으로부터 제가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나서, 아버지는 경운동에 작은 연탄공장을 차렸는데, 김 선생이 가끔 들르셨습니다. 아주 점잖은 신사였습니다. 저도 고등학교 다니면서 거기서 일했습니다. 하루는 김 선생이 저를 곁으로 부르시더니 거의 귓속말로 이러시는 겁니다.

“내가 말이오. 상하이에서 리 박사를 가까이 모셨소. 우러러보는 양반이었으니까. 그런데 리 박사가 우리 둘이서만 있을 때면, 자꾸 도산을 비난하는 거요. 도산은 우리 독립운동에서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 말이오. 내가 도산의 제자나 마찬가지인데도, 없애야만 할 사람이라고 몇 번이나 다짐을 주듯이 그러는 거요.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평생 이 얘기를 입 바깥에 내지 않고 살았는데, 누군가에게는 전해야 할 것 같아서 말해주는 거요.”

도산 선생이 누굽니까. 평생 선공후사(先公後私)·무실역행(務實力行)을 실천하신 분 아닙니까? 그런데 도산은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 저주를 하다니요? 임시정부 평지풍파는 자기가 다 일으키고, 도산은 뒷수습하느라 골병이 들었는데 말입니다. 몰래 제거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우리 국민은 백범이 왜 쓰러지셨는지 알고 있습니다. 이러니, 아버지가 만오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걸 알고 ‘나라 꼴이 어떻게 되려고 이러는가’ 땅을 칠 수밖에요.

만오 선생님. 선생님께서 돌아가실 적에 제 나이 열두 살. 해방을 맞았을 때 저는 대한제국이 있었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나라가 망했는데 사람들이 왜 좋아하나, 어리둥절했을 정도입니다. 소학교에서 황국신민으로 철저히 세뇌당했던 겁니다. 그 모습은 권력이 조련한, 파블로프의 개가 보이는 ‘반응’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아직도 그런 사람들이 이 땅에 남아 있습니다. 양손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쥐고 흔들며 악을 씁니다.

제가 완전히 속아서 살았다는 걸 깨닫고, 저는 그때부터 교과서는 절대로 믿지 않으리라 독하게 마음먹었습니다. 모든 권위는 남을 이용하고 짓누르기 위한 술수에 지나지 않는다. 네가 안다고 믿는 건 실은 권력이 너를 길들인 결과다. 네 머리로 생각하는 법을 스스로 깨쳐라. 그렇게 좌충우돌 살았습니다. 그래서 여든다섯 살 먹은 할배가 되어서도 늙은이 믿지 말라고 소리 지르고 다닙니다.

일제가 원수의 나라인 줄도 모르고 제 나란 줄 알았다고 고백했더니, 젊은이들은 딱하다는 반응입니다. 양극화로 골병을 앓으면서도 민주화를 의심하지 않는 젊은이들이 제 눈에는 더 딱한데 말씀입니다. 아이고, 선생님. 독립의 길은 멀고도 멉니다.

만오 선생님께서 한성임시정부를 세우신 100주년에 경남 양산에서 한창 피어나는 학생들과 주책없이 어울려 신나게 지내는 채현국이 올립니다

필자 채현국은 1935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철학과를 다니며 연극반을 만들어 배우를 지망했으나, 얼굴이 받쳐주지 않아 포기하고, 중앙방송국(현 KBS) PD로 입사했다. 박정희 찬양 프로그램을 만들라는 상사의 지시에 사표를 내던지고, 부친의 탄광을 맡아 일약 거부가 되었다. 유신독재 밑에서 재벌로 사는 게 싫어 광부들에게 재산을 다 나눠준 뒤, 민주화운동 하는 이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지냈다. 정곡을 찌르는 거침없는 언표로 ‘건달할배’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경남 양산의 효암학원(개운중?효암고) 이사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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