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100년] 김성숙, ‘조국통일’ ‘민중해방’에 평생 바친 진보적 민족주의자
[아시아엔=김재명 프레시안 국제분쟁전문기자, 성공회대 겸임교수] 운암 김성숙 선생님께서 70년 평생 그려갔던 궤적은 고난에 찼던 우리 한민족의 궤적이나 다름없지요. 멀리 이역 땅 중국에서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서 독립운동에 온갖 정열을 쏟았고, 일제의 억압 사슬에서 벗어났지만 남북으로 좌우로 갈려 극한 대립을 거듭하며 동강난 이 땅에선 민족통일을 위해 힘썼고, 1950~60년대엔 혁신계의 중진으로 활동하셨지요.
그렇게 한평생을 민족의 해방과 통일을 위해 애쓰다 숨을 거두실 때까지 선생이 남긴 발자국은 그 폭이 넓고 굵었지만, 오늘날 선생의 이름 석 자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얼마나 될까요.
적지 않은 애국지사들 가운데 우리가 선생을 특별히 눈 여겨봐야 할 까닭은 무엇일까를 먼저 생각해봅니다. 선생은 20세기의 약소민족이 겪어야 했던 아픔을 다른 무엇보다 민중의 편에 서서 고민했고, 치열한 투쟁으로 자신의 삶을 희생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저는 선생을 우러러봅니다. 그 어려웠던 시절, 최남선이나 이광수 같은 일부 지식인들은 입으로는 민족과 국가를 위한다고 말하다가, 힘들다 싶으면 일신의 편안함을 찾아 변절을 하면서 한때 그를 따랐던 사람들에게 구차스런 궤변을 늘어놓았던 것을 우리는 잊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좌우 이념논쟁이 지금도 끊이지 않는 한반도에선 선생을 바라보는 눈길이 마냥 곱지만은 않다는 걸 선생도 잘 아시겠지요. 일부 보수적인 학자들은 선생을 ‘공산주의자’였다고 주장합니다. 그 근거로는 지난날 중국의 급진적 변혁운동의 하나인 광동꼬뮨(1927년)에 참여했다거나, 월북한 약산 김원봉과 함께 조선의열단과 조선의용대에서 활동했다거나, 8·15 해방 뒤 몽양 여운형을 비롯한 이른바 민족주의 좌파 인사들과 가까이 지냈다는 전력을 꼽곤 하지요.
하지만 이런 전력들이 선생을 공산주의자로 규정할 수 있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고 봅니다. 선생이 중국에서 활동한 20세기 전반기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에 이론과 실제의 양면에서 뚜렷한 선을 긋기가 어려웠지요. 볼셰비키혁명의 성공이 전세계 약소민족과 빈민층에게 희망을 불빛을 비추던 상황에서 사회주의운동을 민족해방운동의 한 방편으로 삼는 일은 전 세계적인 흐름으로 여겨지던 때이기도 했으니까요. 또한, 강도 일본에 맞서 싸운다는, 반일 투쟁이라는 공동의 이념 아래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손을 잡고 함께 투쟁전선을 펴는 일들도 많았지요.
8·15 뒤 선생이 몽양 여운형의 정당인 근로인민당에 참여할 당시만 해도 국내 정치세력은 좌와 우로 이분법적으로 뚜렷이 나뉘지 못한 일종의 교착상태였지요. 만일 선생이 공산주의자였다면 박헌영의 남로당에 반대하지 않았을 테고, 6·25 당시 월북이나 이른바 ‘부역’도 서슴지 않았겠지요.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선생을 공산주의자로 규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겨집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반공’을 외쳐댔던 지난날의 친일파들이 종종 그러했듯이, 혹시라도 어떤 숨은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일까요.
이 글을 쓰기 딱 한 달 전에 저는 중동 팔레스타인에 있었습니다. 그곳은 1948년 유대인들이 그때까지만 해도 지도상에 없던 이스라엘이란 나라를 세우면서, 많은 팔레스타인 원주민들의 땅과 집을 빼앗고 대량 난민을 만든 곳이죠. 이스라엘의 군사적 억압 통치는 일제시대의 그것과 빼닮았다고 말할 수 있는데요, 하마스(Hamas)를 비롯해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세우려는 꿈을 지닌 투쟁단체들을 이스라엘은 ‘테러조직’이라 낙인을 찍어왔지요. 하지만 많은 팔레스타인 민중들은 하마스 대원을 독립투사로 여깁니다. 누구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그가 어느 쪽에 서 있는가에 따라 달리 보이듯이, 선생을 공산주의자로 여기는 사람을 설득한다고 보는 눈이 달라지겠습니까. 그냥 내버려 둬야죠.
한마디로 선생이 칠십 평생 한결같이 걸어갔던 길은 이데올로기의 편향성과는 얼마간 거리를 둔 것이었습니다. 극단적인 좌우익을 반대하고 온건 우파 민족주의세력과 온건 좌파 사회주의 세력의 합작으로 우리 민족의 통일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것이 선생의 신념이었지요. 굳이 선생을 특정 사회과학 용어로 규정한다면 ‘민족사회주의자’가 적절할지 모르겠으나, 선생은 다른 무엇보다 민족의 분단을 반대하고 통일 외쳤던 진보적 민족주의자였다고 봅니다. 이는 저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오늘날 여러 사람들이 그렇게 여기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참 아쉬운 대목을 쓰지 않을 수 없군요. 망명지 중국에서 일찍이 선생은 활동가이면서도 진보적 이론가이자 문필가로서 이름을 떨쳤지요. 하지만 오늘날 선생이 남긴 문건들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언젠가 선생의 부인을 만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요, 내리는 비나 겨우 피할만한 비좁은 판잣집 한구석에 놓여있던 큰 가방 안의 서류 꾸러미들을 선생이 돌아가신 얼마 뒤 지나가는 고물상에게 처분했다고 하는군요. 멀리 중국에서부터 들고 들어온 서류 꾸러미들을 그냥 무게를 달아 팔고 받은 몇 푼으로 하루 저녁거리 마련에 썼다는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너무나 아쉽습니다.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안 된 이 땅에선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한다”는 말들을 합니다. 오래전에 만났던 어느 의병장의 손자는 집안이 기울어 초등학교조차 간신히 마쳤다고 했지요. 그런 탓일까요, 선비로 이름 높던 할아버지의 존함 석 자를 한문(漢文)으로 쓸 줄 모르더군요. 그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마음이 참 무거웠습니다. 친일파 악질 경찰관의 아들은 외국 유학에다 국무총리를 비롯한 고관대작이 돼 부귀영화를 대물림해 누려왔지만,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은 저학력과 가난을 대물림하는 세상이니 말입니다.
중국에서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온 선생님도 돈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이리저리 셋집을 옮겨 다니셨지요. 세상을 뜨기 3년 전에야 동지·후배들이 ‘비나 피하도록’ 한다는 뜻을 지닌 피우정(避雨停)이라 이름 지은 작은 오두막을 마련해줘 그곳에서 지내셨지요. 기관지염으로 건강이 좋질 못했으나, 형편이 그러하니 병원에 갈 엄두는 못 내셨다고 들었습니다. 가끔 약국을 이용할 뿐이었으나, 그 약값 마련도 쉽지가 않았기에 참고 지내다가 끝내 눈을 감으셨지요. 선생께서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하고 돌아가신 이틀 뒤 국회에서는 혁신계 출신의 박기출 의원이 보사부장관을 상대로 선생을 비롯한 독립유공자의 무료진료 문제를 따지기도 했다고 하는군요.
임정 국무위원을 지냈던 선생에게는 생전에 국가로부터 아무런 혜택이나 보상이 주어지지 않았지요. 오히려 혁신계 인사라 하여 선생은 늘 권력기관에서 감시의 대상이 되었고 걸핏하면 붙잡혀가 몇 달씩 감옥에서 고역을 치르곤 했지요. 말년에 병마에 시달리는 선생을 보면서 친지들이 “그토록 독립운동을 하며 고생했는데 고작 이렇게 식사도 변변히 못하고 약도 제대로 못쓴 채 돌아가셔야 되겠느냐”고 푸념하면, 선생은 이렇게 나무라곤 했지요. “무슨 상을 바라고 독립운동을 한 것 아니야.”
민족해방과 통일을 위해 일생을 바친 선생에게 늦었지만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이 주어진 것은 1982년 전두환 군사정권이 출범한 지 얼마 안 됐을 무렵이었습니다. 5·18 광주의 피를 손에 묻히고 출범한 전두환 정권이 임정 요인을 우대함으로써 없는 정통성도 더하고 민심을 달래려고 선생에게 훈장을 준 것이란 일부의 지적에 대해 무덤 속 선생은 어떤 생각을 하실지 궁금합니다.
선생의 가족들이 그야말로 ‘됫박질’로 어렵사리 입에 풀칠을 했으니, 쌀밥에 고깃국은 딴 세상 이야기였다고 하더군요. 그렇다고 선생께서 부귀영화를 바라고 민족해방운동이나 민족통일운동을 하신 것은 아니실 테니, 궁핍하게 지냈던 당신의 삶에 대해선 서운함이 없으시겠지요. 언젠가 선생의 친필 원고가 어디선가 발굴돼, 민족통일과 평등세상을 향한 선생의 드높은 뜻을 다시금 새겨보게 되길 바랄 뿐입니다.
*김성숙(金星淑, 1898-1969)
평북 철산에서 태어나 한평생을 조국독립과 민중해방에 몸을 바친 진보적 민족주의자. 불교 승려로 1919년 3·1운동에 참여, 경기도 양주에서 만세시위를 이끈 뒤 2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1923년 중국으로 망명, 의열단을 비롯한 여러 투쟁조직에서 항일운동을 펼치고, 혁명 의지를 담은 왕성한 집필 활동을 이어갔다. 민족진영 좌우파가 대동단결을 꾀하던 무렵인 1942년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백범 김구와 함께 조국광복을 위해 분투했다. 1945년 임정 요인들과 함께 귀국한 뒤 몽양 여운형 등과 손을 잡고 극우와 극좌 양쪽을 비판하며 좌우합작과 통일운동에 힘썼고, 민주혁신당·통일사회당 등 혁신계 중진으로 평등사회를 꿈꾸며 이승만-박정희 독재에 맞서다 여러 차례 투옥됐다. 호는 운암(雲岩). 1982년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필자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가. 팔레스타인, 이라크를 비롯한 분쟁지역들을 취재 보도해왔다. 서울대 철학과, 뉴욕시립대 국제정치학 박사과정을 거쳐 국민대에서 정치학박사를 받았다. 경향신문, 중앙일보 기자를 거쳐 인터넷 언론 <프레시안> 국제분쟁전문기자로 일하면서, 성공회대 겸임교수로 ‘국제분쟁과 국제기구’ 등의 과목을 맡고 있다. 김성숙을 비롯한 통일운동가들의 삶을 분석한 <한국현대사의 비극: 중간파의 이상과 좌절>과 <오늘의 세계분쟁>,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군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세상>, <시리아전쟁>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