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100년] ‘활자 보물’ 지킨 대한민국임시정부 청년들께

독립신문 창간호

[아시아엔=홍동원 글씨미디어 대표] 인사를 어떻게 드려야 할지 막막합니다. 이 편지 수신인이 한 분이 아닌데, 정확히 몇 분인지조차 모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선생님들이 한글 활자를 필사적으로

“남경 한구 무한 장사 광동 광서 귀주 경유 사천 중경까지 수만 리를 목선으로 윤선(輪船)으로 공로(公路)로 기차로 수 만리 길을 헤쳐 생명의 길을 헤매다 …… 우리 청년들은 그동안에도 장도에 거듭거듭 차로 배로 기차로 그 보배 귀중품으로 생명같이 하는 활자 세 상자를 목숨을 걸고 끌고 다니니, 급할 때는 혼자서 냉큼냉큼 주위를 살피며 올리고 내리는 모습을 볼 때 사람이 급하고 막다른 골목에 부닥치면 기운이 절로 나는 이치가 이런 것을 보고 하는 말인가 보다. 그 보물 세 상자를 이 배에 같이 실어 올려 생사를 같이하는 바이다.”(김효숙,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나>, 1996년 탈고, 미출간)

활자는 납으로 만듭니다. 보통 무거운 게 아닙니다. 개당 100g이 넘습니다. 요즘 한글 확장형 글자수가 1만1172자인데, KS완성자도 2350자나 됩니다. 선생님들 시대와 맞춤법은 다르지만 모아쓰기라는 한글 구조는 같으므로, 상용글자 수는 비슷할 겁니다. 이게 기본 한 벌인데, 실제 인쇄를 하자면 활자가 훨씬 더 많이 필요합니다. 책 한 페이지에 ‘다’ 자만 수십 번 쓰이지 않습니까? 대한, 독립, 조국, 광복, 이런 단어는 또 얼마나 많이 나오겠습니까?

그러니 선생님들이 실어나른 활자를 적게 잡아 5천개라고 쳐도, 활자 무게만 500kg, 세 상자에 나눴다면, 상자당 160kg 이상. 쌀 두 가마니 무게입니다. 중일전쟁이 터지자 난징(南京)을 떠나 충칭(重慶)에 도착하기까지, 공간으로는 1만리가 넘고 시간으로는 거의 2년이 걸린 임시정부의 피난길. 이걸 끌고 가셨다니, 정말 아득합니다.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는 우리 조상들이 만들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글자는 한글이고요. 그러나 조선은 거꾸로 갔습니다. 어득강(魚得江)이라는 신하가 서점을 열게 해달라는 상소를 올렸더니, 조정은 뭉개버립니다. 이게 중종 때 일인데, 1907년 기독교 서적을 주로 취급하는 ‘예수교서회’(종로서적의 전신)가 생길 때까지, 이 나라에는 자유롭게 책을 사고파는 서점이란 게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사상과 출판의 자유를 꽁꽁 묶어놓은 사회에서, 인쇄술이 발달할 리가 없지요.

활자는 정성과 오랜 연마를 통해 가능하다. <사진 한겨레 이길우 선임기자>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이라는 한성순보(漢城旬報, 1883). 순한문 신문임에도, 활자를 일본 요코하마에서 들여왔습니다. 모리자와라는 회사가 만들었습니다. 근대식 인쇄기에 맞는 활자 제작기술이 부족했으니까요. 비슷한 시기에, 만주 봉천에서 우리말로 번역한 성경을 인쇄하기 위해 한글 활자가 제작됩니다. 완판본(完板本, 전주에서 찍은 목각판본) 열녀춘향수절가에 쓰인 서체가 바탕인데, 외국인 선교사들이 이 목각판본 기술자를 신의주에서 찾아내 데려가서 만들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이 서체가 바로 독립신문(1896)의 서체입니다. 아마도 우리말 성서에 쓰인 활자를 수공업적으로 복제했겠지요. 그러니까, 독립신문만큼은 일본인이 만든 활자는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근대식 활자 개발은 이제 시작인데, 조선이 그랬던 것처럼, 대한제국은 활자가 백성의 힘을 키울까 두려워했습니다. 보부상에게 만민공동회를 습격하라는 밀명을 내린 사람이 고종 아닙니까?

지금 시대는 변해서, 활자 대신 폰트라는 걸 써서 컴퓨터로 제판 작업을 합니다. 이 폰트는 손에 잡히는 물건이 아니라서 활자보다는 싸지만, 그래도 개발비로 수억이 들어갑니다. 폰트 한 벌 만드는 예산을 집 한 채 짓는 값에 비교한다면, 활자는 성 하나 쌓는 비용과 맞먹습니다. 매관매직에 날이 새는 줄 모르던 왕실에 바란다는 게 딱하지만, 이런 일은 나라가 할 일입니다.

대한제국은 망했고, 일제가 이 일을 해줄 리가 만무합니다. 그럼 부자들이라도 맡아줘야 하는데, 이 당시 부자들은 독립운동에 투신한 몇몇 집안을 제외하면 모조리 친일파가 되어 재산 불리는 데 혈안이 되었고, ‘활자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래도, 왜놈의 때가 묻지 않은 한글 활자가 아직 남아 있었나 봅니다. 천도교가 운영하던 인쇄소 보성사(普成社)가 인쇄한 <기미독립선언서>의 서체는 얼마 뒤 일본인들이 본격적으로 개발에 나서는 한글 활자의 서체와는 다릅니다.

그러나 일제가 ‘문화통치’를 내세우자, 그들의 활자가 시장을 장악합니다. 일제(日製)를 사다 쓰면 되는데, 친일파들이 뭐하러 자기 돈 써가며 활자를 개발하겠습니까. 이 사람들이 지금 사업을 한다면, ‘경쟁력’이란 논리 뒤에 숨겠지요. 공교롭게도 일제(日製)와 일제(日帝)는 발음이 같습니다. 그 무렵, 이광수가 변절한 게 우연이 아닙니다. 이리하여,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42행 성서>를 찍어내기 200년 전에 <고금상정예문(古今詳定禮文, 1234)>을 인쇄한 나라에서, 활자의 명맥은 완전히 끊겨버렸습니다.

1919년 4월 11일,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한성과 노령과 상해 임시정부가 합쳤습니다. 그리고 8월 21일, 기관지 <獨立>이 창간됩니다. <獨立>은 제22호(1919년 10월 25일)부터 <獨立新聞>이라 제호를 바꾸었고, 제169호(1924년 1월 1일)부터는 <독립신문>이라고 한글 제호를 썼습니다. 활자는 어디에서 났을까요? 일제의 삼엄한 감시망을 뚫고 자기 몸 하나 빼내기도 쉽지 않은 터에, 몇 상자가 될지도 모를 활자를 국내로부터 반출한다는 건 너무나 위험한 일입니다. 이 시기 상해 교포의 수가 2천명에 불과했다니, 잇속에 밝은 중국인들이 한글 활자를 개발할 이유도 없고요.

만주 봉천에서 우리말 성서를 인쇄했던 활자, 서간도에서든 북간도에서든 우리 책을 찍어내던 활자 외에, 한글 활자를 달리 구할 방도가 있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렇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이천만 동포에게 항일을 호소하던 수많은 성명서와 포고문을 인쇄했던 그 활자야말로, 우리 민족의 손에 남겨진, 일제 식민지배의 저주(咀呪)를 벗어난 마지막 활자였습니다.

선생님들이 실어나른 활자가 바로 그 활자였습니다. 선생님들은 왜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그 무거운 활자 세 상자를 지키려 했을까요? 동포의 손에 전달해야 할 인쇄물이 태산이니까요. 최종 목적지인 충칭에서 한글 활자를 구할 수 있을 거라고, 태평하게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허리가 휘고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을 견디면서, 선생님들은 이 활자를 잃으면 민족혼마저 잃게 된다고 이를 악무셨겠지요. 후배가 건네준 김효숙 선생님의 원고를 받아든 순간, 저는 정말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독립지사들이 만주 어딘가에서 구해와 상해에 둥지를 틀고 <독립신문>을 인쇄했던 활자, 선생님들의 천신만고로 충칭에 닿은 그 활자의 기구한 운명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마치, 몇 년 뒤 닥칠 분단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예고라도 하듯이. 해방의 새벽을 맞았는데, 활자가 사라진 겁니다. 김효숙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쓰셨습니다.

“남경에서 젊은이들이 그 무거운 활자 세 상자를 중경까지 끌고 간 것은 확실히 아는데, 중경에서는 어찌 되었는가, 모르겠네요. 아깝고 아쉬우네요. 하기는 한국에는 그 이상의 활자가 많으니 잊어버려야겠지요.”

긴장이 풀렸던 까닭이지요. 이제 조국으로 돌아가 새나라를 건설할 마당에 ‘활자 따위’야 놓고 간들 어떠리. 청년들이 고생하는 게 너무 안쓰러워, 임시정부 요인들께서 이리 생각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천려일실(千慮一失). 활자는 ‘활자 따위’로 가볍게 여길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한강의 기적’ 전까지는 가난해서 못 만들었다고 치죠. 그럼 그 뒤에는요? 못 만든 게 아니라 안 만든 겁니다. 투기할 돈은 있어도 개발할 돈은 없다는 식이죠.

미군정 3년, 이승만정권 12년, 민주당정권 1년, 박정희정권 18년. 전두환정권 8년. 장장 40년 동안, 이 나라는 끝내 제 손으로 제 활자를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조한 활자가 전혀 없지는 않았습니다. 일제가 비싸니까 복제해서 싸구려 활자를 만든 다음에, 쉬쉬하고 썼지요. 해방 후 50년 가까이 대한민국의 출판인쇄시장은 일제 활자가 지배했습니다. 활자 주권을 내던졌는데, 사상과 지식의 주권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일본인이 쓰고 번역한 걸 베끼고도 부끄러운 줄 몰랐으니, 식민지시대로 도로 돌아간 겁니다.

그러다가 사진식자-폰트의 순서로 디지털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사진식자 기술이 들어왔을 때도,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예전 활자에 해당하는 글자판을 일본에서 수입해다 썼습니다. 이게 얼마나 가겠습니까. 1987년 대한민국이 유네스코 세계저작권협약에 가입하자, 일본이 이빨을 드러냈습니다. 서체를 개발한 건 자기들이니, 한글 저작권은 일본에 있다고 주장하고 나선 겁니다. 88서울올림픽을 치르면서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라고 떠들었잖습니까. 꼼작 못하고 당하게 생겼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디지털 시대의 전파속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지면서, 한글 저작권은 묘한(?) 해결 방법을 얻습니다. 서체의 디지털 저작권이 그것이지요. 글자의 모양이 같은데 디지털로 만들었으니 괜찮다는 겁니다. 한글을 지배하겠다고 야욕을 품던 일본은 할 말을 잃었습니다만, 어이없게도 그 후폭풍은 우리에게 불었습니다. 디지털 서체, 즉 한글 폰트 개발자들이 설 땅을 빼앗은 겁니다. 문제가 그것뿐일까요.

한글을 할퀸 상처는 21세기에 와서도 지워지지 않고 있습니다. ‘명조체’라고 불리는 서체가 있습니다. 저는 이게 밝을 명(明) 자에 흐를 조(潮) 자인지 알았습니다. 그런데 암만 생각해도 이상한 겁니다. 명조의 짝은 암조(暗潮)가 돼야 하는데, ‘청조체’였거든요. 혹시나 해서 자료를 뒤져보니 이런, 명조(明朝)와 청조(淸朝)였습니다. 명나라가 관용(官用) 해서(楷書) 활자의 서체를 정하면서 명조체라고 명명했고, 일본이 저네들 히라카나 서체를 개발할 때 그 이름을 빌리면서 한글 활자 서체에도 갖다 붙인 겁니다. 사대의 굴레, 식민의 잔재란 이렇듯 지독합니다.

선생님들께서 애쓰신 지 벌써 80년이 지났습니다. 이 편지를 읽으시는 내내 가슴을 치셨지요? 죄송합니다. 힘이 달리고, 능력이 모자랐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마음을 조금 놓으셔도 됩니다. 뜻 있는 이들의 손으로 우리 서체가 속속 개발되고 있습니다. 정말로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리려고’ 한글 서체에 관한 문제들을 해결하려 많은 이들이 손에 손을 잡고 있습니다. 선생님들의 뜻을 잊지 않고, 저도 힘을 보태겠습니다. 고맙습니다.

3·1운동 100주년에 글씨 만드는 홍동원 드림

*활자 나른 청년들

이름도, 생몰연대도 전해지지 않고, 몇 명인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남경을 떠나 충칭까지 만 리가 넘는 피난길에 오를 때, 한글 활자를 놓고 갈 수 없다며 지고 나른 청년들의 이야기는 임시의정원 의장과 국무위원을 역임한 당헌(棠軒) 김붕준(金朋濬) 선생의 따님 김효숙 여사의 회고록에 유일하게 실려있다. 이 청년들이 바로 마른일 궂은일 가리지 않고 조국 해방 하나만 바라며 구슬땀을 흘린 독립의 일꾼들이다..

*필자 홍동원

196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독일에 유학 가서 눈 똑바로 뜨는 공부를 하고 돌아왔다. 북디자인에 뛰어들어 그동안 만든 책이 1000권이 넘지만, 세어보지는 않았다. 한글 서체 개발을 평생의 사업으로 여긴다. 한겨레신문 서체를 만들었고, <백년편지> 각 부 시작하는 면의 독립운동가 어록과 각 편지 말미 발신자 이름 서체도 그의 솜씨다. 글씨미디어 대표. <비둘기 똥구멍을 그리라굽쇼?>, <오밤중 삼거리 작업실>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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