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100년] 포토에세이스트 김유나가 문용기 열사님께
[아시아엔=김유나 포토에세이 작가] 1919년 익산시민들의 고통은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익산에서 주인으로 행세하며 시민들을 고통에 빠뜨리고 있었지요. 농부들에게서 빼앗은 땅 위에 농장을 지은 뒤 농부들의 노동력을 착취했습니다.
익산은 호남평야 한 가운데에 있어 시민들은 농산물이 수탈되는 모습을 보아야만 했지요. 농장 운영자들은 상점 주인들과 민간경찰 격인 자경단을 조직해 총과 칼로 무장하기까지 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수탈도 모자라 무력으로 위협까지 해서 시민들의 분노는 치솟아 있었습니다.
익산은 독립항쟁을 일으키기에 불리한 조건들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본 사람이 천지인 도시여서 일본의 시선은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인구의 약 60%가 일본사람이었고 일본 거류민을 위한 시가지가 조성되어 있었지요. 1919년 3월 초부터 전북에서 만세항쟁이 연이어 일어났습니다. 일본은 만세항쟁을 막고자 경찰과 군대의 수를 늘리고 익산에 병력 1개 중대를 파견했습니다. 일본의 감시와 경계가 강화되었지요.
투쟁 발발이 힘든 곳에서 억눌려 있던 적개심을 저항으로 끌어내신 분이 문용기 열사님이었습니다. 열사님은 교사 시절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며 구국 활동에 몸담기 시작하셨습니다. 1911년 광산회사로 이직한 뒤에는 월급을 모아 중국에 있는 독립지사들에게 헌납하셨지요.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항쟁에 자극받고 익산으로 귀향하셨습니다. 남전교회 장로였던 열사님은 동 교회 목사 및 교인들과 만세항쟁을 준비하셨지요. 시위대가 3개로 나뉘어 서로 다른 장소에서 만세를 부르며 모이기로 계획하셨습니다. 3월에 익산에서 2번의 만세시위가 바로 진압되었기에 보안에도 심혈을 기울이셨던 것이지요. 만세시위 장소는 대교농장 앞에 있는 장터로 정하셨습니다. 익산에는 20여개의 농장이 있었는데 대교농장이 농장 가운데 가장 크고 유명했습니다. 수탈의 상징을 향해 민족정기를 발산하면 일본의 심장을 누를 것이라 판단하셨겠지요.
4월 4일, 열사님은 남전교회에서 사람들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눠주셨습니다. 한복을 입고 온 150여명의 사람들은 옷 속에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숨기고 장터로 향했지요. 장터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시위 참가자는 1천여명이 되었습니다. 참가자들이 집결하자 열사님은 독립선언서를 읽으셨습니다. 낭독이 끝난 뒤 독립을 외치는 함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만세소리는 더 많은 사람을 불러들여서 참가자는 만명으로 늘어났지요. 전국에서 유례없는 대규모 만세시위가 되었습니다.
익산을 진동시키는 소리를 듣고 달려온 일본경찰과 군인들은 총과 칼을 겨누었습니다. 같이 출동한 소방대원과 일본인 농장원들도 곤봉과 손도끼를 휘둘렀지요. 사상자가 속출하고 있을 때 열사님이 오른손에 태극기를 들고 앞으로 가셨습니다. 열사님이 당당하게 걸어가셨을 모습이 떠오릅니다.
열사님은 독립의 필요성과 식민지배로 받는 고통을 연설하셨습니다. 연설이 끝난 뒤 만세를 부르며 함성이 다시 일렁이도록 하셨지요. 열사님의 등장은 사람들에게 다시 힘을 불어넣었습니다. 투혼은 살아 있다는 걸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열사님은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쳐 독립의 열기를 익산 전역으로 확산시키셨습니다.
일본군의 칼은 열사님을 겨냥했습니다. 하얀 한복이 붉게 물들어갈수록 투혼을 불태우셨지요. 오른팔을 잃었어도 만세를 외쳤고 왼팔마저 잃으신 뒤에도 만세소리는 이어졌습니다. 입으로 태극기를 물고 시위하며 어떤 것도 애국심을 꺾을 수 없다는 걸 보여주셨습니다. 일본군은 열사님의 가슴과 배를 난자했고 열사님은 순국하며 충혼을 꽃피우셨습니다. 피로 대한의 신정부를 도와 여러분이 대한의 신국민이 되게 하겠다고 외친 뒤 돌아가셨지요.
여러 군데를 난자당하셨어도 독립만세를 외치셨다는 사실이 아련했습니다. 만세시위현장에서 즉사한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열사님의 순절은 마음을 더욱 울렸습니다. 유해가 장터에서 자택으로 옮겨지는 동안 유해에서 피가 쏟아졌습니다. 길가에 뿌려진 피는 일본이 열사님을 쓰러뜨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는 걸 보여주었습니다.
현장에서 총 6명의 순국자와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4.4만세항쟁은 일본의 잔학성을 드러내는 대표적 의거가 되었지요. 한국독립운동사에는 “4월 4일 익산에서 큰 희생의 만세시위로 발전했다. 이 항쟁은 항쟁을 전개하는 측이나 그를 제지 진압하려는 일군이 모두 극단의 경우에까지 대립투쟁 했으므로 참혹한 양상이 타 지역보다 두드러진 감이 있다”고 쓰여 있습니다.
장터 만세시위에 참여하지 못했던 30명은 따로 모여 만세를 불렀습니다. 곤봉과 칼을 가지고 일본인 상점이나 군인들을 공격하기도 했지요. 산상 횃불만세시위가 다시 전개되었습니다. 4월 5일에는 함열읍에서 익산과 이웃한 충남 논산시 강경읍까지 횃불이 파도를 이루었습니다. 4월 8일 용안면에서도 수차례 일어나 일본을 놀라게 했습니다. 열사님이 흘리신 피가 독립의 길로 만들어져 항일의지를 지폈던 것입니다. 일본은 열사님의 정신까지 쓰러뜨리지 못했습니다.
대한의 신정부도 수립되었습니다. 열사님이 순국하신 그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중국 상하이에 세워졌습니다. 중국 내 독립지사들에게 보내신 돈이 임시정부 수립에 사용되었지요. 일본을 뒤덮었던 열사님의 기개가 임시정부의 뼈대가 되어서 임시정부는 더욱 빛났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조국의 주권이 살아 있다는 걸 보여주며 민족의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만세항쟁은 1919년 5월 말까지 국내외에서 일어나며 독립에 대한 자신감을 심었습니다. 항쟁은 전투, 폭탄투척, 파업, 소작쟁의 등으로 다양해졌습니다. 1926년 6.10 만세시위, 1929년 학생독립항쟁이 일어나 만세 함성이 다시 요동쳤지요. 익산에서도 독립항쟁들이 일어났습니다. 익산지역 학생들은 동맹휴학, 독서회 활동, 차별철폐운동으로 한국인 차별에 저항했습니다. 1927년 신간회 익산지회는 ‘신간회 운동은 독립운동의 수확이다.’라는 격문을 살포했지요. 열사님이 갈고 닦으신 독립의 길 위에 독립항쟁이 가지로 뻗어갔습니다.
1945년 4월 이리농림학교 학생들이 결성한 항일결사회인 화랑회의 전원이 체포되었습니다. 화랑회를 조직한 학생은 고문 받은 뒤에도 일본에 저항하다 7월 17일 옥중에서 순국했지요. 열사님의 용맹이 해방 직전까지 구국전선이 펼쳐지도록 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8월 15일 조국은 해방되었고 3년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대한민국으로 더 성장했습니다.
일본의 감시가 촘촘했던 도시에서 만세항쟁을 이끄셨던 열사님은 식민통치보다 강했습니다. 혈의는 독립기념관에 기증되어 열사님의 조국애를 전하고 있습니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으며 유해는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2010년대 들어 열사님을 기리는 기념물이 늘어났습니다. 2015년, 만세항쟁 현장이었던 장터 자리에 3.1독립운동 4.4만세기념공원이 만들어졌습니다. 공원에는 열사님 동상과 4.4만세항쟁을 형상화한 조형물, 순국열사비가 있습니다. 그해 8월 13일엔 익산중앙체육공원에 항일 독립·민주화운동 추념탑이 건립되었지요.
올해 3월 31일에는 익산시 오산면 일원에 문용기 열사 기념비가 세워졌습니다. 열사님을 아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 같아 기쁩니다. 열사님의 삶은 애국심 위에 나라가 있다는 걸 일깨우며 나라에 헌신하도록 이끌 것입니다.
목숨을 잃으면서도 조국 해방을 외치셨던 열사님은 애국의 본보기입니다. 민족혼을 밝히며 나라를 지키고 계십니다. 4월 4일 4.4만세항쟁 재현행사에 참여할 것입니다. 열사님의 항거정신을 호국의지로 계승하고 있다는 걸 알리며 나라의 기상을 드높이겠습니다.
*필자 김유나
군산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 졸업. 포토에세이 작가. 2016년 한국관광공사 주최 대한민국 여름여행 사진 공모전 1등, 2017년 문화체육관광부 주최 가을여행주간 여행기 공모전 3등, 2018년 문화체육관광부 주최 봄여행주간 한국관광 100선&한국관광의별 소문내기 공모전 5등, 2018년 문화체육관광부 주최 베니키아 봄봄봄 사진전 3등 외 글 및 사진 공모전 64회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