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100년] 신채호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역사 잊은 민족에겐 미래 없어”
[아시아엔=전원배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서강민주동문회장 역임] 단재 신채호 선생님. 인사 여쭙겠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덕분에 선생님께 편지를 올릴 귀한 기회를 얻었습니다. 제 앞에 편지 쓴 분들이 300명 넘더군요. 뭉클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엉뚱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친일파 후손이 독립운동가에게 편지를 썼다면 어땠을까. 진심이 담긴다면, 그 편지도 뭉클하겠지요. 그러나 과문(寡聞)한 탓인지, 그런 편지는 이날 이때껏 본 적이 없습니다.
독립운동이 약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럼 그 독립운동을 약하게 만든 자들이 누굽니까. 우리 혼자 일본과 싸우는 게 아니라 세계대전이었습니다. 삼천만 동포가 한마음이었어도, 연합국이 우리를 무시했겠습니까. 참전국 지위를 누리지 못해 38선이 그어졌고, 분단이 일제 잔재 청산을 가로막았습니다.
독립전쟁을 훼방 놓는 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친일파가 살아남을 유일한 꾀였고, 그 수작에 호의호식한 자식들은 독립운동이 약해서 한 일이 없다고 손가락질하고 있으니, 이런 적반하장이 있겠습니까.
을사(乙巳) 경술(庚戌) 이래 민족이란 단어가 우리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만, 예전부터 익숙했던 개념은 아니었습니다. 한자(漢字) 민(民)의 어원은 전쟁포로로 잡힌 노예입니다. 세월이 흘러 민(民)의 처지가 나아졌어도, ‘아랫것’이라는 낙인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위민(爲民)·여민(與民)에서 민(民)은 어디까지나 객체일 뿐. 반면, 족(族)은 배타적인 권위의 표현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家”는 45,508번이나 나오지만, “家族”은 38번밖에 안 나옵니다. 그나마 ‘마지막 황제’ 순종(純宗) 때 3번을 제외하면, 종친과 사대부에게만 적용되었습니다.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 같은 관계였던 민(民)과 족(族)이 만나 민족(民族)을 이루었습니다. 백성은 어안이 벙벙하고 양반은 낯을 찌푸렸겠으나,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때도 아니고, 신민(臣民) 즉 신하와 백성으로 층층시하 누르고 눌려서 제국주의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민족이란 단어는 동등을 암시했고, 그 개념이 창작이든 모방이든, 이 땅에서 평등의식의 출발이었습니다.
역사의 갈림길에서는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법입니다. 갑오농민전쟁 때 반군(叛軍)과 관군(官軍)으로 갈렸던 농민과 유생들이 손을 잡았습니다. 당연히 갈등과 대립이 생겼지만, 흘린 피는 색깔도 성분도 농도도 똑같았습니다. 함께 어깨 걸고 싸우면서 동족애(同族愛)가 싹튼 겁니다. 우리 역사에서 민족은 이름 없는 의병의 무덤에서 태어났고, 이리하여 고종 44년(光武 11, 1907) 7월 6일자 실록에 “民族”이라는 두 글자가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그래도 민족에 내용을 채우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았습니다. 말이 통하려면 맥락이 맞아야 합니다. 500년 넘게 사대(事大)의 동아줄을 움켜쥐고 백성을 호령하던 나라에서, 어느 날 갑자기 ‘우리는 하나’라고 외친들 쉽사리 먹히겠습니까. 대국을 섬기는 춘추필법(春秋筆法)에 찌든 조선의 유학자들은 을파소를, 을지문덕을, 양만춘을 기억에서 지워버렸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이름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일제가 그 빈틈을 놓칠 리 없습니다. 어용학자들을 동원해 “조선은 옛날부터 중국의 식민지였다”며, 침략이 정당하다는 해괴한 논리를 폈습니다. 저항의 혼을 말살하겠다고 나선 겁니다. 저는 역사 왜곡의 범죄는 일제가 저지른 것이지만, 조선왕조가 길을 열어준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합니다.
조선 태종에 이르러서는 더욱 이들 맹목파의 선봉이 되어 조선 사상의 근원이 되는 서운관(書雲觀)에 보관되어 있던 문서들을 공자의 도에 위배된다고 해서 불태워버렸다. …… 지나간 고대 역사를 개인이 쓰지 못하게 하거나 개인이 보는 것까지 금지한 것은 우리나라에만 있었던 일이다. 그리하여 역사를 읽는 이가 없게 된 것이다. (신채호, 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비봉출판사, p32, p44)
역사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양반의 자손으로 태어나, 문과급제한 조부 밑에서 한학(漢學)을 배우고, 성균관에 입학해 박사가 되신 선생님. 대대로 왕조의 녹을 먹고, 뼛속까지 사대부였을 당신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민족의 개념을 구성하는 일에 뛰어들었습니다.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에 실린 여섯 번째 논문 ‘조선역사상일천년래제일대사건(朝鮮歷史上一千年來第一大事件)’. 곧 ‘민족사학(民族史學)’이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이 나라가 식민지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 변곡점을 “서경전역(西京戰役)-즉 묘청(妙淸)이 김부식(金富軾)에게 패함”에서 찾았습니다. 사대당이 득세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사대는 중국의 압력으로부터 백성을 지키기 위한 안전보장책이었다고 변호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그게 진실이라면, 국방비를 민생에 썼어야지 황구첨정(黃口簽丁) 백골징포(白骨徵布)가 왜 나옵니까. 외침(外侵) 걱정 덜어내어 백성 쥐어짤 궁리만 했고, 가렴주구에 시달린 민초(民草)는 생산 의욕마저 잃었습니다.
사대는 사회로부터 활기를 빼앗아, 시간이 흐를수록 모난 돌이 정 맞는 게 상식이 되고, 각자도생(各自圖生)이 인지상정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선생님이 성균관에 다니며 독립협회에 가담할 무렵, 조선을 방문해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을 쓴 비숍(I. B. Bishop) 여사의 첫인상은 “무기력하고 비참한 나라”였습니다. “허가받은 흡혈귀” 양반과 “최악의 무관심과 타성과 무기력의 늪에 가라앉은” 백성.
이렇게 아름다운 나라가 어찌 이렇게 되었냐며, 그녀는 슬퍼합니다. 하지만 연해주에서 만난 한인들은 비숍 여사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놓습니다. “솔직함”, “독립심”, “민첩함”, “신뢰”···. 같은 옷을 입고 같은 말을 쓰는 같은 민족이라고 믿기 힘들 만큼, 표정부터 달랐습니다. 이들이 봉오동과 청산리전투의 승리를 일궈냈습니다.
혹자는 중세 유럽이나 중국에서는 전쟁과 흑사병으로 사람들이 수없이 죽었다고 강변합니다. <징비록(懲毖錄)>도 안 읽었고, 현종 때 백만이 죽었다는 경신대기근(庚辛大飢饉, 1670·1671)도 모르나 봅니다. 죽고 사는 것보다, 왜 죽었고 어떻게 살았느냐가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농민전쟁-종교전쟁-영토전쟁-혁명전쟁을 치르며, 서양은 민족의 개념을 채웁니다. 그런데 조선은? 국가가 목숨값을 지급할 의무조차 지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니, 죽은 사람만 억울하다는 소리가 나오지요.
선생님이 나당연합군을 비판한 걸 두고, 그땐 민족이란 의식도 없었다는 반박이 있습니다. 그럼 김춘추보다 138년 늦게 출생한 샤를마뉴 때 서양에는 민족 개념이 존재했나요? 게르만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도, 자기 것으로 만들었지 동화되지 않았습니다. 원래 프랑스어입니다만, 영어 “independence”는 “dependence”에 접두어 “in”이 붙어 생긴 단어입니다. 독립은 예속(?屬)을 거부하는 오랜 전통만이 물려줄 수 있는 문화유산입니다.
문명의 법칙은 교차(交叉)였습니다. 그 기나긴 과정에서 삼투압(?透壓)을 견뎌낸 공동체가 민족의 지위를 차지해 사회통합을 이루고, 민족국가를 수립해 근대의 문을 열었습니다. 자립(自立)과 자강(自彊)의 열쇠를 나당연합군에서 구할 수 있겠습니까.
고려는 왕조 개창의 정통성을 고구려에서 가져왔습니다. 민심은 천심이라 했거늘, 통일신라가 한반도에 둥지를 튼 남녀노소의 자랑이었다면, 감히 이럴 수는 없었을 겁니다. 고려는 대륙의 압박에 고개를 숙이지 않았습니다. 막대한 기회비용을 치러야 했겠지요. 김부식의 무리는 그게 욕심났던 겁니다. 무릎만 꿇으면, 그 돈은 내 것이라고 군침을 흘렸겠지요. 자원봉사로 사대할 어리숙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친일파도 마찬가지지요. 영혼을 팔아 가로챈 국부(國富)는 생산에 투자되지 않습니다. 이게 사대의 정치경제학입니다.
김부식 이후 경자유전(耕者有田)의 국법은 깨어지고, 자주(自主)의 국체는 망가졌습니다. 그 악조건에서, 대몽항전을 70년이나 지속한 이 땅의 주인들은 정말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고려보다 더 퇴보한 조선에서 신음하던 백성들도 국난 때마다 떨쳐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같은 하늘 아래, 공통점이라곤 전혀 없는 두 가지 유형의 인간이 있었던 겁니다.
사대는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할 토양을 제공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선생님께서 설파하신 “조선역사상일천년래제일대사건(朝鮮歷史上一千年來第一大事件)”의 진정한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제의 침략에 맞서 합심하려면 민족의식이 요청되었고, 잃어버린 자주의 역사에서 조선인의 뿌리를 캐내야 했습니다. 그것이 선생님께서 외세에 항거한 빛나는 전통을 추적하다가, 상고사(上古史)까지 올라가신 이유입니다.
“과거는 찬란했다” 따위의 자위(自慰)나 최면(催眠)은 선생님이 바라신 바가 아닙니다. 선생님은 “아(我)”가 “역사적인 아(我)”가 되려면, “시간적으로 끊어지지 않는 상속성(相續性)과 공간적으로 영향이 파급되는 보편성(普遍性)을 가져야 한다”고 못 박았습니다. ‘최초’라는 프레임은 선생님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맹자의 역성혁명론(易姓革命論)이 루소의 사회계약론보다 2천년 앞섰다고, 민주주의의 기원이 중국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인문사회과학의 모든 개념은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벼려질 때만 그 참된 의미를 획득합니다. 자유(自由)를 남이 선물할 수 있겠습니까. 주권(主權)을 돈 주고 살 수 있겠습니까. 발명발견도 똑같습니다. 자유는 기술을 낳고, 기술은 더 큰 자유를 낳았습니다. 제국주의의 상징이었던 전함과 기관총은 프랑스대혁명과 영국 산업혁명이 빚어낸 축적의 산물입니다. 우리는 시기를 놓쳤습니다.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매달릴까요? 구걸할까요?
선생님의 답은 “혁명”, 우리 안의 몹쓸 구석을 숙성시켰던 낡은 항아리를 부수고, 용기와 희망을 담을 새 항아리를 구워내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향한 중단없는 항전(抗戰) 속에서, 민족사는 오욕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해방의 깃발을 움켜쥘 것이라 선생님은 믿었습니다. 선생님께서 망명하신 게 1910년. 독립전쟁의 방략을 설계하고 기지 건설을 도모하는 한편, 어마어마한 분량의 역사서와 역사교재, 논설들을 집필했습니다. 1923년 1월,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 의열단의 대일 선전포고문이자 혁명강령. 선생님은 지금 당장 독립전쟁에 나서길 회피하는 자들을 맹렬히 꾸짖었습니다.
내정독립이나 참정권이나 자치를 운동하는 자 누구이냐? 너희들이 ‘동양평화’, ‘한국독립보전’ 등을 담보한 맹약이 먹도 마르지 아니하야 삼천리 강토를 집어먹던 역사를 잊었느냐?
또한, 선생님은 “일본 강도정치하에서 문화운동을 부르는 자 누구이냐?”고 물으면서, 일제의 문화통치에 편승하려는 자들에게 현혹되지 말라고 동포에게 촉구했습니다. 왜놈이 허가한 문화운동은, “그 문화발전이 도리어 조선의 불행”이 될 거라는 경고였습니다. 따지고 보면, 3·1운동이 일어났기에 일제도 문화통치로 선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세운동 때 선동만 하고 정작 자신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자들이 문화로 민족을 구하겠다고 나섰다? 김부식이 원조인, 예의 ‘가로채기’ 수법입니다.
혹자는 조선사를 연구하려면 우선 조선과 만주 등지의 땅속을 발굴하여 허다한 발견이 있어야 하고, 금석학 고전학 지리학 미술학 계보학 등의 학자가 쏟아져 나와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것도 그러하지만 현재로서는 우선 급한 대로 존재하고 있는 사책(史冊)들을 가지고 그 득실을 평가하고 진위를 가려내어 조선사의 앞길을 개척하는 것이 급선무가 아닐까 한다. (신채호, 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비봉출판사, p34)
선생님의 사론(史論)을 한낱 장광설로 치부하는 연구자들이 꽤 많습니다. 명분은 실증주의입니다. 쉽게 말해서, ‘팩트’에 기초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과연 그럴까요? 이 사람들은 선생님께서 쓰신 “(역사는) 저작자의 목적에 따라 그 사실을 좌지우지하거나 덧보태거나 혹은 바꾸고 고치라는 것이 아니다”라는 구절은 쏙 빼놓습니다. 게다가 더 꼴사나운 건, 선생님을 우습게 여기는 이들이 자신의 주장을 입증할 결정적인 ‘팩트’를 여태껏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역사가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전제인 실증(實證)을 무슨 주의로까지 격상시키는 태도에서, 저는 수상한 냄새를 맡습니다. 실증은 많은 시간과 노력을 잡아먹고, 더러는 국가가 나서야 풀리는 일입니다. 실증해놓고 나서 입을 열어라? 이렇게 금을 그어놓으면, 자본과 권력에서 소외된 민중은 ‘가위와 풀의 역사’에 대항할 방법이 없습니다. 분서갱유(焚書坑儒)의 책임은 누구에게 묻겠습니까. 통념과 상식에 의문부호를 달지 말라는 소린데, 이건 과학이 아니지요.
선생님에게 “금석학 고전학 지리학 미술학 계보학 등의 학자가 쏟아져 나와야 한다”고 자못 걱정하는 투로 충고하던 사람들. 아마도 책상 앞에 앉아 기껏해야 문화운동론이나 끄적였을 이 사람들이 해방 후 대한민국 역사학계를 장악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70년이 지난 지금, 금석학 고전학은 대학에서 씨가 말랐습니다. 잘못 꿴 단추는 무섭습니다. 사관(史觀)이 구부러졌는데, 사학(史學)이 곧게 뻗을 수 있겠습니까.
……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하여 곡하려 한다.
너무나도 유명한, 선생님께서 1925년 1월 <동아일보>에 발표한 ‘낭객의 신년만필’이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이 글을 처음 읽고 받은 충격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번역서 몇 권 읽고 우쭐대는 얼치기 지식분자가 바로 저라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습니다. 옆길로 빠지는 듯합니다만, 저는 <동아일보>가 선생님의 글을 실었다는 사실도 놀라웠습니다. 선생님께서 <동아일보>를 얼마나 통박하셨는데…. 이런 게 민족일까요?
해방 후라면 어림도 없었을 겁니다. 요즘에는 아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고요. 세상은 점점 더 강퍅해지고 있습니다. 재벌이 곳간에 쌓아놓은 사내유보금이 몇백조라면서, 배울 만큼 배웠다는 사람들이 이삭 줍느라 아귀다툼입니다. 역사는 비극과 희극으로 반복된다지만, 이 나라에서는 첫 번째는 비극으로 동일하되, 두 번째부터는 부조리극으로 되돌이표를 찍습니다.
단재 선생님. 선생님의 삶은 혹독하리만치 엄격한 수양과 자기 부정 그리고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연속이었습니다. 3·1운동 이후 유산계급의 투항으로 민족 안에 균열이 일어나자, 민족사학을 제창하셨던 선생님은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으로 민족 개념의 확장을 시도합니다. 유생으로부터 아나키즘까지, 당신의 사상 변천 궤적은 제국주의를 뛰어넘으려던 세계 피압박민족의 해방운동사 전개 과정과 놀랍도록 일치합니다. 단재는 한 곳에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단재는 어느 한 주의(主義)나 사조(思潮)의 아이콘으로 쓰이기에는 너무나 크고 깊은 그릇입니다.
선생님께서는 고립된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봐서는 한 나라의 미래를 밝힐 수 없음을 통찰하셨습니다. 조선인의 역사는 조선사가 되어야 하고, 그 바탕 위에서 조선사는 동아시아사, 나아가 세계사와 부분과 전체로 통합돼야 합니다. <용과 용의 대격전>.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각고의 노력을 다하신 이 책(오늘날에도 어린이도서로 분류되어 있습니다)에서, 선생님은 지구적 차원에서 진행되는 제국주의와 피압박민족의 대결을 일목요연하게 그려내셨습니다.
선생님은 철저하게 자기화를 추구하셨습니다. 그 강직함으로 선생님께서는 “민족사학”이라는 위대한 유산을 물려주셨습니다. 그러나 민족의 고갱이는 상실되었고, 민족이란 단어는 민족반역자들을 사해주는 면죄부로 전락해버렸습니다. 국민이라고 다 같은 국민이 아니요, 시민이라고 다 같은 시민이 아닌 시대. 갈래갈래 찢긴 사회. 이렇게 될 줄 아시고, “역사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는 경구(警句)를 남기셨나요? 되새기겠습니다. 영원히 꺼지지 않을 자유로운 정신의 불꽃. 단재(丹齋) 신채호 선생님 영전에 올립니다.
* 신채호(申采浩, 1880~1936)
나이 스물이 되기도 전에 독립협회에 가담해 애국계몽운동에 나섰다.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에서 주필로 활약하며,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저술에 힘썼다. 신민회(新民會) 결성취지문, 의열단의 <조선혁명선언>을 기초했으며, 이광수나 최남선과 달리 끝까지 지조를 지키며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대표적 문사(文士)이자 혁명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창조파’의 이론적 지주 역할을 했다. 박은식과 함께 사대주의를 거부하고 민족사관의 기틀을 세운 사학자로서, <조선사통론>, <조선상고사> 등의 역작을 펴내, 우리 민족의 뿌리를 밝혔다. 1929년 왜경에 체포, 1936년 뤼순감옥 독방에서 순국했다. 호는 단재(丹齋).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전원배
1962년 부여에서 태어나, 다섯 살 때부터 서울에서 자랐다. 대학 재학 중 민주화운동으로 옥살이를 겪고 경남으로 가서, 울산과 창원의 노동자들과 함께 20년 동안 노동운동에 복무했다. 서강민주동우회 회장을 맡아 활동했으며, 역사문제연구소에서 뒤늦은 공부에 땀 흘리고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라는 말은 신채호 선생이 하지 않으셨습니다. 비슷한 말은 하셨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