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하 경장 맘 좋은 게 으뜸일세”···“백범 선생님 평생 새기겠습니다”

파주경찰서 청사 건물에서 출입자들에게 미소를 보내고 계신 백범 김구 선생

[아시아엔=정재하 파주경찰서 수사과 경장, 전 <아시아엔> 인턴기자] 아래 글은 백범 김구 70주기를 맞아 경찰청에서 실시한 백일장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작품입니다. <편집자> 

1

“통일된 한국이 된다면, 신탁통치를 받아도 좋다는 게 1945년 해방 후 신탁통치 정국을 맞이한 좌익의 입장이었어?”
“응 그렇지”
“통일된 한국이 된다면, 신탁통치를 받아도 좋다는 문장을 논리적으로 해석해봐. 이건 전형적인 가정법 If형식의 문장이잖아. ‘통일된 한국이 된다면’ 이라는 부분을 If절로 본다면 이 If절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이고, ‘신탁통치를 받아도 좋다’라는 문장은 우리가 통일된 한국을 맞이할 조건으로 감내해야 할 부분이야. 그렇지?”
“그렇지”
“그렇다면, 이 문장과 논리적으로 반대인 문장이 어떤 것이겠어?”
“주절과 조건절을 바꾸면 되지”
“그래. If조건절이 ‘통일된 한국이 된다면’이고 주절은 ‘신탁통치를 받아도 좋다’라고 한다면 주절의 위치와 If조건절의 위치를 바꾸고, 내용도 정반대로 바꾸면 이 문장과 완전히 논리적으로 반대인 문장이 되겠지”
“그게 1945년 신탁통치 정국 속에서 우익의 입장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였군”
“그래, 한번 만들어볼까?”
“주절이 앞으로 오고 If절이 뒤로 온다면, ‘우리가 신탁통치를 받지 않는다면, 분단된 한국이 되어도 좋다’ 이건가?”
“그래, 반탁이 된다면 분단이 되어도 좋다는 게 우익의 입장이야. 이제 동의할 수 있겠어?”

괴짜로 소문난 한국현대사 동아리 동기와 ‘1945년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에 대한 좌익과 우익의 입장 차이’에 대해 무심코 나눈 대화가 여기까지 진행되었다. 이 괴짜 친구와 나눈 대화는 합의와 의견수렴으로 끝나는 법이 거의 없었고, 스포츠 경기처럼 공격-수비가 오가는 공수 교대형 대화로 전개되곤 했다.

대화라기보다는 토론인데, 이 친구와의 대화는 늘 토론으로 전개되곤 했으므로 대화가 곧 토론이었고, 토론이 곧 대화였다.

괴짜 동기와의 대화는 항상 신선했다. ‘합의와 의견수렴’ 이라는 뻔히 정해진 결론으로 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상대의 의중을 머리 굴려 탐색하고, 서로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 않기 위해 적당히 비위를 맞추다가 형식적으로 마치 합의한 것처럼 결론을 이끌어내는 소위 ‘사회생활형 대화’는 이 괴짜 친구와 할 필요가 없었다. 우리는 마음껏 상대를 향해 잽펀치를 날렸고, 서로를 위해 기꺼이 스파링파트너가 되어주었다.

어쨌건 나는 모스크바3상회의의 신탁통치 결정을 반대한 우익의 애국적 입장을 옹호하는 쪽이었고, 괴짜 친구는 이를 반박하는 좌익의 입장에서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을 능수능란하게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뭔가 이 괴짜 친구의 페이스에 완전히 말린 느낌이 든다. 이 지점에서 녀석의 논변을 막아야 할 타이밍이다. 내가 내민 카드는 ···.

“그렇다면, 1945년 해방정국 후, 모든 우익이 반탁을 주장하면서 분단이 되더라도 좋다고 얘기한 것인가?”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잖아”
“백범 김구 선생이 있지 않나? 백범 선생은 반탁을 주장하면서 통일된 한국을 외치셨는데”
“그래서 백범이 설 자리가 없었던 것이지. 백범은 당대 좌우익 대립 국면 속에서 어느 입장에도 설수 없었던 사람이었던 걸 모르고 하는 소리인가? 그는 막연한 이상주의자일 뿐이었어. 논리에 기초하지 않았던 이상주의자, 낭만주의자일 뿐이었지. 현실은 냉정했어. 백범을 과대평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가 외친 반탁-통일한국은 현실을 도외시한 주장이었고, 논리적으로도 모순된 점이 우리의 대화 속에서 밝혀지지 않았나?”

뭔가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다. 어정쩡하게 반격을 시도하다가 제대로 되치기를 당했다고나 할까? 이 괴짜친구와의 대화를 끝으로, 나는 고시공부를 한다며 신림동으로 들어갔고, 괴짜친구는 대학원을 준비한다면서 자연스럽게 헤어지게 되었으므로, 격동의 역사에 대한 열정 넘치던 청춘의 토론은 막을 내렸다.

괴짜친구와 수없이 많은 대화를 나눴건만, 유독 “백범은 논리와 현실에 기초하지 않은 이상주의자였다”는 괴짜친구의 논변만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 대화 후 나는 해방 후, 좌우익 대립 국면 속에서 어느 입장에도 설 수 없었던 백범을 마음속에서 서서히 지우고 있었다.

2

“하루는 어른들에게 이러한 말씀을 들었다. 몇 해 전 일이다. 문중에 새로 혼인한 집이 있었는데, 어느 할아버지가 서울 갔던 길에 사다가 두었던 관을 밤에 내어 쓰고 새 사돈을 대하였던 것이 양반들에게 발각이 되어서 그 관은 열파裂破를 당하고 그로부터 다시는 우리 김씨는 관을 못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몹시 울었다.

어찌하여 그 사람들은 양반이 되고, 어찌하여 우리는 상민이 되었는가 물으니, 어른들이 대답하기를 “방아메 강씨도 그 조상은 우리 조상만 못하였지마는 일문에 진사가 셋이나 살아 있고, 자라소 이씨도 그러하다고, 나는 어떻게 하면 진사가 되느냐고 물었다. 진사나 대과나 다 글을 잘 공부하여 큰 선비가 되어서 과거에 급제 하면 된다는 대답이었다. 이 말을 들은 뒤로 나는 부쩍 공부할 마음이 생겨서 아버지께 글방에 보내 달라고 졸랐다.”

위 <백범일지>에 기재된 백범의 어린 시절처럼, 나도 인생역전을 하고 싶었다. 머리가 어느 정도 클 무렵, 공부를 잘하면 출세를 할 수 있고, 출세를 하게 되면 보다 많은 권력을 갖게 되며,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아 여러 사람들이 다 내 곁으로 몰려온다고 생각했다.

백범의 어린 시절 조선 후기처럼 ‘신분제도’가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더라도, 분명 세상물정을 아는 중고등학생이라면 ‘비공식적 신분’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일단 신분상승의 첫걸음으로 세칭 ‘명문대학교’에 진학해야 했다. 그러나 나는 명문대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신분상승의 첫 걸음이 실패로 끝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 없었다. 이제 스무살이고, 역전홈런 한방이면 나도 신분상승을 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고시합격’ 이었다.

시간은 기약없이 흘러만 가고, 타오르는 태양 같이 뜨겁기만 했던 붉은 젊음은 지평선 너머로 뉘엿뉘엿 넘어가려는 참이었다. 알 수 없는 운명 앞에서, 측량하기 어려운 불안감 앞에 새하얀 밤을 지새운 날이 늘어만 갔다. 내 불안한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 알고 싶어 인터넷 상으로 한두번 사주를 본 것이 발단이 되어, 나는 더 이상 고시공부가 아니라 사주 명리학 공부를 하고 있었다.

3

“아무리 내 얼굴을 관찰해 보아도 귀격이나 富格과 같은 좋은 상은 없고, 천격, 빈격, 흉격뿐이었다. 전자에 과장에서 실망하였던 것을 상서에서나 회복하려 하였더니, 제 상을 보니 그 보다도 더욱 낙심이 되었다. 짐승 모양으로 그저 살기 위해서 살다가 죽을까. 세상에 살아 있을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이렇게 절망에 빠진 나에게 오직 한가지 희망을 주는 것은 <마의상서> 중에 있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었다. ‘얼굴 좋은 것이 몸 좋음만 못하고, 몸 좋음이 마음 좋음만 못하다’

과거공부와 관상공부를 통해 내가 누군지, 나의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지엄한 신분제도 하에서 자신의 실존적 문제를 처절히 깨달은 백범, 그리고 그에 대한 해답으로 ‘마음 좋은 사람이 되자’고 결심한 백범.

신림동 6평짜리 어두운 방 안에서 은폐와 단절로 점철된 시간 속에서, 불현듯 중학생 때 읽었던 <백범일지>의 위 구절이 생각나, 피폐해진 마음을 위로라도 하고 싶어 <백범일지>를 10년만에 다시 펴고 읽어내려가던 도중, 백범 선생이 ‘그간 고생했다, 이제 마음 좋은 사람으로 살아라’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아, 내 두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논리와 비판정신 가득했던 대학생 시절, 아스라한 추억으로 잠시 잊고 있었던 백범을, 치기 어린 청춘이 지나가는 시점에서, 나는 다시 만났다. 나는 백범에게 물었다. ‘마음 좋은 사람의 삶이란 대체 어떤 삶입니까’

4

현재 나는 마음 좋은 사람의 삶을 살고 있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 어렵고 억울함에 처한 사람들의 눈물어린 고소장을 받고, 법을 위반하고 선량한 시민에게 재산상 피해를 준 피의자를 기소 의견으로 송치하기도 하고, 체포영장을 받아 체포하기도 하며, 구속까지 시키기도 한다.

세상은 내가 중고등학생 시절이었던 20여년 전과 한 치도 변하지 않았다. 세상은 아직도 남을 밟고 일어서라, 공부를 열심히 하는 이유는 출세하기 위함이며, 명문대를 나와서 고시를 합격하고 대기업에 들어가면 높은 연봉과 출세하는 것이 성공하는 삶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나 또한 그런 세상에 따라, 젊은 시절을 오직 ‘출세’ 한 글자만 앞세워 달렸다.

그러나 이제 나는 알고 있다. 장구한 역사의 길에서, 세속적 성공의 삶은 잠시이지만, 마음 좋은 삶은 영원하리라는 것을 말이다. 이것은 백범의 삶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백범은 과거공부를 접은 이후, 평생 세속적 성공의 삶을 추구한 일이 없었다.

그러나 백범이 과거에 응시하던 1890년대 당시 과거에 급제한 인물들의 면면을 돌아보라. 그들 중 애국지사 한 명 없었고, 후일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지 않은 사람이 드물었다. 이 사실을 보더라도 세속적 성공과 마음 좋은 삶의 차이가 무엇인지 잘 알 수 있다.

내가 출근하는 경찰관서 건물엔 백범의 얼굴이 새겨진 큰 현수막이 게시되어 있다. 백범의 환한 얼굴이 나를 반겨준다. 백범의 얼굴을 매일 만날 때마다 ‘마음 좋은 삶’을 살고 있는지 되새긴다.

마음 좋은 삶이란 잠깐의 세속적 출세가 아닌 영원한 역사가 주관하는 삶이고, 좌우 어느 곳에도 속할 수 없기 때문에 올바른 이상을 지향하는 삶이며, 공명정대하고 떳떳한 대의명분의 삶이며, 애국, 애민, 애족의 삶이다. 이것은 백범이 직접 후세에 보여준 삶이었다.

백범은 자신의 삶으로 ‘마음 좋은 사람의 삶이란 대체 어떤 삶입니까’라는 내 질문에 답을 해 주었다.

이제 답을 알았으니, 실천궁행의 과제만이 남은 것이다. 한동안 멀리 헤어져 있었던 백범과 내가, 소실점이 한 곳에서 만나듯, 그렇게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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