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 7인의 여성의원···김마리아·양한나·최혜순·방순희·김효숙·지경희·신정완
[아시아엔=황인자 한국외대 초빙교수, 19대 국회의원]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권 분립의 기초를 세웠다. 입법부인 임시의정원에는 총 7인의 여성의원들이 활약했다. 항일투쟁에 실질적으로 공헌한 독립운동가이자 여성운동가다.
국회의 전신인 임시의정원 최초 여성의원은 ‘김마리아’다. 그는 항일독립여성운동계의 대모로서 1922년 백범 김구와 함께 황해도 대의원으로 당선됐다. 당시 <독립신문>은 이 일을 ‘선거계의 신기원’이라는 제목 아래 “여자로서 의원에 당선된 것은 우리 선거계에는 물론 이번이 처음일 뿐더러 세계열국을 통하여서도 이것이 아직 몇 째 안 가는 희귀한 일”이라고 기사화했다.
김마리아는 이듬해 임시정부의 내부 갈등을 수습하기 위해 결성된 국민대표회의 개막식에서 여성으로 유일하게 도산 안창호와 함께 개막연설을 한다. 항일독립운동의 역사적 정통성은 상해임시정부에 있음을 주장하여 임시정부의 법통성을 지키고자 한 것이다.
김마리아에 이어 1923년 부산 출신의 ‘양한나’는 경상도 대의원으로, 그 뒤를 이어 1931년 간호사 출신 ‘최혜순’이 임정 국무위원인 남편 김철과 함께 전라도 의원으로 임시의정원에 진출한다. 이어서 1938년 ‘방순희’가 함경도 대의원으로, 1941년 광복군 출신 ‘김효숙’이 강원도 대의원으로, 1942년 ‘지경희’가 황해도 대의원으로, 마지막으로 1943년엔 광복군 출신 ‘신정완’이 경기도 대의원으로 임시의정원에 합류했다.
2대 양한나는 부산지역에서 독립운동과 사회사업을 폈고 광복 후에는 초대 수도여자경찰서장에 취임하여 공창폐지운동을 주도했다. 3대 최혜순은 상해지역에서 조산병원을 경영하면서 독립자금 마련에 힘썼다.
4대 방순희는 임시의정원에서 가장 오랜 기간(1939~1945) 의정활동을 한 여성의원으로 기록되고 있다. 러시아어에 능통했던 그는 임시정부의 대러시아 외교관으로도 활약했다. 기록에 의하면 “사십여명의 의원 중 여자의원은 오직 방순희 여성 일인 뿐이니 만록총중에 일점홍이다. 부녀가 아직도 억울한 경경에 있는 조선사회이므로 방 여사의 책임은 더욱 크다. 고군분투의 고독감도 있을 것이나 일천만 여성의 후영이 있는 것을 생각할 때 용기도 날 것”이라고 했다.
김효숙은 한글교사로 임정요인과 동포자녀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김자동 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도 김효숙에게서 한글을 배웠다고 한다. 6대 지경희에 관해서는 안타깝게도 행적이 거의 알려진 바가 없어 독립운동가임에도 아직 정부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
마지막 7대 신정완은 초대 국회의장을 역임한 해공 신익희의 딸로 오빠 신하균과 함께 광복군으로 맹활약했다.
내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기념사업이 본격적으로 궤도에 올랐다.. 임시정부, 그 중에서도 임시의정원에서 활동한 여성의원 7인을 기리는 것은 우리들의 중요한 몫이다.
이들이야말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통해 여성의 사회참여를 몸소 실천한 위대한 선구자이자 임시정부의 영웅들로 대한민국 건국의 초석을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