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 우리가 몰랐던 백범 김구, 27일 김형오 전 국회의장이 들려준다
[아시아엔=편집국] 우리는 백범 김구 선생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우리가 몰랐던 백범 김구 그 두 번째 이야기’가 27일 오전 8시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사업회(백범사업회) 대회의실에서 열린다. 강사는 김형오 백범김구기념사업회 회장(전 국회의장,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 저자)이며 선착순 250명, 무료. 신청은 기념관 홈페이지 또는 (02)799-3433.
다음은 김형오 회장이 쓴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에서 발췌한 것이다.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죽인다’는 협박에 ‘죽겠다’고 저항했다.”
“천만다행히도 사형 집행을 사흘 앞두고 서울과 인천 사이에 장거리 전화가 개설되는 바람에 임금의 지시가 감리사 이재정에게 극적으로 하달될 수 있었다.”
“휘호로 즐겨 쓴 ‘답설야중거’는 서산대사의 선시인 줄 알았으나, 조선 후기 문인 이양연의 한시였다.”
“공식 개명은 ‘창암’ ‘창수’ ‘구龜’ ‘구九’”
“나는 1876년 7월11일(양력 8월29일) 자정 무렵, 텃골 웅덩이 큰집에 아버지 김순영과 어머니 곽낙원의 외아들로 태어났다.…산통이 시작된 지 일주일이 지나도록 아기가 나오지 않아 산모의 생명이 위험했다.”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
“할아버지는 아버지의 설명은 채 듣지도 않고 오히려 꾸중하시면서 빼앗은 회초리로 한참 동안 아버지를 때리셨다. 나는 그런 할아버지가 고마웠고, 매 맞는 아버지 모습을 보니 퍽 시원하고 고소했다.”
“아버지의 어릴 적 별명은 ‘효자’였다. 할머니가 운명하실 때 왼손 약지를 잘라 할머니 입에 피를 흘려 넣어드려 사흘이나 더 사시게 했다고 한다. 그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내가 태어났다.”
“생신날이 되자 어머니는 그 돈에 당신 돈까지 보태 권총을 사 왜놈들을 처단하라며 청년단에 하사하셨다.”
“어렵사리 국경을 넘어온 당신을 헤어진 지 9년만에 절강성 가흥에서 상봉했을 때 하신 첫 말씀을 잊을 수가 없다. “지금부터 ‘너’라는 말을 고쳐 ‘자네’라 하고, 잘못을 저질러도 말로 꾸짖을 뿐 회초리를 들지 않겠네.”
“‘최준례 묻엄, 남편 김구 세움’ 혁명가의 가족에게 고난과 시련은 숙명이었다.”
“폐병을 앓던 남편 인을 위해 며느리가 마지막 실낱같은 기대로 폐니실린을 구해달라 했을 때 ‘그 병을 앓다가 죽은 동지들이 많은데, 어떻게 내 아들만…’하며 거절했다”
“일을 할 때는 판단-실행-계속의 3단계로 성취해야 한다.”
“그래, 벼랑에 매달려 나뭇가지를 잡은 손마저 놓는 자라야 장부라지 않았더냐.”
“김구의 탈옥 과정을 살펴보면 대담하고 치밀하다. 또 그가 얼마나 의리를 중시하는가를 알 수 있다.”
“도망자가 되어 유랑할 때도 내겐 알게 모르게 영웅심과 공명심이 남아 있었다. 중이 되고 보니 그런 허영과 야욕이야말로 부처 문중에선 털끝만큼도 용납이 안 될 사악한 생각일 따름이었다.”
“백범처럼 맑고 넓고 열린 가슴에는 낡은 봉건적 사고와 편협한 볼셰비즘이 수용될 수 없었다. 그가 자유민주주의 사상을 좀 더 일찍 접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스물일곱 살(1902년) 정월, 먼 친척 할머니에게 세배를 갔다가 혼사 걱정을 하시는 할머니께 결혼 조건을 말씀드렸다. 첫째, 재산을 따지지 말 것. 둘째, 학식을 갖출 것. 셋째, 직접 만나 서로 마음이 맞는지 알아볼 것. 이 셋을 만족시킬 여자라면 아내로 맞으렵니다.”
“태산처럼 커 보이던 일제가 겨자씨만큼 작아 보였다.”
“훗날 우리나라가 독립한다면 인품과 자질을 갖춘 이를 간수로 채용해 죄인도 국민의 한 구성원으로 보아 선한 마음으로 지도하고, 사회에서도 전과자라 멸시하지 말고 학생처럼 대우할 때 비로소 감옥을 설치한 의미와 가치가 있으리라.”
“이봉창은 나보다 스무 살 넘게 아래지만 ‘선생’이라는 존칭이 절로 나왔다.”
“비행기는 김포공항에 착륙했다. 나는 허리를 숙여 흙을 한 줌 움켜쥐고 고국의 냄새를 맡았다. 떠난 지 26년7개월여 만의 귀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