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100년] “이완용에도 3·1운동 참여 권유 손병희 선생님 유연함 닮고 싶습니다”

의암 손병희 선생과 그의 재판기록

[아시아엔=황인성 창원 중앙고교 2년 재학] 손병희 선생님, 저는 사단법인 의암손병희선선생기념사업회 장학생 고교 2학년 황인성입니다.

올해는 선생님께서 준비하고, 주도하신 3·1독립만세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또한, 그토록 염원하시던 광복이 된 지도 어느덧 74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오늘이 있기에 너무나 기쁘고 고맙습니다. 하지만 후손들은 선생님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한편으로는 너무나 안타깝고 죄송합니다.

요즈음 시중에는 <극한직업>이라는 영화가 흥행하고 있습니다. 주연배우들은 잘 알고 있어도 감독은 잘 모르듯이, 3·1독립만세운동으로 헌신하신 순국선열들은 잘 알고 있어도 총감독하신 선생님을 모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니 용서해주십시오. 한평생 자신보다는 대의를 우선하시던 선생님은 분명히 용서해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다가는 선생님을 영영 잊는 것이 아닐지 걱정이 앞섭니다.

솔직히 저도 선생님을 잘 몰랐습니다. 지금도 손병희 선생님을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하시는 기념사업회 손윤 이사장님이 해마다 개최하는 손병희글짓기대회에 참여하면서 <긴급명령, 국부 손병희를 살려내라>, <천도교에서 민족지도자의 길을 간 손병희> 등의 전기를 읽고서야 비로소 선생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작성했던 글짓기 원고로 편지를 대신해 올리며, 조금이나마 은혜에 보답하고자 합니다.

손병희 선생님을 알면 알수록 지도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진정한 지도자가 무엇인지 일깨워주신 손병희 선생님 삶을 본받고 싶고 널리 알리고 싶어, 선생님의 일생에 관한 글을 읽고 지도자에 대해 글을 지어 봅니다.

지도자의 처음과 끝은 오직 남을 위하는 마음을 가진 자만이 가능합니다. 선생님은 어린 시절부터 그랬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항상 약자를 위하고 늘 그들과 함께했습니다. 그 마음은 한평생 변하지 않고 오히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커져만 갔습니다.

신분사회에서 고통 받던 백성들을 위해 사람이 하늘이라는 평등사상의 동학 지도자가 되셨고, 주권을 빼앗기고 핍박받던 나라를 위해 3·1운동을 이끈 민족의 지도자가 되셨습니다. 오직 내가 아닌 남을 위하는 마음은 지도자의 전부입니다.

두 번째 지도자의 조건은 멀리 보는 눈입니다. 그 당시를 색깔로 표현하자면 온통 검은색일 것입니다. 한 치 앞도 안 보였습니다. 차라리 임진왜란 때처럼 바람 앞의 촛불이었으면 오히려 낫겠습니다. 서서히 끓는 물 속의 개구리처럼 꺼져만 가는 나라의 운명도 모른 채 자기만, 자기 가문만 잘되겠다는 부패한 권력층이 백성들을 더욱 힘들게 하고 나라 밖의 강대국들은 이게 웬 떡이냐 하며 우리 땅에 와서 호시탐탐 노리는 암흑의 시대에 선생님은 ‘나라를 보호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겠다’라는 동학혁명의 북접통령으로 분연히 일어나 맞서 싸웠습니다.

하지만 무력적인 힘의 열세에 좌절되고 일제에 쫓기는 몸이 되셨지만, 낙심하지 않고 이상헌 이라는 가명으로 원수 같던 일본에 가서 근대화된 모습을 보고 더 큰 계획을 세우는 멀리 보는 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역사적인 3·1운동을 기획하게 되었고 오늘날 우리의 정신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지도자의 세 번째 조건은 유연한 생각입니다. 선생님의 영정을 보고 동상을 보고 있노라면 엄하시고 완고하실 것 같은 선입감이 들지만, 선생님에 관한 글을 읽다 보면 유교적 시대에 걸맞지 않게 유연하셨습니다. 선생님은 동학의 무력투쟁의 한계를 인정하셨습니다. 오히려 한계의 원인을 찾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셨습니다. 단발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더 나아가 전 동학교도들에게 단발을 권장하셨습니다. 그만큼 앞선 제도나 문물은 받아들이는 유연한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 원수 같던 일본이지만 농촌이 잘사는 모습을 보고 갑진개혁 운동도 전개하였습니다. 교단의 친일파를 몰아내고 민족종교로 정비하고 천도교로 개명도 하셨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큰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습니다. 그 당시 신자가 300만명으로 교세가 가장 크고 재정이 튼튼한 천도교이었지만, 민족적인 운동인 삼일운동을 앞두고 불교와 기독교를 설득하여 같이 하셨습니다. 유학자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완용한테까지도 같이할 기회를 주려고 하신 분입니다. 고비마다 유연한 생각으로 앞장 섰지만 나라를 위하는 담대한 마음만 있을 뿐 자신은 부각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단독대표가 아닌 33인 민족 공동대표가 되셨습니다.

네 번째는 준비하는 마음입니다. 선생님은 희망을 가지고 늘 차근차근 준비하였습니다. 신자가 가장 많았던 천도교의 성미를 헛되이 쓰지 않고 민족의 앞날을 위해 인재양성의 중요성을 깨닫고 경영에 어려움에 처한 보성전문학교를 살리고, 동덕의숙을 도와주셨고 많은 학교들을 후원하셨습니다. 그때의 인재들이 전국에 퍼져 삼일운동을 주도하였고 독립운동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또한 봉황각을 건립하여 ‘10년 안에 나라를 되찾겠다’고 하시며 인재를 양성하였습니다.

그렇게 삼일운동은 차근차근 준비되었습니다. 보성사라는 출판사까지도 철저하게 준비하여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온 나라에 알리게 하였습니다. 삼일운동 후까지도 미리 대비하셨습니다. 원래는 민족대표가 49인이었지만 계속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33인만이 서명하셨습니다. 로마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이 있듯이, 삼일운동도 1919년 3월 1일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손병희 선생님이 10년 이상의 냉철한 전략과 준비 끝에 이루어진 결과입니다.

마지막으로 씨앗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자기는 결실을 못 보더라도 후손을 위해 씨앗을 준비하고 심는 마음입니다. 상해 임시정부 김구 선생님이 해방 후 우리나라로 돌아와서 제일 먼저 손병희 선생님 산소를 참배하셨다 합니다. 무엇을 의미할까요. 삼일운동이 있었는지 한 달 후에 만들어진 상해임시정부도 아무 준비 없이 생겼을까요?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자금이 필요합니다. 조직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 당시 삼일운동 자금을 기독교까지도 지원할 정도로 자금력이 가장 막강했던 천도교와 손병희 선생님의 결정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겠지요.

손병희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삼일운동 전에 이미 독립의 씨앗을 준비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삼일운동 거사 전 천도교 지도자들에게,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하겠소”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이미 선생님은 앞날에 수난이 닥칠 것을 알고 계셨지만 삼일운동을 통해 겨레의 가슴에 독립의 씨앗을 뿌리고자 했습니다.

삼일운동 전과 후의 우리 민족은 확연히 달라졌습니다. 꺼졌던 민족의 정신이 되살아났고 그런 불굴의 정신으로 끊임없는 독립운동을 하여 광복을 맞게 되고, 광복 후 힘든 시기에도 그 불굴의 정신으로 좌절하지 않고 극복하여 우리나라가 잘살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이 뿌린 그 씨앗의 결실을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맛보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일생에 대한 책을 읽고 자료를 조사할수록 선생님께 빠져듭니다. 선생님은 진정한 우리나라의 지도자이며 국부이십니다. 호시탐탐 주변 국가들은 우리가 약해질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역사를 모르면 암흑의 역사는 반복됩니다. 우리나라 헌법 전문에도 있는 삼일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준비하고 만드신 진정한 지도자를 모른다면 역사를 아직 모르는 것입니다.

올해도 3·1절을 앞두고 순국열사의 기사로 장식된 신문을 보았습니다. 이젠 삼일절 기사만 보면 눈이 동그래집니다. 참으로 고마운 기사이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아쉬움은 남습니다. 이젠 3·1운동을 오랫동안 치밀하게 준비하고 실행으로 옮기신, 그래서 오늘날 우리나라의 정신을 만드신 손병희 선생님의 기사가 실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을 본받는 진정한 지도자가 많아서 정신이 살아있는 부강한 나라가 되어, 다시는 아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소원하며, 열거하기도 힘든 선생님의 업적으로 진정한 지도자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황인성 학생

*황인성
2002년 경남 창원에서 태어났다. 2013년 사단법인 의암손병희선생기념사업회 초대 장학생으로 뽑혔고(창원 용남초 5학년), 손병희글짓기대회 대상을 2014년과 2015년 연달아 수상했다. 현재 창원 중앙고 2학년 재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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