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나그네 43년 안병준②] 서울신문 젊은기자들 이진희 사장 퇴진운동 ‘주도’
[아시아엔=안병준 한국기자협회 전 회장, <서울신문> 정치부장, <내일신문> 편집국장 등 역임] 서울신문사의 최초의 언론자유 선언 이후에도 이진희 사장과 정부는 즉각 대응하지 않았다.
편집국의 분위기는 침묵의 바다 같았다.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안무혁 부장은 이같은 상황을 전두환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이진희 사장과 강경파들은 참여 기자들을 전원 해고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 사장은 정치적 상황이 좋지 않음을 감지했고, 그 자신 정권으로부터 신뢰를 잃을까 걱정해 마음을 바꿔야 했다.
사장을 나름대로 평가하는 이한수 편집국장 등 간부들과 선언 참여 기자들은 선언 직후 3일에 걸친 공개토론회를 열었다. 편집국장의 발언은 이 사장에 대한 충성의 깊이를 보여주었다. 이한수 국장은 “이 사장은 언론계에서 보기 드문 천재다. 누구도 이 사장의 능력을 능가할 수 없다. 일반 독자들은 서울신문만 읽으면 모든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서울신문이 많이 발전했다는 뜻이다. 이 사장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왜곡된 기사를 일일이 열거하며 반박했고, 현재와 같은 서울신문에 몸을 담고 있는 것이 부끄럽다고 호소했다. ‘서울신문의 미래를 위해’라는 공개토론회는 성과 없이 무산됐다.
그러함에도 소문은 국내외로 퍼져나갔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과 일본 주요 언론도 서울신문 기자들의 선언을 비중 있게 다뤘다. 당시 야당인 신민당의 김영삼 총재는 “잘했다! 서울신문 젊은 기자들이 큰일을 해냈다”고 말했다.
‘타임’지 “정부 소유 서울신문 기자들의 반란” 보도
<타임>의 1987년 6월1일자 기사 요지는 이러했다.
“…정부가 실제 소유하고 있는 서울신문에서 반란(rebellion)이 일어났다. 서울신문 기자들은 전직 문공부 장관 출신인 사장의 해임을 요구했다. 전직 장관인 그는 ‘전두환 대통령의 4·13 호헌조치를 미국 정부가 지지했다’는 허위사실 을 포함해 여러 왜곡된 보도를 서울신문에 싣게 했다….”
언론사 최초의 이 ‘반란’은 국내 모든 언론사가 ‘언론자유와 민주화 선언’을 봇물 터지듯 터뜨려 혁명적인 사건으로 기록됐다. 이 사장은 결국 물러났다. 그러나 이광표 사장 등 새로 들어선 경영진은 97명의 참여 기자들(수습 21~27기를 비롯한 총 88명과 편집부 등 내근 기자 9명)을 징계했다.
1987년 7월4일 내려진 징계 사유는 ‘하극상 관련’이라고 서울신문사 인사부에 기록돼 있다. 이광표 사장 역시 이진희 전임사장과 마찬가지 코스를 거친 인물로 ‘낙하산 인사’의 한계를 못 벗어났다. 징계가 ‘경고’로 경미했던 이유는 회사측도 나름대로 시국의 중대성을 의식했던 것으로 풀이됐다. 또 P편집부국장 등 극소수 편집 간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선배기자가 젊은 기자들의 주장에 묵시적으로 동조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징계 규모는 한국언론사에서 큰 규모 중 하나였다. 나는 아직도 서울신문의 첫 선언을 혁명이나 반란으로 섣불리 규정하지 않는다. 권력이나 재벌 등 ‘보이지 않는 손’은 여전히 한국언론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진희 사장은 1986년 2월 4일 선임됐다. 새 사장이 취임한 뒤 편집국장은 아침 7시에 출근했다(보통 출근 시간은 9시 30분이었다). 정치·경제·사회부 등 주요부서 책임자들도 매일 아침 7시에 소집됐다. 그들은 사장으로부터 하달된 전두환 대통령의 성격과 제5공화국에서의 지위, 서울신문의 새로운 목표 등에 대한 ‘세뇌교육’을 받았다.
편집국장은 자신의 의견을 곁들여 이렇게 전했다. “이진희 사장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그는 전두환 장군의 집권을 알고 있었다. 이 사장은 문공부 장관 시절 언론정책을 주도했다. 서울신문이 큰 변화를 일으킬 것이 확실하다. 우리 모두 전보다 더 열심히 해야 한다.”
젊은 기자들과 간부들의 큰 시각차
결국 이 사장을 잘 따르라는 요구였다. 젊은 기자들과 간부들의 큰 시각차가 어쨌든 이 사장의 등장 이후 서울신문은 많이 달라졌다. 그 변화에 대해, 젊은 기자들은 ‘정치권력의 공보 신문’이라고 불렀지만, 편집국의 극소수 간부들은 ‘위대한 뉴스페이퍼’라고 불렀다.
대조적이었다. 어느 날, 이한수 편집국장은 기자들을 위해 특별회의(반주를 곁들인 저녁 식사)를 주재했다. 황병선 정치부 차장은 편집국 간부에 속한다고 할 수 있었지만 이렇게 이진희 사장에 대해 불평했다. “우리 서울신문은 칭기즈칸이 칼을 들고 진주하고 있는 모습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이 사장이 매일 데드라인이 가까워져 나타날 때마다, 편집국 분위기는 물을 끼얹듯 조용해졌다. 이 사장은 편집국장의 안락의자에 앉아 기사를 비판했다(원래 편집국장 자리는 해군함정과 같이 대통령이 와도 못 앉는 자리라는 오랜 전통이 있다).
기자들은 그가 동아일보와 서울신문, 경향신문 등에 다년간 재직했어도 편집국장만은 역임하지 못한 콤플렉스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고 비아냥거렸다. 그는 기사 하나하나를 간섭하고 때로는 기자들에게 소리쳤다 “이 바보 같은 놈. 네 머리를 부숴버릴 거야. 넌 돼지에 지나지 않아.” “널 해고할 거야.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죽여버릴 거야.”
당시 국회 출입 막내 기자이던 나는 집권 민정당을 맡고 있었다. 전두환의 일방적인 4·13 호헌선언 이후 민정당의 기류는 서서히 변하고 있었다. 반(反) 4·13 여론을 탄 모반의 기류(?), 그런 것들의 징후가 여기저기서 감지됐다. 당시 민정당 총재는 노태우였다. 호헌조치 이후 청와대에서 열린 저녁 당정 협의에서 숨죽이고 있던 ‘2인자(노태우)가 대통령에게 언성을 높였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확인은 되지 않았다.
그 무렵 노태우 총재의 몇 안 되는 최측근 중 한 명은 나와 가까운 사이였다. 그는 나를 따로 불러 4·13 호헌조치를 미국대사관 인사가 ‘긍정적으로 평가했다’는 서울신문 기사에 대해 ‘당이 확인하고, 우려를 표명하는 분위기’라고 귀띔해줬다. 오보를 넘어 왜곡된 기사임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당직자와 국회 요직 등 나의 몇몇 취재원들에게 1주일 정도 확인 과정을 거쳤다. 팩트임을 확인했다. 서울신문에 활자화되긴 어렵겠지만 나는 ‘1면 톱 감이다’라고 생각했다.
“서울신문에 대한 집권당 분위기도 적대적”
회사로 돌아왔더니 편집국장석에 이진희 사장이 앉아 있고, 주변에 이한수 편집국장과 이동화(李東和) 정치부장이 서 있었다. 부장이 나를 불렀다. “요즘 민정당 분위기 어때?” 편집국 간부들과는 달리 10년차 기자인 나는 사장 앞에서 거리낄 일이 없었다. ‘미국의 4·13 호헌 찬성’이 분명한 왜곡보도라는 지적 등 집권당의 탁한 분위기를 그대로 설명했다. “서울신문에 대한 집권당의 분위기는 적대적”이라고까지 말했다. 표정이 하얘진 이진희 사장은 ‘졸병 기자’를 쳐다보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편집국에서 나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이 사장에 대한 퇴진 운동 움직임이 시작됐다.
1986년 12월이었다. 당시 나는 후배 기자 4명과 함께 부산으로 출장을 갔다. 기사 송고를 끝낸 후, 자갈치의 한식당에서 나는 그 주제를 얘기했다. “우리 서울신문은 이 사장의 전횡 아래 많은 문제가 있다. 우리의 사시 (社是)는 나라의 이익을 앞세우고 있지만, 이제는 권력의 이익만을 존중하고 있다. 내년 2월 이 사장은 취임 1주년을 맞이한다. 1년 이상 일하게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반란은 그날 밤부터 시작됐다. 그러나 이 사장 휘하의 서울신문은 계속 폭발점을 향해 나아갔다. 당시 박종철 열사 추모식은 전국 각지에서 열리고 있었다. 야당은 정권의 퇴진과 민주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울신문은 그런 상황에 대한 해설기사를 이렇게 냈다.
“…한국 정치 상황은 안정적이다. 국력은 급속도로 신장하고 있으며 국민은 21세기를 향해 매우 열심히 일하고 있다….”(1987년 2월 8일자)
5월이 왔고 ‘힘없는 사람’으로 석 달을 보낸 젊은 기자들도 다시 만나기 시작했다. 6명의 핵심이 만나 선언문 초안을 작성했다. 다음 날, 나는 다른 기자들의 동의를 얻고 서명까지 받았다. 그리고 5월 18일 새벽, 선언문을 건물 내 게시판 여기저기에 붙였다. 참여한 기자들은 다른 회사 기자들에게도 사본을 나눠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