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나그네 43년 안병준①] 서울신문의 ‘반란’···1987년 민주화 첫 시국선언
‘언론 나그네 43년’, 서울신문 수습기자로 시작해 내일신문 편집국장, 한국기자협회 회장, 언론중재위원, 한국신문윤리위원 등을 역임한 안병준 기자를 요약하는 말이다. “언론인 여정에 여한이 없다”는 안병준 기자는 중견언론인들 모임인 관훈클럽에서 내는 <관훈저널> 2022년 여름호를 통해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털어놨다. 물론 감추고 싶은 오점을 드러내는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아시아엔>은 그의 회고적 성격의 글을 나눠 싣는다. <편집자>
[아시아엔=안병준 한국기자협회 전 회장, <서울신문> 정치부장, <내일신문> 편집국장 등 역임] 1987년 5월 18일 새벽. 서울신문 편집국에는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이한수(李罕洙) 편집국장을 비롯한 간부들이 출근하기 30분전쯤인 오전 6시 30분이었다. 수습 21기(1977년 입사)를 비롯한 27기(1986년 입사)까지의 기자들이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4층 편집국 회의실이 가득 찼다. 모두 전일 미리 배포한 종이 한 장씩을 꺼내 들었 다.
‘서울신문 미래를 위한 우리의 주장’이라는 선언문이었다. 나의 선창으로 선언문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모두 함께 외쳤다.
서울신문은 지금 벼랑 끝에 서 있다. 기자들은 불신과 반목, 양심의 가 책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독자들은 서울신문을 불신한다. 주한 외국 대사들은 왜곡된 기사들과 조작된 보도에 불평하고 있다. 기자 중 일부는 스스로, 또는 압박 때문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사업도 확장했으나 횡령이라는 모함을 받아 퇴사를 강요당했다. 우리는 이것이 모두 이진희 사장의 잘 못이라고 확신한다. 이 사장의 독재와 폭정은 여러 문제를 야기했다. 특히 이진희 사장의 편 집권에 대한 간섭은 언론의 효율성과 조화를 파괴했다.
또 이 사장 취임 이후 서울신문 기자들은 생각이 없는 식물인간이 되었다. 서울신문은 한 개인의 명예욕으로 파괴되었다. 우리 모두 이진희 사장의 조기 퇴진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 사장은 즉시 사퇴해야 한다. 우리의 요구는 우리의 개인적인 감정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와 서울신문의 미 래를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한다. 아울러 우리는 사장에게 맹종한 몇몇 선배 기자들의 각성도 부탁한다. 그들은 이러한 상황을 무시하고 이 사장에게 복종만 하는데 급급했다. 이진희 사장은 즉각 퇴진해야 한다. 1987년 5월 18일 서울신문 편집국 기자들
이날 거사(?)에 참여한 서울신문 기자들은 모두 97명이다. 그중 참여 기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21기) 이관해, 김행자, 김만오, 최홍운, 이헌숙, 장경자, 안병준
(22기) 채수인, 김영만, 신연숙, 라윤도, 이창순, 정인학
(23기) 정종석, 이건영, 정세용, 김명서, 유세진, 김용원, 윤청석
(24기) 최태환, 염주영, 이용원, 박재범, 안종주, 박상문, 김광현, 강석진
(25기) 곽병찬, 김재영, 이재준, 황진선, 김지석, 권혁찬, 오병남, 임승수, 김주혁, 이용식
(26기) 이목희, 유상덕, 김인철, 이홍동, 우득정, 김교준, 성한용, 임태순, 김병헌, 양승현, 이길우, 정영무, 권재룡, 박희석, 김성호, 박해옥, 박성례, 최병렬, 김연수, 권오창, 송기석, 우정식
(27기) 한종태, 구본영, 육철수, 박선화, 오풍연, 황성기, 김성호, 유민, 오정식, 최병묵
선언 참가 기자들은 서울신문의 왜곡된 기사의 직접적인 예를 아래와 같이 열거했다.
1. 전두환 대통령의 4·13 호헌선언을 ‘우리나라를 구하기 위한 용기 있는 결단’으로 보도했다. 특히 주한 미국대사관 ‘한 외교관’이 4·13 선언을 양해하고 지지한다고 왜곡 보도했다.
2. 1987년 2월 7일, 박종철 서울대 학생 고문치사 사건을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에 대해 “시위 참가자는 거의 없다…”라고 보도했다(박종철 학생은 경찰의 비밀장소인 남영동 분실에서 욕조 물고문으로 사망했다). “…폭동 이후 모든 도로는 폐허물을 뒤집어썼다”는 보도도 왜곡한 기사였다.
3. 나아가 명동성당 앞의 시위대가 내건 현수막의 ‘전두환 독재 타도!’라는 글씨를 지운 사진을 1면 톱기사로 냈다.
그들은 다른 신문사들이 나름대로 발전하고 있을 때 서울신문은 뒷걸음질치고 있다고 반복해 말했다. 경영진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무사안일을 넘어 사실 조작까지 한다고 지적했다.
1980년대는 신군부 집권 이후 언론통폐합 등 언론에 대한 탄압과 통제가 극에 달했다. 대부분 언론사는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군부정권에 협력하면서 ‘정권의 나팔수’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 6월 항쟁의 불씨가 됐던 박종철군 고문치사(1987. 1. 14) 사건은 연초에 터졌다. 전두환 정권의 4·13 호헌조치 이후 정국이 점차 가열될 무렵 서울신문 기자들의 이진희 사장 퇴진운동이 불거졌다. 언론계는 일반인들의 민주화와 자정운동 등은 잘 보도한다. 그러나 자신들의 움직임을 내세우지 않는 관행이 있다. 자신들의 행동을, 자신들의 매체에 보도하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다. 겸손도 아니고, 자기비하도 아니다. 오히려 제3의 매체들이 그 사실을 알린다.
당시 <한국기자협회보>(1987. 6)는 이렇게 보도했다.
“서울신문 편집국 기자 70여명은 5월 18일 이진희 사장이 편집과정에 독단적인 간섭과 전횡을 저지르고 있다며 퇴진을 요구했다. 이진희 사장은 신군부 집권 이후 MBC 사장, 문화공보부 장관을 거친 5공화국 언론계의 실세 중 실세였다. 이 사장은 6월 11일 결국 자리에서 물러났다….
뒤이어 다른 언론사 기자들의 시국선언도 잇따랐다. 5월 25일 동아일보 기자 132명은 편집국에서 ‘민주화를 위한 우리의 주장’을 발표했다. 동아일보 기자들은 ‘개헌논의의 조속한 재개와 진정한 민주화 조치가 이뤄져야 한다’며 △4·13 호헌 철회 △자유언론 회복 △<말>지 관련자의 즉각 석방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5월 29일 한국일보 기자 150명은 편집국에서 ‘현 언론상황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발표하고 오늘의 언론 현실은 정치권력에 의해서뿐 아니라 패배주의적 사고, 갈등과 무력증 등 언론인 스스로 자세에도 책임이 있음을 자성한다고 밝혔다.
부산일보 기 자들은 6월 5일, 코리아타임스 기자들은 8일, 대구 매일신문 기자들은 12일, 경향신문 기자들은 18일, 부산MBC 기자들은 22일 잇따라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이들은 계속해서 헌법 개정과 보도지침 철회, 기관원들의 언론사 출입 금지 등을 주장했다. 서울신문 기자들의 선언 이후 26개 언론사가 줄을 이어 동참했다.
이후 각 언론사 기자협회 분회 및 기자 모임들이 재조직됐다. 기자협회의 강령도 원상 회복됐다. 1981년 전두환 정권이 강제로 바꾼 기협 강령 두번째 조항인 ‘우리는 언론창달과 윤리 제고에 앞장선다’를 ‘우리는 언론자유를 침해하는 여하한 압제에도 뭉쳐 싸운다’로 회복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