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나그네 43년 안병준⑥] ‘보사부 촌지사건’과 언론계에 불어닥친 자정운동

                                   1991년 10월 11일자 한겨레신문의 보사부 촌지사건 보도 

[아시아엔=안병준 한국기자협회 전 회장, <서울신문> 정치부장, <내일신문> 편집국장 등 역임]  선거 연설에서 약속한 ‘임기 1년 단임’은 금방 지나갔다. 마침 ‘보건사회부 출입기자 촌지 사건’이 터져 기자사회의 자정 운동을 전개하고, 회원수를 500명 정도 늘리는 데 그쳤다. 곪을 게 곪아 터진 촌지 사건은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됐다.

<월간조선> 1991년 5월호 표지. 이 매체 유용원 기자는 안병준 기자협회장를 인터뷰, 보도했다.

<월간조선> 1991년 5월호 유용원 기자(현재 조선일보 군사전문기자)가 인터뷰어인 새 기협 회장(필자) 인터뷰 기사 리드 부분은 다음과 같다.

“‘현대그룹 정주영(鄭周永) 회장으로부터 기증받은 기협의 쏘나타 승용차는 되돌려 주겠습니다’ 3월 29일 21년 만의 경선을 거쳐 제31대 한국기자협회 회장으로 선출된 안 병준 서울신문 사회부 차장(44)이 내걸었던 공약 중의 하나다. 그는 기자들의 친목단체인 이 모임의 회장으로 취임하자마자 이 공약을 실천했다.”

기사에는 나의 사적인 부분도 덧붙였다.
“안 회장은 의사인 부친의 권유로 의대 입시만 4수를 했고 경희대 치대 1기생으로 입학했다. 그러나 만 3년 입시로 억눌렸던 그는 학보사 산악반 유네스코학생회 등 서클 활동으로 본과 진급에 낙제했다. 군의관 자격이 박탈돼 사병 으로 입대, 공수부대에서 36개월을 복무하고 진로를 언론 쪽으로 바꾸었다.”

그해 11월 21일자 <시사저널> 박중환(朴重換) 기획특집부장의 기사는 이러했다.
“…최근 중앙 일간지가 앞다투듯 해명성 사과 기사를 싣고 있는 이른바 보건사회부 출입기자들의 ‘거액 촌지’ 사건과 관련해 진상을 확인하랴, 대책을 궁리 하랴, 때로는 ‘고문’에 가까운 인터뷰에 응하랴 눈코 뜰 새 없다. 한국기자협회장실에서 만난 그는 ‘한때 저도 촌지에 오염됐던 죄인입니다. 지금은 기자를 대표하는 기자협회장으로 괴수가 된 셈이고요’라며 ‘고해’부터 한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그동안 방송광고공사로부터 지원받아 써온 공익자금을 거부했고, 현대그룹으로부터 기증받아 회장용으로 써오던 쏘나타 승용차를 반납하는 등 언론의 독립과 자정 노력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안 회장은 ‘권력 지향 사주(社主)의 언론노조 탄압으로 자정운동이 약화됐다. 유명무실한 윤리강령보다는 촌지를 묵인한 편집 간부와 필요경비를 아낀 경영진, 기자 개개인의 의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대안을 제시했다.”

이근성 회장과 나의 ‘아름다운 경선’ 이후 한국기자협회장 선거는 2022년 현재까지 경선으로 이어져 30년 넘게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기자협회장을 마치고 1992년 봄 현업으로 복귀한 나는 편집국의 이상한 기류를 감지했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전과 같지 않았다. “안병준은 신문기자보다는 언론활동에 더 관심이 많은 것 같아.”

선후배들의 그런 시선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다. 초기 10년은 기자직에 올인했다. 그리고 나름대로 인정은 받았을 것이다. 대부분 언론사 수습기자가 그러하듯, 나도 별도의 교육 없이 일선 경찰서에 투입됐다. 어깨너머로 보고, 듣고, 확인하고 6하원칙에 따라 기사를 부르는 것이었다. 경쟁사와 분초를 다투는 (소위 속보성) 것이기 때문에 ‘기사를 써서’ 제출하는 것은 처음부터 없었다. 선배들의 교육방침은 한결같다.

“신문이 교과서다.”

활자화돼 나온 신문의 기사들은 시경캡과 소위 데스크인 차장·부장 등 숱한 게이트 키핑 과정을 거쳐 나온 정제된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사회부 ‘사건기자’ 5년은 치열했으나 평범하게 흘러갔다. 동대문·청량리·태릉경찰서 담당 때 마감시간 전에 모교에 들러 대학주보 주간교수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물 먹은 ‘태릉 살인사건’으로 변우형(邊雨亨) 캡에게 크게 혼 난 기억이 있다.

영등포·노량진경찰서 출입 때인 어느 가을 주말, 역시 마감 전이었으나 평소 친한 유우근(劉又根) MBC 기자와 함께 행주산성에 올라 막걸리를 마시고 귀사했다가 김종일(金鍾一) 캡에게 ‘박살나게 깨진’ 적이 있다. 큰 사건은 없었으나 당시 주요 출입처인 서울대에서 갑자기 입시 관련 브리핑이 있었던 것이다. ‘서울대 입시 관련 기사’는 모든 언론의 주요 이슈였다. 당시에는 휴대전화는 물론 무선호출기(삐삐)조차 없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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