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나그네 43년 안병준⑧] “기자는 특종을 먹고 자란다”

필자가 1981년 2월 19일자에서 특종을 한 기사들. 

물 먹고 깨지기만 하던 나도 특종을

서울신문은 1981년 초 석간에서 조간으로 발행 형식을 변경했다. 이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당시 신문들은 대개 석간이었고, 조간은 한국일보와 조선일보뿐이었다. 조간 시장은 이들 양대 신문이 독보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조간 막내’로서의 야근은 석간 야근에 비할 바 없이 고됐다. 새벽 3시 무렵이 마감시간으로 서울 시내 배달판을 제작해야 했기 때문이다. 배달판 사회면은 전날 저녁에 발행된 소위 ‘가판’(街販)과는 완전히 다르게 환골탈태해야만 조간신문으로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위 기사(사진)에서 보듯, 조간 전환 후 ‘한 건(특종)’한 일식집 청송의 살인 방화 사건은 서울신문의 완벽한 특종으로 인정받았다. 야근에 잡은 행운이었다. 사건기사에 있어 ‘완벽한 특종’이란 발생부터 검거에 이르기까지 연속 특종을 한 것을 말한다. 두번째는 서울과 지방의 신문방송 등 모든 매체가 서울신문의 특종기사를 받아서 보도할 수밖에 없는 기사를 의미한다.

1981년 2월 18일 저녁, 당직 기자였던 나는 중부경찰서 형사과 당직 데스크에 있던 ‘일식집 청송(靑松)’ 화재의 시신 3구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에서 수상한 점을 발견하고 인근 백병원에 있던 유족을 만나 주인과 주방장과의 불화 등을 취재했다. 다른 신문은 ‘단순 화재’로 취급했던 일식집 화재가 살인·방화였음을 밝혀낸 기사였다. 전화 송고 때 함정훈(咸定勳) 야간국장은 흥분한 목소리로 “어이 안병준, 사망자들 시체 훼손 여부를 보충 취재해 보래이!”라며 오래된 경륜을 보여주었다. 그 결과 ‘칼자국’도 있음을 취재 해 화끈한 제목으로 보도됐다.

첫 보도 이후 김종일 시경캡과 중부서 출입 이재일(李在一) 선배 등을 주축으로 한 특별취재팀이 구성돼 3일 후인 21일자에는 도주 주방장이 검거되는 기사까지 연속 특종으로 터뜨려 ‘조간 막내 서울신문’의 성가를 드높였다. 당시 경찰팀은 이른바 ‘하리꼬미’(연속 철야근무)를 하며 서울과 경기도 남양주를 훑고 다녔다. 카리스마 있는 데스크인 최신호(崔信鎬) 차장과 시경캡인 김종일 선배, 바이스캡 이재일 선배 등의 탁월한 지도력 덕분에 사회부에서 물만 먹던 나도 잠시나마 어깨에 힘을 줄 수 있었다.

그해 연말, 당시 이우세 편집국장이 나를 불렀다.
“그동안 수고했네. 인력 부족이라 그러니 편집부에서 1년만 근무하시게나.”
갑작스러운 내근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1982년 1년 동안 나는 편집부 막내 역할인 지방판을 묵묵히 제작했다. 내근은 무료하고, 심심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짧은 1년 동안 편집·교열·외신 등 내근기자들 그리고 지방주재 기자들과의 대화와 교류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리고 그들이 바라보는 외근기자의 바람직한 자세가 무엇인가를 알게 된 것도 커다란 수확이었다.

정치부로 옮긴 뒤 특종 욕심에 큰 오보

1983년 초, 서울신문은 새 사옥 건설을 위해 태평로를 떠났다. 4·19혁명 때 시위 학생들에 의해 불탔던 태평로 사옥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임시사옥으로 현재 국립의료원 옆 농협 건물을 사용한 것이다. 나는 편집부에 1년 갔다가 다시 사회부로 복귀했다.

경찰팀에서 나는 ‘바이스 캡’이라 불리는 중부경찰서 라인에 배치받았다. 타사 동료들은 내게 “안형, 드디어 ‘그 좋다’는 중부경찰서 나가게 됐네”라고 놀려댔다. ‘그 좋다’ 는 의미는 서울시내 경찰라인중에서 책임도 크지만, 대우가 더 좋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

두달쯤 됐을 때인 3월 어느날, 이한수 편집국장이“신문 나오고 나면 뒷골목에서 소주 한잔 하지”라고 말했다. 캡이나 사회부장 합석도 아닌 단독회동이었다.
“정치부로 보내려 하는데 유(You) 생각은 어때?”

편집국장이 고작 휘하 기자 1명을 인사이동하는 데 동의를 구하는 듯한 제스처는 파격 또는 예우처럼 보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서울대 법대, MBC 기자를 거쳐 서울신문에 스카우트돼온 이 국장의 스타일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미 시경캡이나 사회부장, 정치부장에게 통보해 양해를 이미 받아둔 것이다.

3월 중순부터 나는 정장차림으로 국무총리실 3진 출입기자가 됐다. 총리실(당시 김상협 총리)과 문화공보부(당시 이진희 장관), 법제처 등이 출입처였다. 정장 차림이 참으로 불편하게 느껴졌다. 입사 6년차일 때였다.

총리실 출입 때는 경륜 있는 1~2진 선배들과는 달리 막내인 3진 기자로서 더더욱 부지런하지 않으면 안 됐다. 매주 목요일 국무회의에 앞서 이틀 전 열리는 차관회의 자료를 미리 챙기기 시작했다. 그 습관은 일상화됐다. 그러던 중 눈에 번쩍 띄는 자료를 발견해 기사를 만들어 송고했다. 1면 중간 톱으로 크게 보도됐다. ‘정부 쌀값 100% 인상할 방침’이라는 내용이었다.

가판이 발행되고 난 저녁 무렵, 총리실과 농림수산부 관리들이 서울신문 편집국으로 와 “그 기사는 완전 오보”라고 전제한 뒤 정치부장·경제부장·편집국장 앞에서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회사 뒤에서 저녁을 먹고 있던 나는 편집국으로 호출됐다.

“이 기사는 양특적자(糧特赤字, 양곡관리기금의 결손액) 해소 방안의 하나로 검토된 하나의 안(案)일 뿐”이라는 정부 측 설명에 나는 할 말을 잊었다. 세 분 간부와 정부측 인사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완전한 나의 실수였다. 언론계 속담처럼 ‘과욕이 부른 참사’였다. 서울신문은 정정보도를 냈다. 다음 날 총리실 출입 타사 선배들은 내게 “차관회의는 취재하지 않는 게 오랜 관행”이라고 점잖게 타일렀다.

회사는 나에 대한 징계 회의를 소집했다. 나는 아무 처벌도 받지 않았다. 나중에 감사실 직원에게 들은 말은 이러했다. “안형은 참 복도 많아. 이한수 국장께서 ‘안병준이가 특종 욕심에 열심히 하려다 그리된 것이니 용서해줍시다’라고 말해 그냥 넘어갔다.”

1984년 5월에는 이동화 정치부장이 팀장으로 정치·경제·사회·외신· 조사부 기자 7명으로 특별취재팀이 구성됐다. 나도 거기에 선발됐다. 서울신문이 자랑하는 <한국외교비록>이라는 400쪽짜리 책자가 발간됐다.

동아일보 정치부장, 서울신문 주필, MBC 및 경향신문 사장을 역임한 이진희씨가 문화공보부 장관에 취임했다. 일찌감치 대통령이 되기 전, 전두환씨를 ‘떠오르는 태양’으로 표현, 측근으로 알려졌던 그였기에 언론은 물론 국민의 관심이 매우 컸다.

그러던 차에 기자협회로부터 원고 청탁이 왔다. 이진희 장관 취임과 그에 따른 문공 정책이 주제였다. 협회보 제목은 ‘83 문공정책의 향방’으로 나갔다. 전술한 바대로 그가 전국 신문방송 편집국장들 앞에서 행한 연설(1982. 11. 29)인 “…역사의 위대한 전환점에서 여러분은 ‘조직으로서의 국민의 회복과 각성’에 앞장서줄 것…”을 인용하고 문공부의 대폭적 직제 개편, 전체 예산 430억원 중 홍보예산에 41%를 할당한 점을 지적했다. 특히 이를 위해 차관과 기획조정실장에 그의 측근을 기용한 점을 들어 ‘좌청용 우백호’를 포진시켰다고 비판했다.

비록 일간지에 실린 기사는 아니었지만, 언론계와 문공부 등 관가 주변에는 파장이 컸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느 날 같은 총리실 출입이었던 동아일보의 H선배가 내게 커피 한잔하자고 했다. 그는 “동아일보로 올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것이 그 선배 개인의 생각인지, 동아일보의 공식 제안인지는 당시로선 잘 몰랐고, 물어보지도 않았다.

나는 제안을 정중하게 사양했다. 역사적으로 동아일보는 반독재 반정부의 선봉지였다. 소위 ‘백지광고’ 사태 때 고교 서클인 ‘백록회’ 회원들의 푼돈을 모아 동아일보를 방문했을 때도 그러했듯, 내가 동경했고 가고 싶었던 곳이었다. 거절 이유는 수습기자로 선발해준 서울신문에 대한 ‘의리’ 때문이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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