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나그네 43년 안병준⑩] 정든 ‘서울신문’ 떠나 ‘내일신문’ 편집국장으로
1999년 봄 서울신문에서 구조조정의 칼날이 내게도 다가왔다. 그때 마침 경희대 조정원(趙正源) 총장께서 “대외협력처장 자리가 비어 있으니 오지 않겠느냐?”고 연락을 주셨다. 나는 모교로 돌아가 교직원이 됐다. 대학에서의 생활은 무료하기 그지없었다. 하루하루 마감시간에 쫓기며 팔딱팔딱 뛰던 신문사 생활과는 딴판이었다. 상아탑은 역시 느긋함으로 충만했다. 동생뻘 되는 경희대 출입기자들과 함께 밥 먹고 술 마시는 것이 주요 업무였다.
2000년 6월 13일 수원캠퍼스에서 학·처장 회의가 열리는 날이었다. 이날 상오 10시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해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나는 역사적 순간이 지상파 중계방송에 예고돼 있었다. 나는 여러 학·처장에게 “10시 회의를 30분만 연기하면 안 되겠느냐?”고 통사정하듯 말했다. 그들은 무슨 소리냐며 오히려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총장실로 달려가 조 총장에게도 같은 부탁을 했다. 총장은 내게 “나중에 재방송 보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하며 “회의에 들어갑시다”라고 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는 아직 신문기자 티를 못 벗고 있었다. 학·처장회의는 특별한 안건 없이 밋밋하게 끝났다.
때마침 그다음 주 어느 날 내일신문 장명국 사장이 만나자는 연락을 주었다. 우리는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뒤 ‘한라의 집’에서 만났다. 장 사장은 노동운동과 출판업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주간 내일신문을 곧 일간지로 만들 작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내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듯, “학교생활 재미 없죠? 서울신문에서는 편집국장은 못 해봤죠?”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일간지 전환을 위해 주섭일(朱燮日, 중앙일보 파리 특파원)씨를 주필로, 이두석(李斗石, 중앙일보 사회부장, 세계·문화일보 편집국장)씨를 편집위원장으로, 필자를 편집국장으로 영입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즉각 응낙했다. ‘일간지 경험자’ 3명은 모두 계약에 따라 4년간 노하우를 전달했다.
재임 중 매일 열리는 장 사장 주재 새벽 회의에서 나는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우리의 인력으로 보아 가끔 연합뉴스를 인용할 수밖에 없다. 기존 언론사들은 간혹 연합뉴스를 인용하며 크레딧과 바이라인을 모두 쓰지 않는 결례를 저지른다. 내일신문은 솔직하게 연합 기자들의 바이라인까지 쓰는 게 좋겠다.”
이 제안은 장 사장을 비롯한 모든 참석자가 찬성해 받아들여졌다. 일간지로 전환한 지 22년이나 됐는데도 내일신문만은 연합뉴스를 지금도 그렇게 ‘예우’해주고 있다.
내일신문이 기존 신문과 겨루며 지금도 꿋꿋이 발전하고 있는 데는 나름의 독특한 특장이 있기 때문이다. 크게 보아 그 첫째는 장명국 사장의 탁월한 리더십과 근면성이다. 김대중 정부 시절 그는 제안받은 국회의원직을 고사했다. “여의도만 가면 멀쩡하던 사람도 이상하게 변질된다”는 게 그의 신념이다.
하지만 그는 적자로 허덕이던 YTN 사장직은 수락했다. YTN을 흑자로 전환한 뒤 연임 권유를 마다하고 깨끗이 물러났다. 둘째는 구성원 대부분이 맹렬하게 노동운동을 한 속칭 ‘빵잡이’(구속 수감됐던 경력 소유)들이다. 그들은 강인해 강도 높은 노동도 거뜬히 버텨낸다. 그들에게 “매일 노동시간이 초과되니 노조를 구성하시라”고 농담으로 권유하니 모두 웃었던 기억이 난다.
셋째는 정약용의 사상을 신봉하는 장명국 사장의 사농공상(士農工商)이 아닌 상농공사(商農工士) 철학이 모든 구성원에게 배어 있다는 점이다. 내일신문의 창간정신은 ‘밥·일·꿈’ 모토 아래 ‘보수와 진보를 넘어 내 일을 하며 내일을 지향한다’이다.
넷째는 모든 사원이 편집·교열·사진·영업 등을 겸비하는 1인5역 정신과 우리사주제로 철통같이 뭉쳐 있다는 점이다. 모든 일간지가 적자로 고생하지만 조선일보와 함께 흑자를 내며, 연말이면 성과급 배당을 하고 있다.
2001년 9월 11일이 됐다. 마침 그날 저녁 나는 서울신문 후배들의 초청을 받아 인사동에서 ‘술이 떡이 되도록’ 마셨다. 그것은 나에 대한 ‘환송’의 의미도 있었다. 뉴욕·워싱턴 등에 대한 어마어마한 알카에다의 공격 뉴스가 스팟뉴스로 터졌다.
본능적으로 편집국으로 돌아왔으나, 나는 편집국장 역할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의자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나는 파면감이었다. 역할은 이두석 편집위원장이 도맡아 했다. 세계일보와 문화일보 편집국장 경륜으로 차질 없이 일사불란하게 제작을 지휘했다.
2021년 11월 7일 돌아가셨을 때 문상 가서 다시 한번 사죄와 감사 인사를 했다. 내일신문 이외 같은 신문사에서 근무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이두석 선배는 단지 내가 부산중학교 후배라는 점만으로 감싸주셨던 것으로 짐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