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칼럼] 오늘 19대 국회의원 임기를 마치는 전순옥 의원께
[아시아엔=이상기 기자] 존경하는 전순옥 의원님!
오늘이 19대 국회의원으로서 맞는 마지막 날이군요.
감회가 누구보다 많으실 거라 생각됩니다. 수고도 참 많이 하셨구요. 의원님과는 19대 국회가 개원하고 2달 남짓 지난 2012년 8월11일 저녁 송파 청미래식당에서 만났지요. 이튿날 인제에서 열릴 예정이던 만해평화상을 수상하기 위해 방한한 아키라씨와의 저녁식사 자리에서였습니다. 캄보디아 출신의 아키 라씨는 소년병 시절 자신이 묻은 지뢰를 포함해 당시까지 2만개 이상의 지뢰를 제거해 그해 만해평화상을 받았지요. 고인이 되신 이소선 어머님의 2009년 8월12일 만해상 수상식장에서 수인사를 나눈 후 3년 만이었습니다.
이후 꽤나 여러 차례 의원님과 만나 제법 자주 식사도 나누고, 작년 말에는 수유리 댁에도 동행하여 오빠(전태일)의 오래 전 사진들도 볼 수 있었지요.
지난 4.13 총선에서 비례대표를 다시 받길 바랐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던 듯합니다. 작년 우리가 잠시 얘기 나눴던 대로 고향인 대구에서 출마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이따금 해봅니다.
존경하는 전순옥 의원님!
19대 국회에서 이루신 일들, 아쉬운 일들, 만났던 분들, 떠나보낸 사람들 모두 의원님께 좋은 인연이 되어 또다시 ‘그 어딘가의 구비에서’ 만나도 더욱 좋은 인연이 돼 있으리라 믿습니다.
오늘 19대 국회를 마무리하면서 의원님께 특별히 감사드릴 일이 몇가지 떠오릅니다. 함께 더듬어 보려합니다.
우선, 제 의견을 경청하고 또 실천해 주신 것 고맙습니다. 국회의원 배지를 다신 지 얼마 안 지나 여의도 선착장에서 열린 ‘세계여성어린이날’ 제정을 위한 고교생들 행사에서 뵈었을 때 제가 이런 말씀을 드렸지요.
“의원님 이러저러한 행사장에서 사진 찍으실 때 가능하면 가운데는 양보하시고, 양쪽 옆자리에 계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가운데는 학교 선생님이나 최고 연장자께 양보하시고요.”
게다가 한수 더 떠 “남의 행사장에서 도중에 자리 뜨지 말고 주최측에 양해 구해 늦게 도착한다 미리 얘기한 후 끝까지 자리 지켜주십시오”하고 덧붙였지요.
의원님께선 그러겠다고 약속했고 나중 들으니 대부분 말씀대로 지키셨더군요.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시안 방문에 야당의원으로 동행하실 때도 제가 당부드린 것을 수용하여 주셨지요.
존경하는 전순옥 의원님!
지난 4년 많은 일을 하셨더군요. 그만큼 어려움은 또 얼마나 컸을까 짐작이 갑니다. 경찰조사에서, 손바닥 뒤집듯 약속 어기는 게 다반사인 여의도 풍토에서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 중에 소공인과 관련한 의원님의 활동은 ‘국회의원 역사’에 오래 기억될 겁니다.
의원님이 3월 어느 날 제게 보내신 메일을 다시 찾아 읽었습니다. 조금 길지만 인용하며 제 글을 마치려 합니다.
국회의원직 내려놓고 하시는 일들이 평소 꿈꾸고 이루려던 세상에 훨씬 더 가까워지길 기도합니다.
2016년 5월29일 이상기 드림
몇 주 전 순옥 언니가 만나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소공인을 알릴 수 있는 영상을 만들고 싶은데 조언 좀 해달라는 거였다. 소공인이라니… 내 머리 속에 없는 단어여서 뭔가 싶었다. 10년 전 수다공방 패션쇼 영상 제작을 계기로 맺은 인연이지만 언니가 국회의원이 되고 나서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사실 속으로는 국회에 왜 들어갔나 싶기도 했고.
그런데 막상 오랜만에 언니를 만나니 어찌나 반가운지?정신없이 서로 살아온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자연스럽게 언니의 4년간의 의정활동 이야기로 넘어갔고 소공인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헉… 웬일이니? 모든 게 놀라웠다. 소공인은 10인 이하의 소규모제조업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한마디로 창신동의 봉제 공장부터 문래동의 철공소 그리고 가방, 신발 등 손기술로 수제 작업을 하는 사람들. 한때는 수출역군으로 한국을 이끌었지만 이제는 3D업종으로 몰려 아무도 가려하지 않는 곳. 여전히 제조업의 80%를 차지함에도 단군 이래 그들을 위한 법이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던 곳.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그곳을 위해 순옥 언니는 공돌이 공순이가 아닌 소공인이라는 이름을 그들에게 선사했고 소공인을 위한 법까지 만들어냈다.
그뿐이 아니었다. 전국 688개의 소공인 집적지를 분류하고 집적지에 소공인특화센터를 만들기 시작했으며 소공인의 전문화된 손기술을 장인정신으로 이어지게 하는 일들을 국회의원이 된 첫 해부터 계속 이어가고 있었다.
세상에… 왜 이걸 여태 몰랐던 거지. 그리고 이런 이야기들이 왜 알려지지 않았던 거지.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칠 즈음 언니가 그랬다.
“4년 동안 숨 가쁘게 달려오며 법은 만들었지만 정작 할일은 이제부터야. 사람들이 소공인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고 인식도 여전히 부족한 거 같아. 나는 제조업이 살아야 노동자도 살고 일자리도 해결된다고 생각하거든. 그래서 소공인을 좀 알렸으면 하는데 영상이 필요하지 않을까 해서 말이지.”
나는 간만에 지루하지 않은 이야기를 들었고 심지어 국회가 입법기관이었지 하는 새삼스런 생각도 했다. 그저 정치판이 짜증나고 국회 기사를 대충 패스했던 이유도 그들에게서 정책다운 정책을 본적이 없어서였던 거 같았다.
그런데 소공인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나 신선했고 심지어 그녀의 국회 생활에 관심이 없었던 그간의 나를 돌아보며 미안함과 함께 큰 감동을 받았다. 조언을 넘어 내가 직접 영상을 만들어줘야겠단 생각이 들어 언니에게 거꾸로 제안을 했다. “내가 보기에 언니가 어떤 일을 했는지를 알리는 게 더 필요한 거 같아.”
그리고 나는 2주 만에 뚝딱 8분짜리 작은 영상을 하나 만들어주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소공인을 만났고?말로만 듣던 소공인의 현실도 보다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 58년간 양복재단사로 살아온 한 장인이 그랬다.
자기는 처음에 전순옥을 믿지 않았다고. 전태일의 동생이라고 해서 영국에서 노동학 박사를 받았다고 해서 소공인을 위한 입바른 소리를 한다고 해서 믿음이 가는 건 아니라고. 그런데 전순옥을 만나면 만날수록 사람이 장난이 아닌 거야. 이 바닥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보다 더 문제들을 잘 알고 심지어 새누리당을 지지할 만큼 보수적인 사람들도 움직이게 만드는데 어떻게 전순옥을 안 믿을 수가 있나. 전태일은 모든 노동자들의 정신이고 이소선은 모든 노동자들의 어머니로 불리잖아. 그래서 내가 전순옥 의원한테 이름을 붙여줬어. ‘모든 소공인들의 친구’라고.
내가 보고 싶었던 국회의원이 이런 사람이 아니었을까,?언니 덕에 국회가 무엇을 해내야 하는 곳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비정규직 노동자, 청년, 여성, 소수자와 장애인들을 위한 정책들이, 그리고 제발 대기업중심의 천만 영화보다 작은 영화 천만 개가 살아남을 수 있는 정책들이 마구마구 나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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