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오신날-아시아불교 28] 캄보디아④스님 6만명 학살 ‘킬링필드’ 이후 회복세

3일은 불기 2561년 부처님오신날입니다. <아시아엔>은 부처님의 자비와 은혜가 독자들께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아시아엔>은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스리랑카·미얀마·태국·캄보디아·라오스·인도네시아·베트남 등 아시아 각국의 불교의 어제와 오늘을 <불교평론>(발행인 조오현)의 도움으로 소개합니다. 귀한 글 주신 마성, 조준호, 김홍구, 송위지, 양승윤, 이병욱님과 홍사성 편집인 겸 주간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편집자)

암흑기와 프랑스 식민지배기(1431년~1953년)

[아시아엔=송위지 성원불교대학장, 을지대 교수 역임] 씨암 즉 지금의 태국에서 지속적으로 압박해오는 외환을 겪던 앙코르 왕조는 법왕이라고 불리는 앙창 1세(1505~1555)가 이들의 공격을 잘 막아냈다. 하지만 씨암과 라오스의 압박이 지속되어 1593년 앙창 1세가 세웠던 로베크가 함락되고, 씨암의 영향으로 인하여 대승불교보다는 상좌부불교가 확고히 자리 잡게 되었다.

이로 인해 그동안 숭배되던 브라만 사원은 탑으로 바뀌었으며 시바 신의 표상인 링가는 불상으로 대체되었는데, 이것이 상좌부불교 속에 대승불교의 요소와 힌두교의 요소가 아직까지 남아 있는 이유이다. 또한 17세기 초에는 체이치타 2세(1618~1628)가 재기를 도모했으나 씨암과의 싸움에서 패했으며 이후에는 베트남 완조의 공격도 받았다. 17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 베트남 왕가와 씨암 왕가가 번갈아 공격을 가해 와, 캄보디아는 혼돈에 빠졌다. 이후 씨암의 점진적인 서북지방 지배와 베트남 완조 이민의 메콩 강 지배로 인해 결국 19세기에 들어서서 캄보디아는 두 국가에 분할 복속되고 말았다.

캄보디아에는 16~17세기에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선교사들이, 17세기에는 네덜란드와 일본인들이 진출했으나 오래 가지는 못했다. 19세기 후반 프랑스는 메콩 강 하류를 영유한 뒤 베트남의 완조를 대신해서 캄보디아를 놓고 씨암과 다투다가 1860년에 프랑스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1863년부터 프랑스는 가톨릭 중심의 정책을 펴서 캄보디아인들을 개종시키려고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캄보디아인들은 상좌부불교를 중심으로 잘 대처해서 프랑스의 식민지배 동안 종교적 갈등이 많이 빚어졌다.

1953년까지 캄보디아를 지배했던 프랑스는 캄보디아에서 대대적으로 불교 탄압을 자행하기도 했으나 문화적인 면에서는 앙코르와트의 보존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하지만 외국의 지배 아래서도 불교사원을 중심으로 캄보디아인들은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였으며 젊은이와 어린 학생들을 위한 일요법회의 활성화 등 이교도 특히 가톨릭의 공격을 슬기롭게 견뎌 낼 수 있을 만큼, 캄보디아인들의 불교 신앙은 열렬했다. 황의를 입은 승려들은 승복을 입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존경을 받았으며, 외국인들은 캄보디아를 ‘승려의 나라’라고 부를 정도였다. 이로 인해 태국과 같은 강제성은 없지만 캄보디아의 불교는 민중의 의식에 완전히 뿌리 내리는 데 성공하여 웬만한 정치적 격동기에도 종교적 동요는 일어나지 않았다.

1953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후, 캄보디아왕국(1953~1970)과 크메르공화국(1970~1975)으로 역사를 이어오던 캄보디아는 론 놀 정부를 무너뜨린 크메르 루주의 폴포트(Pol Pot)파가 정권을 장악했다. 이들은 시아누크를 가택에 연금하고 민주 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a)를 세운 뒤에 모택동주의에 기초한 극단적인 정책을 펼쳤다. 자본주의적 요소를 모두 부정하고, 농업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관개공사와 토목공사에 강제 노역을 시행하고 반대파에 대한 가혹한 처형 등으로 악명을 떨쳤다. 폴포트 정권이 캄보디아를 통치하던 1975년 4월부터 1979년 1월 사이의 기간에 200만명에 이르는 국민과 6만여 승려가 학살당했는데, 이 대규모 학살은 이른바 ‘킬링필드(Killing Fields)’라는 말로 잘 알려져 있다.

캄보디아의 불교 현황

1991년 캄보디아 국민당 정부는 불교를 국교로 선포하였다. 캄보디아불교의 기반은 비구승들과 사원인데, 사원은 캄보디아인들의 영혼의 안식처이자 생활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캄보디아불교의 승단은 1855년 이후 진보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마하니까야(MahaNikaya, 大宗師派)와 보수적 입장을 견지하는 담마유티카니까야 2개의 종파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외양적으로는 차이점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승복을 입는 방법이라든가 공양을 하는 방법 등은 거의 유사하다.

이들 승단은 전통적으로 왕이 임명해온 상가 나야까 스님(僧正)의 지도로 통솔되고 있다. 각 종단에는 나야까 스님 아래로 상좌라고 불리는 장로(thera) 스님들이 있다. 승정은 각 사원의 운영을 책임지는 책임자를 임명하며 사원의 책임자는 사원의 운영만 할 뿐 소유권을 갖지는 않는다. 특히 사원 유지를 위해 필요한 경제적인 문제는 승려들이 관여할 수 없고 신도들로 구성된 협의체에서 관장하기 때문에 경제적 풍요로 인하여 승려가 타락하는 일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승려들은 식생활을 위해 탁발하며 참선보다는 주로 교리 중심의 공부를 한다. 그 때문에 이웃 미얀마나 스리랑카, 태국 등에서 활발히 수행되는 위빠사나(vipassana)는 승단에서는 상대적으로 위축되어 있고, 신도들이 더 참선을 더 즐겨 하는 편이다. 특히 신도들은 집에서도 위빠사나 명상을 하며, 부처님의 전생담인 <자타카> 등 주로 윤회와 업을 중심으로 한 교리를 배운다.

특히 현세에 공덕을 쌓는 것은 내세는 물론 현세에도 좋은 과보로 돌아오기 때문에 항상 선호하며, 공덕을 쌓는 방법으로 살생을 피하는 등 계율 중심적인 신행과 이웃과 사원을 위한 보시행이 강조되고 있다. 또한 조상을 섬기는 마음이 강해 매년 우안거를 마친 후 조상을 위한 대제를 지내는데 이때는 물의 축제도 함께 지낸다.

승려의 수는 1970년 통계에 따르면 마하니까야가 5만3200명, 담마유티카니까야가 1300명 등 5만4500명이었다. 사찰 수는 마하니카야가 2980개, 담마유티카니까야가 110개로 캄보디아 전체로는 3090개다. 캄보디아의 승단은 상가라자라고 불리는 수장(法王)에 의해 통솔되는데, 서로 독립되어 각자의 교단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며 정권과 항상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캄보디아불교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승단의 사회 교육적 기능이다. 사찰이 마을의 중심 역할을 하며 민중에게 교육하는 기본 교육기관으로서 역할은 물론, 대중의 고민을 해결해주는 사회적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다.

재가자의 경우 ‘담마 위나야 빠살(法·律學校)’이 개설되어 어려서부터 체계적인 불교 교리를 배울 수 있다. 따라서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자연스러운 종교 교육도 병행한다. 승려가 되는 경우에도 일반적으로 12세경에 사원에 들어가 사미승이 되고, 만 20세가 되면 구족계(upasampada)를 받아 비구승이 된다. 승려에 대해서는 빠알리어 삼장을 주로 교육하며 외전에 대한 교육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비구승이 되면 일반적으로 황색 승복을 입으며 황색 승복은 승려로서의 권위와 위엄을 나타내는 것이다. 사원에서 시행하는 교육 내용은 상좌부불교 교리에 근거하여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내용을 교육하기 때문에 이들 교육을 받은 이들은 기적을 추구하지 않으며 또한 이들은 비교적 자비롭고 선량하다. 또한 이 나라의 민간 설화 등도 상좌부불교의 영향을 받아 신화적 요소보다는 현실적 요소가 많이 반영되어 있다.

1970년 통계에 따르면 캄보디아 불교사원에서 운영하는 초등 빠알리어 학교는 529개, 학생 1만983명, 불교고등학교는 2개, 학생 500명, 불교대학은 1개로 112명이다. 1975년 인도차이나반도의 공산화로 승단의 힘이 약해지고 특히 폴포트에 의해 수십만명이 학살되면서 캄보디아불교도 매우 위축되었으나 헴 삼린 정권이 들어서면서 몇 군데의 사원이 복구되었다. 복구 초기에는 교세가 미약했지만, 차츰 회복세를 보여 현재는 비교적 활발히 승단이 유지되고 있으며 출가자들도 꾸준히 늘고 있다.

캄보디아 불교의 특징

“우리는 염려 없다. 불교라는 보물을 잃지 않는 한….” 캄보디아불교의 특징을 말해주는 이 말처럼, 동남아시아나 남아시아 대부분의 상좌부불교 국가가 그러하듯이 캄보디아인들도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그리고 사후에도 불교 안에서 살아간다. 태국처럼 모든 남자가 일생에 한 번은 승려 생활을 하며 결혼 등의 풍습이나 축제도 역시 불교식 의례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불교적 생활양식은 프랑스의 힘을 등에 업은 가톨릭의 지배에서도 캄보디아인들이 불교를 굳건히 지켜낼 수 있는 힘이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나라의 방생의식과 유사한 의식을 계속 이어오고 있다는 점이다.

상좌부불교 국가에서는 불살생계의 영향으로 처음부터 동물을 잘 잡지 않기 때문에 동물을 살려주는 방생의식이 그리 발달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캄보디아인들은 불교의 대표적인 보살행의 하나인 방생을 생활화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처럼 물고기나 자라를 사서 방생하지는 않는다. 덫에 걸린 새를 놓아주거나 새장에 갇혀 있는 새를 공중으로 날려 보내면서 서원을 비는 것이 캄보디아의 불교도들의 방생의식이다.

한국과의 불교교류

2013년 기록에 의하면 캄보디아에 진출한 우리나라의 교민은 약 5000명으로 대부분 프놈펜에 거주한다. 씨엠레아프에 1000명이 있는데 기독교 선교사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고 한다. 캄보디아와 한국불교의 교류는 빈곤 아동에 대한 지원이 로터스월드에 의해 이루어지고는 있으나 아직은 미미한 수준이다. 또한 한국에 와 있는 캄보디아 이주민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한국의 사찰이 있으나 그 역시 소수에 불과하다.(캄보디아편 끝)

필자 송위지

성원불교대학장. 한국외국어대 경영학과 및 스리랑카 국립 켈레니야 대학 대학원 팔리불교학과 졸업(철학박사 학위 취득). 을지대학 교수 역임. 논문으로 <빠알리 장부 마하 숫티파파나 숫타와 중아함 염처경의 비교 연구〉〈상좌부불교 국가의 민족 분쟁〉<위빠사나와 간화선의 교집합적 접근〉등과 역서로 <불교 선수행의 핵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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