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오신날-아시아불교 26] 캄보디아②’산의 나라’ 후난왕조와 첸라왕조

<사진=AP/뉴시스>

발행인 조오현)의 도움으로 소개합니다. 귀한 글 주신 마성, 조준호, 김홍구, 송위지, 양승윤, 이병욱님과 홍사성 편집인 겸 주간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편집자)

[아시아엔=송위지 성원불교대학장, 을지대 교수 역임] 캄보디아불교는 대체로 역사적 시기를 다음의 네 단계로 나눌 수 있다.

① 후난(扶南) 왕조 시기(A.D. 86~550)

② 첸라(眞臘) 왕조 시기(550년~802)

③ 앙코르 왕조 시기(802~1431)

④ 암흑기와 프랑스 식민지배기(1431~1953)

후난(扶南) 왕조(A.D. 86~550)

이 시대 구분은 빠알리어 연대기에 의한 불교의 전래설이 아니라 중국의 기록에 의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캄보디아를 ‘산(山)의 나라’라는 뜻으로 후난(扶南)이라고 불렀다. 대략 기원전 1세기부터 서기 550년까지 존재했던 후난 왕조가 캄보디아의 첫 번째 왕조로 나중에는 발남국(跋南國)이라고 불렸다. 인도에서 건너온 혼전(混塡)이 캄보디아로 와서 그곳의 여왕 유엽(柳葉)과 싸워 승리하여 세운 나라가 후난이다. 후난 왕조에 관한 역사적 사료는 찾기 어렵지만, 캄보디아와 베트남에 각각 두 곳씩 네 곳에 남아 있는 각문(刻文)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각문에 의하면 당시의 캄보디아는 불교와 브라만교 즉 인도문화의 영향 아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베트남의 보창에서 발견된 각문에 의하면 후난국의 왕가인 카운디나가의 후계자 중 범사만(范師蔓)이 이웃의 여러 나라를 평정하여 후난 대왕이라는 칭호를 얻었는데 그는 열렬한 불교도였다. 3세기 전반 열렬한 불교 신도였던 범전왕(范栴王) 시절에는 많은 불사를 일으키고 승려를 존경하는 등 불교를 존중하는 정책을 썼으며 중국의 오나라와도 교류했다.

후난은 중국뿐 아니라 인도와도 교류했으며, 중국과 인도의 교역에서 중간 기착지 역할도 하였다. 서기 484년 나가세나(Nāgasena)라는 인도의 승려가 후난의 자야와르만(Jayavarman, 闍那跋摩)의 지시로 중국 남제의 무제에게 상아로 만든 탑과 금화, 용왕상(龍王像) 등을 조공으로 바치면서 “후난에서는 브라만교를 국교로 신봉하여 시바 신을 모시고 있으나 불교 역시 활발하여 신도가 많다”고 말했다. 이어 5세기 초에는 카운디야 왕조가 들어서면서 상가팔라(Saṅghapala, 460~524) 같은 고승도 배출하였다. 그는 512년 <아육왕경> 10권 등 많은 불전을 가지고 들어가 중국 양무제(梁武帝)의 명을 받아 역경에 종사했음이 <역대삼보기>(歷代三寶記) 권3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에 기록되어 있다.

6세기 초인 503년 자야와르만은 또다시 중국으로 신하를 파견하여 산호로 만든 불상과 보살상과 백단향으로 만든 상(像) 등을 보내기도 했다는 기록이 양서(梁書)와 <불조통기>(佛祖統記)에 전한다. 이때 중국과 교학적인 교류도 활발하여 6세기 초 만드라세나(Mandrasena)는 <문수반야경> 2권을 크메르어로 번역했으며 자야와르만의 왕위를 강탈한 루드라와르만(留陀跋摩)은 519년 중국의 황제에게 전단향으로 만든 불상을 보냈다. 그때 사절 중 한 명이 “후난에는 3m의 크기에 달하는 부처님의 모발사리를 보관하고 있다”고 하자 중국의 황제는 승려 석운보를 후난으로 보내 모발사리를 모셔오도록 했다.

비록 왕위를 강탈했지만 루드라와르만은 크메르 각문에 “그는 삼보에 귀의하고 스스로 매우 신앙이 깊어 모든 부정(不淨)을 깨끗이 씻었다”고 되어 있어 불교에 귀의한 후 청정한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카운디냐의 자야와르만과 그의 후계자의 모습이 앙코르 보레이에 있는 프놈다 지역을 중심으로 석상, 청동상, 목상으로 조성되었다. 이 영향은 해외에도 파급되어 현재 베트남 트리빈 주 남쪽에 있는 앙코르 보레이와 트라페앙밴은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석상 조각의 중심지이다.

불교 3대 여행서의 하나인 의정(義淨, 635~713)의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 권1에는 후난국과 다음 왕조인 첸라 왕조에 대한 설명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환주(驩州)의 남쪽으로 걸어서 보름, 배를 타면 5, 6일 만에 인도의 첨파, 즉 임피국에 이른다. 이 나라는 정량부(正量部)와 유부(有部)를 숭앙하고 있다. 그리고 서남쪽으로 한 달간 가면 발남국(跋南國)에 이른다. 옛날에는 부남 또는 나국(裸國)이라 불리던 나라다. 이곳 사람들은 천신을 모셨는데 뒤에 불교가 왕성해졌다. 현재는 나쁜 왕이 나와 불교도 멸망시키고 승려도 없다. 불교 이외에도 여러 가지 종교가 성행하고 있다.

이때는 이미 불교가 쇠하던 시절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나국(裸國)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당시 이 지역에서는 옷을 아주 간단히 입었음을 알 수 있다. “나쁜 왕이 나와”의 나쁜 왕은 후난국의 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후난국 다음 왕조인 첸라 왕조의 바바바르만 1세를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첸라 왕조(550~802)

동남아의 중심 국가로 흥성했던 후난은 속국이던 첸라(眞臘)의 사나바르만 왕에게 멸망하였다. 사나바르만 시대의 특징은 대승불교가 이입되었다는 것이다. 첸라 시절의 불교는 많이 쇠퇴하였으나 626년에 조성된 삼보르 프레이 쿡(Sambor Prei Kuk) 명문과 캄보디아 북부의 앙코르 인근의 도시인 씨엠레아프(Siem Reap)에 관세음보살상 등이 남아 있다. 당시 메콩삼각주 지역에는 산스끄리뜨에 기초한 설일체유부 불교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고 서기 600년부터 800년 사이에는 크메르 스타일의 불상과 많은 대승 보살상들, 시바와 비슈누 같은 힌두 신상들의 흔적이 풍부하게 남아 있다. 서기 625년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씨엠레아프 지역의 사원 타프롬(Ta Prohm)의 명문에는 불법과 승단이 번성했음이 새겨져 있다.

첸라는 처음에는 후난의 지배를 받았으나 양(梁)의 대동(大同) 연간(535~545) 독립하였으며, 후난에서 이주해온 후난 왕실의 후예 바바바르만 1세에 의해 새로운 왕조가 시작되었다. 바바바르만 1세는 왕위에 올라 후난과 싸움을 계속했으며 수나라와 교류하기도 했다. 바바바르만 2세 역시 후난과 싸움을 지속하였으며 그 후 자야와르만 1세가 첸라를 통일했다.

후난의 역사는 중국의 사서에 의한 것이 많았으나 첸라 왕조의 역사는 각문을 통해 알려진 것도 많다. 중국의 수서(隋書)에 의하면 첸라에서는 대승불교가 융성하면서 상좌부불교와 공존하였으며 이들의 흥성으로 많은 승려가 있었다. 특히 바바바르만 1세는 왓 쁘레이비에르(Wat Prey Vier)와 왓 쁘라삿(Wat Prasat)에 이 시절에 관한 기록은 물론 불타를 지킨 용(Naga)에 관한 기록 등을 남기기도 했다. 또 다른 각문에서는 관세음보살상이 조성된 내용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7세기 초 이샤나와르만 1세(611~635) 시절에 불교는 쇠퇴하여 사원이나 승단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불교 건축, 조각, 비문 등은 많이 남아 있지만, 쇠퇴 원인은 밝혀지지는 않았다. 바바바르만 1세 이후 첸라는 왕위 계승문제가 원인이 되어 북부 산지의 ‘육지 첸라(陸眞臘)’와 남부 저지대의 ‘물 첸라(水眞臘)’로 나뉘었다. 이후 9세기 초에 자야와르만 2세가 재통일하여 앙코르 왕조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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