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오신날-아시아종교 34] 베트남② 인종 임금 출가해 ‘죽림파’ 열어
3일은 불기 2561년 부처님오신날입니다. <아시아엔>은 부처님의 자비와 은혜가 독자들께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아시아엔>은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스리랑카·미얀마·태국·캄보디아·라오스·인도네시아·베트남 등 아시아 각국의 불교의 어제와 오늘을 <불교평론>(발행인 조오현)의 도움으로 소개합니다. 귀한 글 주신 마성, 조준호, 김홍구, 송위지, 양승윤, 이병욱님과 홍사성 편집인 겸 주간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편집자)
?6~14세기의 불교
[아시아엔=이병욱 고려대·중앙승가대·동국대평생교육원 강사, <천태사상연구> <고려시대의 불교사상> <한국불교사상의 전개> <불교사회사상의 이해> 저자]?6세기 후반에 들어서 남인도 바라문 출신 비니타루치가 베트남에 처음으로 선(禪)을 전했다. 그가 세운 종파를 비니타루치파(派)라고 한다. 9세기에는 무언통파(無言通派, 보곤통)가 생겨났다. 11세기 초에 이조(李朝)가 들어서고 제3대 황제 성종(聖宗)이 새로운 불교 종파를 열었는데 이를 초당파(草堂派)라고 한다. 13세기에 이조가 멸망하고 진조(陳朝)가 세워진 후 무언통파에서 죽림파(竹林派)가 성립되었다.
(1) 비니타루치파(派)
비니다류지(比尼多流支, ?~594)는 비니타루치파(派)의 개조(開祖)다. 남인도 사람으로 브라만 계급 출신인 비니다류지는 어려서부터 세속을 떠날 뜻을 품었다. 서인도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부처의 심인(心印)을 구하였지만, 법(法)의 인연이 있지 않아서 주장자를 들고 동쪽으로 갔다. 574년 장안에 도착하였는데, 북위의 태무제의 폐불 사태를 만나서 업(?)으로 가려고 하였다. 그때 폐불을 피해서 의발을 가지고 사공산(司空山)에 은거하고 있던 3조 승찬(僧璨)을 만났는데, 승찬의 행동거지가 비범함을 보고 마음속에서 공경함이 일어났다.
이에 비니다류지는 앞으로 나아가 두 손을 마주 잡고 세 번이나 예를 표하였다. 그러나 승찬은 말없이 좌선을 하였다. 비니다류지는 우두커니 있다가 활연히 깨달음을 얻고 승찬에게 엎드려 삼배를 하였다. 승찬은 다만 세 번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었다.
비니다류지가 세 걸음 물러나서 말하였다. “제자가 찾아왔지만, 적절한 때는 아닌 것 같습니다. 화상께서는 대자비를 베풀어서 제자가 화상의 주변에서 모실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승찬이 말하였다. “그대는 속히 남쪽으로 내려가서 제자를 가르치도록 하라. 이곳에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된다.”
비니다류지는 승찬과 헤어져서 광주 제지사(制旨寺)에 주석하였다. 6년 동안 머무르면서 <불설상두정사경>(佛說象頭精舍經) <보업차별경>(報業差別經)을 번역하였다. 580년, 비니다류지는 베트남의 법운사(法雲寺)에 와서 머물렀고 <총지경>(摠持經)을 번역하였다. 비니다류지가 입적하자 제자였던 법현은 다비를 하고 오색의 사리를 수습하고 탑을 세워 사리를 안치하였다. 비니타루치파(派)는 제1세 제자인 법현을 시작으로, 제12세까지 이어졌다.
(2) 무언통파(無言通派)
무언통(無言通, ?~826)은 광주(廣州) 사람으로 성은 정(鄭)씨이다. 어려서부터 불교에 관심이 많았으며, 집안의 재산을 관리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무주(?州) 쌍림사(雙林寺)에서 수행을 시작하였다.
무언통이 어느 날 예불하고 있을 때 어떤 선자(禪者)가 물었다. “좌주(座主)는 누구에게 예배하는가?” 무언통은 답했다. “부처에게 예배합니다.”
선자가 불상(佛像)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저것이 무엇인가?” 무언통은 대답하지 못하였다. 그날 밤, 무언통은 위의를 갖추고 선자에게 예배하고 물었다. “선자가 앞에 물었던 질문의 뜻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다음은 두 사람 대화다.
“좌주는 출가한 지 얼마나 되었는가?”
“10년이 되었습니다.”
“그대가 출가하기는 한 것이요?” 무언통은 할 말이 없었다.
선자가 말하였다. “만약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출가한 지 100년이 된다 해도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선자는 무언통과 함께 마조(馬祖, 709~788)를 만나러 갔지만, 마조가 입적하였기 때문에 무언통은 백장회해(百丈懷海, 749~814)에게 가서 공부하였다. 어느 때에 어떤 승려가 백장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대승의 돈오법문(頓悟法門)입니까?”
백장이 답하였다. “마음이 공(空)하면, 지혜의 해가 스스로 비출 것이다.” 무언통은 이 문답을 듣고 문득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광주로 돌아와서 화안사(和安寺)에서 주지가 되었다.
앙산혜적(仰山慧寂, 807~883)이 사미였을 때 무언통은 앙산을 부르며 “나를 위해서 침상을 가지고 오너라”라고 하였다. 앙산이 침상을 가지고 왔다. 무언통은 말하였다. “본래 있던 곳에 갖다 놓아라.” 앙산이 그대로 하였다.
또 무언통이 물었다. “앙산아! 저쪽에 무엇이 있는가?” 앙산이 답하였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무언통이 물었다. “이쪽에는 무엇이 있는가?” 앙산이 답하였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무언통이 또 말하였다. “앙산아?” 앙산이 “예” 하고 답하였다. 무언통이 말하였다. “가라.”
820년, 무언통은 베트남 북령(北寧)의 건초사(建初寺)에 와서 머물렀다. 죽을 먹는 것 이외에는 선열(禪悅)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늘 앉아서 면벽하고, 묵언을 했다. 몇 년이 지났는데도 무언통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는데 감성(感誠)만이 더욱 예배드리고 공경하며 주위에서 모셨다. 감성은 무언통에게 은밀히 현묘한 이치를 물었고 마침내 그 요점을 모두 얻었다.
이처럼, 무언통은 백장회해에게서 깨달음을 얻었고, 앙산혜적이 사미였을 때 가르침을 베푼 적도 있다. 그의 제자 감성을 제1세로 하여 제15세까지 무언통파가 이어졌다.
(3) 초당파(草堂派)
초당(草堂)은 노복(奴僕)으로 있다가 국사(國師)가 된 인물이다. 이조의 성종(聖宗, 1054~1072 재위)이 1069년에 참파(占城)를 공격했을 때, 스승을 따라 참파에 왔던 초당은 포로가 되어 하노이(昇龍)에 연행되었다. 초당은 승록(僧錄: 승직의 하나)을 맡은 승려의 노복이 되었다. 이 승려가 어록을 쓰다가 잠시 외출했을 때, 초당이 문장을 수정하였다. 승려가 돌아와 수정된 문장을 보고 크게 감탄하였다. 이 승려는 성종에게 이러한 사실을 보고했고, 그 결과 초당은 국사가 되어 존중을 받았다. 초당은 개국사(開國寺)에서 활약하며 승려와 재가불자를 교화하였다.
제자로는 성종(聖宗), 반야(般若) 선사, 우사(祐赦) 거사 등 3명이 있는데 이들이 초당파의 1세이다. 2세 제자 가운데 오익(吳益)은 성종에게 법을 이은 사람 중 하나인데, 그는 참정(參政)이라는 요직에 있었다. 제3세로는 영종(英宗), 두무(杜武) 등이 있는데, 두무는 황제를 교육하는 직책을 맡고 있었다. 제5세 제자에는 고종(高宗)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처럼 초당파는 황족과 고급관리들 사이에 퍼져 있었다.
(4) 죽림파(竹林派)
진조의 인종(仁宗) 시대는 베트남의 민족의식이 강렬하던 때였다. 베트남은 몽골군의 침입을 막아냈기 때문에 자신감이 넘쳐흘렀으며, 아울러 자유롭고 활달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 시기에 베트남에서는 한자를 이용해서 쯔놈(Chu Nom, 字湳)이라는 문자를 만들었고, 민족문학이 싹을 틔웠다. 이러한 풍조는 불교계에도 영향을 미쳐, 간화선을 실천해서 자신의 면모를 철저하게 추구하는 개성적인 선풍(禪風)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임제선이 일어나고 죽림파(竹林派)의 형성으로까지 이어졌다.
죽림파는 무언통파의 선과 임제선을 합한 것인데, 임제선이 베트남불교로 변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죽림파의 개조는 죽림대사(竹林大師)로 불렸던 인종인데, 그는 임제선을 그의 스승 혜충(慧忠)에게서 공부하였다. 이 임제선은 인종이 영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출가해서 와운암(臥雲庵)에 머물 때 베트남 불교계에 선풍적으로 퍼져나갔다. 왜냐하면 베트남 역사상 최대의 국란이었던 몽골군의 침입을 물리친 인종의 뛰어난 지도력이 불교계에도 그대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죽림파는 죽림대사(인종)를 뒤이어 법라(法螺, 1284~1330), 현광(玄光)이 이어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