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오신날-아시아불교 35] 베트남③15~20세기초 왕실 유교정책으로 불교는 친대중적 경향

베트남 하노이의 사원

3일은 불기 2561년 부처님오신날입니다. <아시아엔>은 부처님의 자비와 은혜가 독자들께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아시아엔>은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스리랑카·미얀마·태국·캄보디아·라오스·인도네시아·베트남 등 아시아 각국의 불교의 어제와 오늘을 <불교평론>(발행인 조오현)의 도움으로 소개합니다. 귀한 글 주신 마성, 조준호, 김홍구, 송위지, 양승윤, 이병욱님과 홍사성 편집인 겸 주간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편집자)

베트남 불교 종파들 

[아시아엔=이병욱 고려대·중앙승가대·동국대평생교육원 강사, <천태사상연구> <고려시대의 불교사상> <한국불교사상의 전개> <불교사회사상의 이해> 저자]2) 15~20세기 초반의 불교

진조(陳朝) 중기 이후 왕조의 쇠퇴와 함께 불교 역시 그 세력이 약화되었다. 15세기에 후여(後黎)가 성립되어 유교를 중시하는 정책으로 전환하면서 불교의 세력은 점차 쇠퇴했다. 그 결과 불교는 권력에 밀착한 종교에서 대중의 종교로 전환하게 되었고, 반권력적 세력이 되었다.

후여(後黎) 말기에서 완조의 시대까지 불교는 융합적인 성격을 나타냈다. 불교가 도교와 유교와 융합한 후, 거기에다 민간신앙 곧 정령신앙, 조선(祖先, 祖上)신앙과 습합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 사원에는 여러 형태의 불보살상이 추가되었고, 공자상(孔子像)을 비롯한 유교 성인의 상(像), 옥황상제와 같은 도교의 여러 신의 상, 민간신앙 대상인 여신과 토지신 등에까지 제사를 드렸다. 또한 승려가 불교에 영향을 받은 도교의 경전을 독송하고, 도교의 행사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불교와 도교가 뒤섞이는 이와 같은 혼효(混淆)의 경향은 현대에도 이어지고 있다.

(1) 연종(蓮宗)

연종은 죽림파의 선(禪)과 정토교 사상이 결합한 종파이다. 중국 송대 백련종(白蓮宗)의 흐름을 이어받은 뒤에 죽림파의 사상과 정토종의 염불, 밀교의 의례, 베트남 고유의 민간신앙까지 혼합한 것이다. 이 연종은 인각(麟覺, 1696~1733)이 처음 열었다.

죽림파에서 분파하여 독립한 연종은, 하노이성 밖에 있는 사찰(파다사)에서 창립되었다. 이후 북방 북령(北寧)의 함용사(含龍寺), 월광사(月光寺), 연종사(蓮宗寺) 등에서 연종의 교의를 주장하였다. 17~18세기의 베트남 남북분열 시대에는 북방의 정씨 영토에서 발전했다. 이후 베트남 불교계에서 교단 외형적으로는 임제정종(臨濟正宗)을 주장하면서도, 신앙 내용에서는 정토종의 염불을 중심으로 한 것은 대체로 연종의 흐름을 이어받은 것이다. 1945년 8월 혁명 이전에는 북베트남 불교도의 80%가 연종 신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서산(西山, 타이송) 동란을 거쳐 19세기 초기 전국을 통일한 완조(阮祖, 구엔조)는 전국적으로 불교를 경시하는 정책을 폈는데, 그 가운데서도 특히 북방의 연종을 억압하였다. 완조의 이러한 정책은 불교의 민중종교적 특성을 강화하였고, 베트남불교의 절충적 성격을 더욱 심화시켰다.

(2) 원소선파(原紹禪派)

중국인 승려 원소(原紹)에 의해 세워진 종파인데, 원소는 1718년 중국 청나라에서 베트남의 광남국(廣南國)에 와서 임제정종(臨濟正宗)이라고 불리는 원소선파(原紹禪派)를 세웠다.

베트남 분열기의 남부지방에서는 광남국이 성립하였고, 이 광남국은 완씨(阮, 구엔)의 지배 아래 있었다. 완씨 정권은 이 지역에 남아 있던 참(Cham)인의 문화를 없애기 위해 많은 불교 사찰을 세웠다. 부춘(富春)의 천모사(天姥寺)가 그 중심이다. 완씨는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원소를 비롯한 여러 승려를 초청하였다. 원소는 참파(Champa, 占婆, 192~1832) 왕국의 옛 도시 비자야에서 10개의 탑을 세우고, 원소선파를 세웠다.

이 종파는 나무아미타불을 선(禪)의 공안으로 삼고 있는데, 이는 선과 정토사상의 합일을 주장하는 것이다. 원소선파는 현재 베트남 남부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다.

(3) 요관파(了觀派)

임제정종에 속하는 종파인 요관파(了觀派)는 원소 이후에 광남국에서 활동한 임제정종의 요관(了觀, ?~1743)에 의해 형성되었다. 광남국의 완씨 정권은 ‘후에’에 200개의 개인 사찰을 세우고 승강제(僧綱制, 승려를 통솔하는 관직제도)를 도입해서 많은 승려를 통제했는데, 임제정종을 보호하고 승강(僧綱)에는 임제정종의 승려만 임명하였다. 그래서 요관파는 베트남 중남부에서 세력이 강하다.

(4) 졸공파(拙公派)

졸공파도 임제정종에 속한다. 졸공(拙公, 1590~1644)은 중국의 복건성 출신이고 임제종의 승려이다. 그는 처음에는 캄보디아에서 16년 동안 불교를 가르쳤고, 만년에는 베트남 중부와 북부에서 20년 동안 불교를 가르쳤다. 젊었을 때 임금과 백성을 위해서 유학을 연구하고 여러 가지 학문에 통달하였던 졸공은, 영복선사(寧福禪寺)에서 활동하면서 황제·황족·고관을 비롯해서 상류사회의 남녀 불자들에게 설법하였다.

그는 설법 중에 유교와 도교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졸공은 불교의 오계(五戒)와 유교의 오상(五常)이 같은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유교는 별, 도교는 달, 불교는 태양이라고 비유하면서 불교우월론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또한 졸공은 지재(持齋)와 염불을 중시하였고, 무명(無明)을 제거하면 그때그때의 장소가 그대로 안락국(安樂國)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또 재가생활을 하면서도 그 생활 그대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하며, 선종과 정토신앙의 조화를 주장하였다.

졸공이 입적한 뒤에는 불적사(佛跡寺)에서 졸공의 유체(遺體)에 옻칠하여 육체상을 안치하였는데 불자들의 숭배 대상이 되었다. <졸공어록>(拙公語錄)이라는 책이 남아 있다.

(5) 수월파(水月派)

임제정종의 한 종파로, 졸공의 제자 명행(明行, 1595~1659) 계열을 일컫는다. 중국 강서성(江西省) 출신인 명행은 베트남에 와서 졸공을 만나, 불이(不二)의 마음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1633년에 명행은 졸공과 함께 수도(都)로 갔다. 졸공의 지시를 받아 중국에 다시 돌아가 경전을 갖고와 불적사(佛跡寺)에 보관하고 경전 일부는 불적사에서 판각했다.

명행은 황제를 수행하는 행렬에 속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황제에게 벼슬을 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영복선사(寧福禪寺)에서는 황후도 명행을 스승으로 모시고 수행하였다. 영복선사에는 황제가 세운 비문이 있는데, 거기에는 명행을 등각(等覺)을 이룬 대선사이자 화신보살(成等覺大禪師化身菩薩)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베트남 북부에서는 현재까지 부처를 모시는 봉청(奉請)의 의식을 하기 전에서 졸공과 명행에게 받들어 청한다. 베트남불교에는 인도와 중국 출신의 승려가 많지만, 이렇게까지 대접을 받는 승려는 졸공과 명행뿐이다. 베트남 북부의 불교계에 졸공과 명행이 미친 영향이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청화성(淸化省) 택림사(澤林寺)에는 명행의 동상(銅像)이 있는데, 베트남에서 매우 사실적으로 제작된 동상으로 유명하다.

(6) 보산기향파(寶山奇香派)

1848년 성립한 정토교의 신흥교단으로 단명의(段明誼)에 의해 세워졌다. 지역적으로는 베트남 남부의 메콩강 삼각주에서 성립해 삼각주 농민들 사이에 세력이 급속히 확대되었다. 단명의는 메콩강 삼각주와 캄보디아 경계에 위치하는 칠산(七山)의 산림과 사찰에서 수행한 뒤, 1849년 사이공 남쪽 서안사(西安寺)를 거점으로 하여 포교를 시작했다. 그는 4가지 은혜 곧 부모의 은혜, 나라(국왕과 조상)의 은혜, 삼보(三寶)의 은혜, 인류 동포의 은혜를 강조하면서, 부적을 사용해서 병자를 치료하였다. 또한 단명의는 자신이 살아 있는 부처(活佛)라고 하면서 신자를 모았다.

보산기향파가 제시하는 이상(理想) 세계는 여러 가지를 혼합한 것이다. 중국 고대의 성스러운 황제인 요순(堯舜)의 시대와 아미타불의 극락정토(極樂淨土), 미륵의 도솔천의 정토, 신선의 봉래산의 경계(蓬萊境) 등의 이미지를 혼효(混淆)한 것이다.

유교, 불교, 도교를 융합한 거사불교인 보산기향파에서는 임금에게 충성하고 국가를 사랑할 것(忠君愛國)을 말하고, 이상적 세계가 도래할 때에는 베트남이 세계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프랑스가 메콩강 삼각주를 무력으로 점령하자, 보산기향파는 프랑스에 저항하는 운동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 그 때문에 보산기향파에 대한 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하였다.

(7) 화호교(和好敎, 화하오)

화호교는 20세기 들어 황부수(黃富數)가 보산기향파를 계승해서 세운 종파다. 황부수는 보산기향파 제4대 교주를 자처하는 인물인데, 캄보디아 국경과 가까운 화호촌(和好村)에서 태어났다. 병으로 인해 고생하다가 칠산(七山)에 올라가서 승려의 도움으로 치유된 그는 1939년 화호촌에 돌아가서 화호교 포교를 시작하였다. 황부수는 물과 부적을 활용해서 치병(治病)하였는데, 현재는 하원(下元)의 시대로서 말법이고, 곧 상원(上元)이라고 불리는 이상세계가 온다고 말하고, 그것을 용화회(龍華會)라고 했다.

화호교에는 불교와 도교 등의 가르침이 섞여 있다. 사성제(四聖諦), 12인연, 팔정도 등의 불교의 기본이념과 아미타불 신앙, 미륵신앙, 도교, 조선(祖先)숭배 등이 서로 섞인 것이다. 그리고 4가지 은혜를 말하는데, 이는 보산기향파의 주장과 같다. 화호교에서는 사찰을 짓지 않고 제단에서 여러 신앙 대상, 곧 석가모니, 여러 부처, 조선(祖先), 하늘(天) 등에 제사 드린다.

제2차대전 말기에서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에 이르는 시기에는 군사집단으로서 활동하며, 프랑스에 반대하는 투쟁을 강력하게 전개했다. 현재도 메콩강 삼각주 농민들이 화호교를 주로 신앙하고 있다.

이처럼 프랑스 지배 아래서 베트남불교(보향기향파, 화호교)는 반권력적이고 반식민지주의적인 성격을 나타냈다. 프랑스의 식민지배로 가톨릭이 사회의 상층부에 침투하였다면, 불교는 고통받는 민중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다.

(8) 까오다이교(高台敎)

1917년 오문소(吳文昭)가 창립한 종교다. 오문소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부 하급관리였다. 당시에는 남베트남의 지식인 사이에서 강신술회(降神術會)가 유행하였다. 칸토시(市) 부근 사찰에서 열린 강신술회에 참석한 오문소는 자신이 고태(高台)의 영(靈)을 불러일으킨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고태(高台)는 지상(至上)의 궁전을 의미한다. 그는 자신의 체험을 고태상제(高台上帝)를 지상신(至上神)으로 신앙하는 종교적 경지로 승화시켰으며, 자신의 지인들에게 하나의 큰 눈(巨眼)을 신(神)의 상징으로 예배하도록 하였다. 까오다이교에서는 신(神)이 인간세계에 보여준 제3의 눈(三番目)의 제도(濟度)를 믿으라고 한다.

1926년 여문충(黎文忠)이 신자들을 교단으로 조직한 뒤에 까오다이교는 서녕성(西寧省)에 본부를 두었다. 그리고 도교, 불교, 기독교, 전통적 민간신앙, 유교, 그리스철학을 융합하였다. 1935년 범옥석(范玉石)이 제2대 교주가 되면서부터 신자의 수효가 늘어났고, 이 신자들을 로마 가톨릭의 조직과 유사하게 편성하였다.

제2차대전 말기에 까오다이교는 민주사회당을 창설하고, 베트남독립연맹, 곧 베트민전선의 남부행정위원회에 참가하였다. 그 이후 남베트남에서 중요한 정치집단으로 자리 잡은 까오다이교는 프랑스 식민지 시대와 제네바협정 이후 응오딘지엠의 독재정권 시대에 권력을 반대하는 대표적 정치세력이 되었다. 까오다이교는 앞에 소개한 화호교보다 더 혼합종교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불교의 분파로 보지 않는 견해도 있다.

(9) 걸사파(乞士派)

민단콴(明灯光)이 1944년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을 기초해서 세운 종파다. 캄보디아에서 상좌부불교를 배운 민단콴은 상좌부불교를 중심으로 하면서도 대승불교를 융합할 것을 지향하였다.

지금까지 소개한 것처럼, 베트남불교는 대부분 국가의 보호를 잃고 대중의 종교가 되었고, 그에 따라 복합적인 성격이 강화되었으며 종종 반권력적 정치집단을 만들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베트남 남부 메콩 삼각주 지역에는 크메르 계열 주민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데, 이들은 캄보디아불교의 영향을 받아 상좌부불교를 신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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