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만교·불교·힌두교는 한 뿌리②] 인도의 뿌리깊은 신분차별 ‘원조’ 브라만교
브라만교의 탄생
[아시아엔=홍익희 세종대 교양학부 교수, <유태인 이야기> 저자] 카스트제도는 아리안이 기원전 15세기경 인도를 침입하여 원주민인 드라비다족을 정복하고 지배층으로 등장하면서 자신들의 지배를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북부 인도에 침입해 온 아리안은 원주민을 평정한 다음 지배를 확고하게 하기 위해 ‘바루나’(Varna)라 불리는 신분제도를 만들었다.
‘바루나’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색’을 의미한다. 결국 피부색에 의해 신분이 구분된 것이다. 백인인 아리안이 지배계급이다. 그 뒤에 아리아인 중에서도 사회적 기능에 따라 구분됐다. 카스트제도가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고대 신분제도인 바루나가 카스트제도의 기본을 이루고 있다.
카스트제도에 따른 인도인의 신분은 브라만(승려), 크샤트리아(왕이나 귀족), 바이샤(상인), 수드라(일반백성과 천민) 등 4개로 구분되었다. 그 외에 최하층인 수드라에도 속하는 않는 불가촉천민이 있다. 불가촉천민은 “이들과 닿기만 해도 부정해진다”는 생각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또 각 계급에서도 구체적인 직업에 따라 계급이 세분되어 바이샤와 수드라의 경우 2000개 이상으로 세분된다.
신분이 다른 계급 간에는 혼인을 금지했다. 그리고 이름에서부터 신분간의 차이가 드러나도록 했다. 카스트제도는 ‘업’과 ‘윤회사상’을 근거로 정당화되어 사람들이 이를 숙명으로 여겼다.
카스트제도의 목적은 이렇게 아리안들이 들어와서 선주민들인 혼혈족을 지배하고 자기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선주민들과 혼혈뿐 아니라 식사하는 것까지 금하고자 종교의 이름을 빌려서 제도화시킨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브라만교가 탄생된 이유의 하나다. 그래서 브라만교에는 특정 교조가 없는 게 특징이다.
브라만교에 대해 알아보자. 초기 브라만교는 다양한 신을 숭배했고 그들로부터 구복을 바라는 단순한 형태였다. 자연현상의 배후에서 어떠한 지배력을 행사하는 주체를 상정하고 그것을 인격적 주체로 구체화하고 불과 같은 요소를 숭배하여 장수와 다산 등을 바랬다. 곧 태양신 수르야, 어둠과 축복의 신 푸샨, 선의 신 미트라, 공기의 신 인드라 등 삼라만상의 존재를 신격화했다. 아마 수메르 신화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신들은 인간생활 속에 직간접으로 관계를 가졌다. 사람들은 필요에 따라 신을 가려 제를 올렸기에 그 수는 33신 혹은 3,333신이나 되었다. 아리아인들이 인도 이주 뒤 처음 만든 성전이 ‘베다’이다. 베다는 알다(知)라는 뜻이다.
이후 브라만교는 <우파니샤드>라는 경전이 탄생하면서 우주의 근본원리 브라만(Brahman, 梵)과 개인의 본체인 아트만(atman, 我)이 동일하다는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이 브라만교의 중심사상이 된다. 우주의 근본원리인 범(梵)과 불변하는 영원한 참 존재인 나(아, 我)는 하나라는 뜻이다. 외부가 아닌 나의 내면에 있는 신을 찾고 의례적인 제식이 아니라 만물에 스며있는 브라만을 찾으라는 가르침이 핵심이다.
그리고 기초개념으로 윤회와 달마(達磨), 업(業), 해탈을 제시했다. 이러한 관념은 뒤에 인도에서 발생한 모든 종교의 근본개념이 된다. 특히 이는 훗날 불교의 중심사상이 된다.
브라만교는 제사장인 브라만의 역할에 따라 개인과 우주의 운명이 달라진다고 가르쳤다. 그 무렵 씨족사회를 벗어나 군데군데 소국을 세운 왕들은 권력기반을 다지기 위해 브라만과 손잡았다. 왕들은 대규모 제사의식을 통해 자연스럽게 제왕으로 인정받았다. 종교와 정치의 결탁은 신정일치의 사회를 이루며 사회 계급구조를 공고히 하며 기원전 6세기 신흥세력의 도전에 직면할 때까지 계속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