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파주 통일동산 6·25 순직종군기자 추념비 건립 뒷얘기
처칠 수상 아들도 참전해 발목 절단 부상
[아시아엔=이긍규 전 한국기자협회 회장, 전 국회의원] 필자는 1976년 제15대 한국기자협회 회장 당시 6·25전쟁에 파견됐던 400명 이상의 특파원 중 18명이 순직, 젊은 나이에 타국에서 산화한 ‘한국전 순직종군기자기념비’를 제작하기로 했다. 하지만 순직종군기자기념비 건립을 추진, 완성하기까지는 애로사항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종군기자 명단만 해도 전쟁 당시에는 우리 국방부에 외국특파원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국방부 정훈국이 없다시피하여 참전 16개국의 사령부에서 각기 자국특파원들을 관리했다. 또 각국 사령부에서 관리하던 자료들을 수집·보관했던 <서울신문> 조사국마저 4?19혁명 당시 화재로 소실되어 찾기 힘들었다.
그러던 중 다행히 1976년 당시 <시사통신> 東京특파원이었던 신화식(申和植)선생이 東京프레스클럽 회장으로 재직하고 계셔서 450명의 종군기자명단과 그들의 생사 및 현직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보내주었다.
이 정보에는 윈스턴 처칠의 아들이 한국전 당시 영국에서 파견된 종군기자였다는 사실과 더불어 그분이 낙동강 전투 취재 중 총탄을 맞아 발목이 절단되었으며 <런던타임즈> 편집장으로 재직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기념비를 제작, 건립하는데 막대한 자금과 장소가 필요했다. 당시 기자협회비는 월 500원으로 협회보 발간비와 직원 봉급에도 빠듯했다. 하지만 일은 저질러놓고 볼 셈으로 6월 내무부 산하 ‘기금모금승인위원장’이었던 장기영(張基榮) <한국일보> 사주를 찾아가 건립취지와 목적을 설명하고 승인을 요청했더니 쾌히 승낙, 회의를 열어 허가를 해주었다.
이어 몇몇 신문사 문화부기자들을 초청하며 조각가 중 어떤 분을 모셔야 훌륭한 작품이 나올 수 있을까를 상의한 결과 이구동성으로 홍익대 최기원(崔起原)교수를 추천했다.
생면부지였던 崔교수를 수차례 찾아가 설득, 상의한 끝에 무료봉사키로 의기투합하고 둘이서 건립장소를 찾아나섰다. 이리저리 헤매던 중 지갑종 김희중(시사통신 사장)씨등 한국 종군기자들을 만나, 휴전협정 당시 외국특파원들의 취재, 보도 장소가 文山에 있는 통일공원 앞 철도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철도 위에는 화물객차가 늘어서 있었는데 이 화물객차안이 종군기자들의 숙소 겸 편집국인 셈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 ‘순직종군기자기념비’를 건립하는 것이 의의가 있겠다 생각하고 건립을 확정했다.
장소가 결정되자 기념비의 설계를 어떻게 구성하느냐도 문제였다. 왜냐하면 순직한 18명의 종군기자 중 미국기자 7명, 영국기자 4명 등 17명이 외국기자들이고 한국종군기자는 韓규호 선배 한분뿐이었기 때문이다.
주춧돌은 텔레타이프(teletype)형태를 취하기로 하고 타전(打電)을 받는 종이가 텔레타이프 윗면에 나와 휘날리는 형태를 갖춰야 종군기자의 이미지를 살릴 수 있기 때문에 구리를 기본재료로 쓰기로 확정·설계했다.
그런데 그 구리의 구입이 그렇게 힘들 줄은 몰랐다. 구리 27톤을 국방부를 통해 탄피를 구하면 되겠다는 단순한 생각에 국방부 출입기자들과 접촉, 상의했더니 탄피를 구하려면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야 된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그 당시 군수물자 사정을 감안할 때 거의 불가능하다는 결론이었다.
구리문제가 난관에 부딪치자 그해 9월부터 유혁인(柳赫仁) 청와대 정무수석을 찾아나섰다. 유혁인 수석은 동아일보 정치부장 출신으로 박정희(朴正熙)대통령에게 세상의 쓴소리들을 가감없이 전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해 12월 하순 유 수석으로부터 청와대로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다. 황급히 청와대로 들어갔더니 박정희 대통령께서 금일봉을 주면서 “나 하고 만난 것을 신문에 써도 되느냐?”하고 묻기에 나는 “제가 청와대를 다녀갔다는 사실은 기자들이 다 알게 된다”고 답하자 임방현(林芳鉉) 대변인에게 “서울신문에 보도하도록 하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다음날 기자협회에 출근하자 태완선(太完善) 무역협회장(前경제부총리)이 기자협회 지하에 있던 프레스다방으로 직접 찾아와 만나자고 제안하여 상면해 만났다. 그는 “종군기자 기념비 제작비용 전액을 무역협회, 전경련, 상공회의소 등 세 단체가 모금해서 도와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나는 “언론계의 체면도 있고 하니 전부는 말고 일부의 비용은 신문협회가 부담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다. 그리고는 당시 신문협회 회장이었던 김종규(金鐘圭) 서울신문사장, 부회장인 방우영(方又榮) 조선일보사장, 김남중(金南中) 전남일보사장 등 세분을 찾아가 이같은 사정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했다.
이 과정에서 특히 조선일보 방우영 사장께서는 매우 잘한 일이라며 적극적으로 모금에 성의를 베풀어 순조롭게 건립기금을 조성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자금이 마련되니 이제는 27톤의 구리를 구할 길이 막연했다. 다행히도 때마침 최기원 교수가 불교계에서 충남 천안에 세울 예정이었던 동양최대의 좌불(座佛)상을 건립하기 위해 전국고물상들로부터 구리를 사들이고 있었는데 아직은 수요량이 부족해 착수하지도 못하고 있으니 그 구리 중 일부를 사서 쓰면 가능하다는 정보를 주었다. 최 교수는 “그 열쇠는 전국불교신도회장인 김성곤(金成坤) 의원(쌍용그룹회장)의 사모님이 갖고 있다”고 알려줬다.
나는 김성곤 의원 자택을 찾아가 설득·협조를 요청한 끝에 허락을 받아 그 구리를 원가에 구입할 수 있었다. 이같은 구매가 가능했던 것은 마침 崔교수가 ‘천안좌불상’의 설계, 제작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1976년 늦가을, 초겨울에 시작한 비문작성은 언론계 원로이셨던 홍종인(洪鐘仁) 조선일보 주필, 최석채(崔錫采) 대구매일 회장, 유광렬(柳光烈) 한국일보 주필 세분을 모셨는데 비문 작성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문제가 발생했다.
최석채 회장께서 홍 논설위원과는 비문 글을 같이 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유인즉 홍 논설위원과 논설위원실에 함께 근무할 당시, 글을 쓰면 홍 논설위원이 마구 뜯어고치는 악습을 갖고 있어서 그분과는 어떤 작업도 하기가 싫다는 것이다.
그래서 궁리 끝에 세분이 오시면 홍 주필만 따로 영접하여 프레스다방에 커피를 특별주문하고 다른 분들을 초빙하여 담소하도록 조치했다. 그랬더니 최 회장과 유 주필께서 화기애애한 가운데 우리 언론계의 선비정신, 즉 정의, 박애, 청빈 생활을 염두에 주고 비문 작성에 최선을 다해주셨다.
두분께서 작성한 문구 중 “먹물은 쓰러져도 正義는 살아있다”는 구절은 우리 선대부터 내려온 붓文化와 서양 텔레타이프의 잉크를 조화시킨 뜻을 담고 있다.
끝으로 나와 접촉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모르게 협조해준 당시 이광표(李光杓) 청와대 홍보비서관(前문공부장관)의 노고를 잊을 수가 없다. <중앙일보> 외신부장 출신이었던 이광표 장관은 초청될 종군기자명단을 확보하고 그들의 방한할 당시 비행기편은 물론 숙소 안내까지 모든 것을 책임지고 소리소문 없이 뒷바라지하는데 최선을 다해주었다.
이 장관은 초청주관을 국제문화협회로 정하고 이사장을 홍성철(洪性哲) 전 보사부?내무부장관으로 교체했다. 그 이유는 홍 장관이 마침 인천상륙작전 당시 ‘임진강전투’ 에 해병대장교로 참전, 처절한 전투를 치렀기 때문에 6?25당시의 전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장관의 이같은 세심한 배려는 방한했던 종군기자들이 새마을성금을 갹출하여 전달하는가 하면 그들이 귀국한 후에는 자기 나라의 신문에 ‘한국을 소개하는 칼럼’을 수회에 걸쳐 시리즈로 기고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기념비는 1977년 1월 완성되어 날씨가 추운 3월을 지나 4월27일에 제막식을 가졌다. 올해 40주년을 맞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