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여야 국회의원 이랬는데···조윤선·정범구 5년전 터키 순직군인 나란히 참배
[아시아엔=이상기 기자] 6·25하면 기억 대신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곳들이 있다. 국립현충원과 유엔군묘지 그리고 곳곳에 흩어져 있는 추념비가 그것이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전사한 분들의 혼을 기리는 기념공원이 있다. 국립현충원 정면에 들어서면 충성분수탑이 우뚝 서 있고, 금잔디가 깔린 광장을 지나 현충문과 현충탑이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현충탑 안에는 11만여 무명용사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 위패실과 납골당이 있다.
조국을 위해 이름없이 스러저간 영령들을 모신 곳이다. 국립현충원은 1954년 면적 약 142만㎡의 국군묘지로 착공되어 1957년에 준공됐다. 1965년 3월30일 대통령령에 의해 국립묘지로 승격해, 안장 대상자가 군인에서 국가 유공 민간인에까지 확대되었다. 서울 동작동 관악산 줄기에 있으며, 1985년 11월 대전시 갑동에 국립묘지 대전분소가 설치됐다. 1996년 6월 국립현충원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종군기자 추념비·서울대 전몰동문추모비 ‘눈길’
부산에 위치한 유엔군묘지에는 1951~54년 참전 21개국 유엔군 전사자 1만1000여명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벨기에,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그리스, 룩셈부르크, 필리핀, 태국 등 7개국 용사의 유해 및 다른 국가의 일부 유해가 조국으로 이장돼 유엔군부대에 파견 중에 전사한 한국군 36명을 포함하여 11개국의 2300구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
이 가운데 영국군이 885명으로 가장 많이 잠들어 있는데, 이는 영연방 국가 전사자들의 경우 숨진 곳에 묻히는 영국 풍습에 따른 것이다. 안장자 모두 전사자는 아니다. 미군의 경우 한국전 참전자 본인이 원할 경우 사후 이곳에 안장됐다. 또한 참전국들은 전쟁이 끝난 직후 병력을 철수한 게 아니라 얼마 더 한국에 머물렀는데 이 동안 불의의 죽음을 당해 이곳에 안장된 경우도 있다. 유엔군묘지는 1951년 1월18일 유엔군사령부가 조성해 1952년 4월 완공됐다. 이에 따라 그동안 개성, 인천, 대전, 대구, 밀양, 마산 등에 가매장되어 있던 한국전쟁 유엔군 전몰장병 유해 안장이 시작됐다. 1955년 11월 국회는 이 구역을 유엔에 영구히 기증하고 묘지를 성지로 지정할 것을 결의했다. 이어 다음달 유엔은 이곳을 영구적으로 관리하기로 유엔총회에서 결의했다. 2007년 10월24일 문화재청은 근대문화재로 등록 지정했다.
미국·터키 등 일부 참전국들은 자국에 한국전쟁 참전 전사자 기념공원을 조성하고 있다. 국내엔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터키 앙카라의 케말파샤 묘지 인근에 있는 도안베이 구역의 ‘한국공원’ 안 ‘한국전쟁참전기념공원’에는 6·25 전사자 700여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당시 터키에선 모두 1만5천여명이 참전했다. 이들 중에는 17살 안팎의 소년병도 여럿 있어 발길을 멈추게 한다. 2010년 2월 아시아기자협회 터키방문단 단장 이수성 전 국무총리는 이곳을 방문했을 때 “이들은 배를 타고 몇 달을 걸려 한국에 와 피를 흘리며 자유를 지켜냈다”고 추모했다.
당시 한국전 터키 병사들은 자신들에게 배급된 식량을 뜯지도 않은 채 한국의 고아와 노인들에게 나눠줬다고 한다. 미국 워싱턴 D.C 링컨기념관 바로 옆에는 한국군 참전용사기념공원이 있다. 19명의 미군 병사가 승리를 상징하는 V형 대형으로 전장을 행진하는 모습과 부조물에 새겨진 수많은 병사들의 모습은 전쟁의 처참함과 비장함을 함께 보여주고 있다. 19명은 육군 14명, 해군 3명, 해병특공대 1명, 공군척후병 1명을 나타낸다. 1995년 건립된 기념공원에는 특히 벽에 새겨진 “Freedom is nor free.”(자유는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니다)와 바닥에 새겨진 “알지도 못하는 나라,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을 지키려는 요청에 응해 전쟁에 참가한 미국의 아들과 딸들을 위해”라는 문구가 옷깃을 여미게 한다. 이곳의 석조물에 새겨진 숫자들 역시 6·25의 상처를 되새겨 주고 있다. 사망자(미군 54,246 유엔군 628,833) 실종자(미군 8.177, 유엔군 470,267) 포로(미군 7,140 유엔군 92,970) 부상자(미군 103,284 유엔군 1,064,453)를 나타내는 숫자가 바로 그것이다.
서울대 문화관 대강당 로비 벽면에 는 조그만 ‘전몰동문추모비’가 부조돼 있다. 재학중 군입대해 전장으로 나갔다 순직한 이들을 기리기 위해 서울대 개교 50주년인 1996년 10월 건립됐다. 이곳에는 29명의 전사자 이름과 학과 등이 알알이 새겨져 있다. 김종서 서울대 부총장은 “서울대출신들이 6·25전쟁과 베트남전쟁 등에서 조국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피흘린 사실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며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델로 삼아 재학생들에게 널리 알리려고 한다”고 했다.
한편 6·25 전쟁을 취재하다 순직한 기자를 추모하는 종군기자 추념비가 경기 파주시 파주읍 봉서리 산42 통일공원에 서있다. 1977년 건립된 이 비에는 자유세계 곳곳에서 달려온 종군기자들이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한국민과 유엔군의 투쟁과 희생정신을 생생히 기록해 전세계에 알리다 숨진 한국전 종군기자 18명의 명단이 적혀있다. 정전 62년, 3년여 한반도를 피로 물들인 한국전쟁의 상흔은 전국 어디에나 남아있다. 시신을 수습하지 못해 어느 산골짜기에 누워계신 영령도 수없이 많다. 60여년 전 온몸으로 지켜낸 조국을 그들은 지금 넋으로 남아 노심초사 굽어 살피고 있다. 그들이 숨져간 주변의 초목이 바로 비목이 되어 영령들의 숭고한 정신을 증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