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칼럼] ‘언론인 최석채’ 선생 100회 생신을 맞아

최석채 선생

[아시아엔=이상기 기자] 기자가 ‘언론인 최석채’를 처음 만난 것은 1981년 가을 군 복무 시절이었다. 최석채는 당시 <대구매일신문>에 칼럼을 쓰고 있었다. 요일은 잊었지만 매주 한 차례 실리는 그의 칼럼은 서술 퍼렇던 전두환 독재정부 초기 한 줄기 소나기였다.

갓 부대에 전입해 ‘너희 같은 대학물 먹은 놈들 때문에 우리가 작년 광주사태 때문에 얼마나 개고생했는지 아냐’며 욱박지르는 고참병들 눈치보기에 급급한 이등병 눈에게 최석채의 글들은 위안이자 피난처였다.

전두환 정부 초기 그가 어떻게 그런 글들을 쓸 수 있었는지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궁금하지 않다. 다만 그의 글들은 20대 중반 청년의 가슴에 깊이 박혀왔을 뿐이다.

당시 내 머릿속엔 그보다 7~8년 전 고교시절 청계천 헌 책방에서 사 읽은 ‘천관우 선생의 <言官史官>을 이곳 군대에서 다시 발견하다니···’ 하는 생각으로 가득차곤 했다.

30년이 훌쩍 지나 40년에서 더 가까운 ‘언론인 최석채 사건와의 만남’을 새삼 떠올린 것은 오늘이 그가 태어난지 꼭 100년 되는 날이어서다.

사실 나는 최석채 선생 생전에 그를 직접 만난 적은 한번도 없다. 그가 1991년 봄 별세했을 때 상가에서 뵈었을 뿐이다. 당시 그의 조선일보 영등포경찰서 출입기자였던 아들(최장원)의 타사 동료 기자들이 함께 밤을 새우며 고인을 추모했다. 요즘 식으로 생각하면 타사 기자 부친 상가에서 밤을 새운다는 것은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얘기로 들릴 것이다. 더욱이 한겨레신문 기자가 조선일보 기자 상가에서···. 하지만 그것은 앞서 고교시절 내게 천관우 선생이 <언관사관>을 통해 그랬듯, 기자의 길을 안내한 최석채 선생에 대한 조그만 보답이었다.

기자는 언론인 최석채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다. 이 글은 그의 삶 100년을 떠올리며 감사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쓰는 글이기에 굳이 많은 정보를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언론인 최석채에 관한 소개는 아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으로 대신한다.

글을 쓰는 도중 최장원씨에 아버님에 대한 기억을 물었다. 그가 이렇게 답을 보냈다. “이런 말씀하신 적이 있지요. ‘기자는 죽어 스크랩을 남긴다’ 기자는 글로 말하고, 죽어선 이름을 남긴다. 고로 돈 밝히지 말고 명예롭게 자존심 갖고 살라는 말씀으로 생각합니다.”

언론인 최석채가 오늘의 한국정치, 한국언론, 언론계 후배들을 보면 뭐라고 하실지 궁금하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실린 최석채 선생

다음은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실린 최석채 소개 전문이다.

호는 몽향(夢鄕). 경상북도 김천 출생. 1936년 일본 보통문관시험에 합격한 뒤 1940년 3월 일본 주쿄법률학교[中京法律學校]를 거쳐 1942년 8월 일본 주오대학[中央大學]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1977년 2월 경북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생애와 활동사항

1942년 3월부터 1945년 8월까지 동경에서 발행된 잡지 『호세이[法制]』의 편집기자를 한 적이 있고, 광복 후 대구에서 발행된 잡지 『건국공론』의 편집부장(1946.3.), 경북신문 편집국 차장(1946.7.)을 거쳐 1946년 12월대구에서 창간된 잡지 『부녀일보』의 편집국장을 지냈다.

건국 후에는 경찰관이 되어 성주·문경·영주 경찰서장 등을 역임하다가 6·25전쟁 중 부산에서 일어난 5·26개헌파동 소식을 듣고 사표를 냈다. 1954년 대구일보 편집국 부국장에 취임하였다가 이듬해 2월 대구매일신문사로 옮겨 편집국장이 되었으며, 6개월 후인 5월부터 주필직을 맡았다.

1955년 9월 자유당 정권이 정치행사 때마다 학생들을 동원하여 학업에 지장을 주고 있으므로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는 사설을 쓴 것이 필화가 되어 신문사는 백주에 테러를 당하고, 그는 구속되었다가 30일간 옥고를 겪고 출감한 뒤 법정투쟁 끝에 1956년 5월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1959년 10월 조선일보 논설위원이 되어 4·19혁명을 전후한 시기에 언론투쟁을 전개하였다. 1960년 3월 17일자에 그가 쓴, 3·15부정선거를 규탄한 사설 「호헌구국운동 이외의 다른 방도는 없다」는 명논설이라는 평을 받았다.

1960년 9월 경향신문 편집국장에 취임하였다가 1961년 1월 다시 조선일보 편집국장이 되었으며, 10월 논설위원으로 자리를 옮겨 1965년까지 재임하며 주필직을 맡았다. 1964년 4월 신문편집인협회 부회장에 피선되어 언론파동 때는 언론윤리위원회법 반대투쟁위원회 실행위원의 핵심으로 앞장서서 악법을 반대하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조선일보 주필이 된 지 10개월 후인 1966년 4월 신문편집인협회 제3대 회장에 선출되어 1971년 1월까지 재임하는 동안 협회의 지위를 크게 향상시켰다.

조선일보 논설위원과 주필로 재임하는 동안에는 5·16군사정변의 기세를 업고 현역군인들 80여 명이 당시 최고회의 건물 마당에서 군사혁명 지지 및 민정참여를 촉구하는 데모를 하자 사설 「일부 군인들의 탈선행동에 경고한다」(1963.3.16.)를 1면 제호 바로 옆에 4호활자로 싣는 신문사상 파격적인 집필을 하였으며, 이어서 「비상사태임시조치법」으로 정치비판이 봉쇄되자 무사설 12일간(3.17.∼3.28.)을 관철시켰다.

1971년 12월 또 하나의 악법인 「국가보위법」이 국회에서 날치기 통과되자 이에 대해 지지 보도를 하라는 정부의 압력을 받았으나 굴하지 않고 주필직을 사임하였다. 1972년 4월 문화방송사 회장에 취임하였는데, 1974년 5월 문화방송사와 경향신문사가 통합되면서 회장이 되어 1980년 7월까지 재임하였다.

그 사이 5·16장학회 이사장, 아시아신문재단 한국위원회 위원장도 맡았다. 1981년 4월부터 1987년 4월까지 대구매일신문사 명예회장으로 6년 동안 「몽향칼럼」을 계속 집필하였고, 성곡(省谷)언론문화재단 이사장을 겸임하였다. 1988년 11월 문화방송사 회장으로 선임되었으나 오래 재임하지는 못하였다.

저서로는 『서민의 항장(抗章)』(1956)·『일제하 명논설집』(1975)·『한국의 신문윤리』(공저, 1965 )·『속 서민의 항장』(1990) 등이 있다. 별세 후 한국신문편집인협회에서 본적지인 김천시 조마면에 추모비를 건립하고, 그가 생전에 쓴 글을 엮은 『지성감민(至誠感民)』·추모문집 『낙동강 오리알』을 출판하였다. 1952년 화랑무공훈장, 1971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언론 부문), 1977년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최석채 선생(왼쪽)과 김수한 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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