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오신날-아시아불교 27] 캄보디아③’불교 전성기’ 앙코르와트 유적
3일은 불기 2561년 부처님오신날입니다. <아시아엔>은 부처님의 자비와 은혜가 독자들께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아시아엔>은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스리랑카·미얀마·태국·캄보디아·라오스·인도네시아·베트남 등 아시아 각국의 불교의 어제와 오늘을 <불교평론>(발행인 조오현)의 도움으로 소개합니다. 귀한 글 주신 마성, 조준호, 김홍구, 송위지, 양승윤, 이병욱님과 홍사성 편집인 겸 주간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편집자)
앙코르 왕조(802~1431)
[아시아엔=송위지 성원불교대학장, 을지대 교수 역임]?9세기 들어 자바 즉 말레이, 자바, 수마트라를 지배하던 스리비자야로부터 돌아온 자야와르만 2세(802~850)가 이 지역을 통일하고 크메르 왕국을 세웠다. 요즘도 캄보디아를 부르는 다른 이름은 크메르이다. 크메르는 산(山)이라는 뜻으로 이는 프놈펜의 프놈과 같으며 첸라 시절의 북부 산지의 육지 첸라와 관계가 있다. 9세기에 시작하여 13세기까지 전성기를 이룬 왕조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자야와르만 2세는 802년 자바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국임을 내세우기 위해 스스로 신으로부터 왕권을 전수했다는 데와라자(Deva R?ja) 의식을 거행했다.
데와라자 의식의 거행은 대승불교의 최고 이상 중 하나인 보살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는 사상을 내포하는 것으로, 주변 강대국에 대하여 크메르 왕국의 독립을 선포하는 의미와 함께, 데와라자 사상을 구체화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민중을 결집시키는 데 용이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자야와르만 2세의 통치는 캄보디아의 큰 호수 톤레사프 북쪽을 중심으로 주변의 여러 왕조를 차례로 복속시켜 나갔다.
당시의 수도는 불교유적으로 유명한 앙코르톰이다. 본시 앙코르라는 말은 캄보디아 방언인 ‘노코르(nokhor)’에서 온 말로 산스끄리뜨의 ‘국가(國家)’나 ‘도읍(都邑)’을 의미하는 ‘나가라까(n?ga-raka)’에서 온 말이다. 크메르 왕조의 터전을 다진 자야와르만 2세는 불교와 함께 힌두교도 동시에 숭상해 두 종교가 공존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크메르에서 캄보디아로 국호를 바꾼 인드라바르반(877~889)은 ‘대왕도(大王都)에 있는 사원’이라는 뜻을 지닌 앙코르와트(Ankor Wat)의 건설을 시작하였다. 왕들이 앙코르와트의 건설을 시작한 것은 그들의 정령숭배 신앙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즉 그들은 왕 자신이나 그들의 가족인 왕족이 죽으면 그들이 믿던 신과 죽은 이가 합일한다는 신앙을 가졌으며 그 결과 앙코르와트의 건설이라는 역사(役事)로 이어진 것이다.
이후의 왕들은 개인적으로는 주로 힌두교를 신앙하였으나 제상을 비롯한 여러 신하에 불교도를 기용하였으며 각종 불사를 후원하기도 했다. 왕실의 이런 이중적 신앙 형태는 힌두교의 시바 신과 불교를 함께 신봉하는 캄보디아 특유의 종교 양식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인드라바르만의 아들 야쇼와르만 1세(889~900)는 수도를 하리하라에서 앙코르톰으로 옮기고 수도의 이름을 ‘야소다라의 도시’라는 뜻의 야소다라푸라라고 하였다. 자신의 이름을 따라 도시의 이름을 지은 것이다.
이때 캄보디아는 동쪽으로는 지금의 베트남 남부인 참파와 서쪽으로는 타이족을 누르고 버마와 경계를 접하며 인도차이나반도의 대제국이 되었다. 특히 라젠드라와르만 2세(944~966)의 경우 열렬한 브라민 계통의 신자였으나 불교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 열심히 불경 공부를 하였다. 후에 왕이 되어 불교의 초석을 다지고 보살폈던 카윈드라아리마타나는 라젠드라와르만 2세의 신하였다. 이 시기에 스리랑카의 폴론나루와 왕조의 도움으로 세워진 사찰인 랑카위하라는 캄보디아의 대표적인 상좌부불교 사원이다.
1002년 왕위에 오른 수리야와르만 1세(1002~1050)는 그동안 계속 신봉하던 혼합 신앙 형태를 버리고 불교를 국교로 선포하여 상좌부불교의 전통만을 채택하였다. 전제군주의 통치기에 왕의 종교 성향은 한 종교의 흥망을 좌우하는 중요한 조건이 된다. 캄보디아의 불교 역시 수리야와르만 1세의 종교 성향에 힘입어 크게 발전하였다. 수리야와르만 1세는 상좌부불교와 대승불교의 차이를 잘 알고 있을 정도로 불교에 조예가 깊었으며 당시 주변에 살던 몬족들도 상좌부불교를 신봉했다.
수리야와르만 2세(1113~1145)는 참파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북쪽으로는 중부 라오스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메남 강 하류와 베트남 통킹의 이조(李朝)까지 공격하여 캄보디아 사상 최대의 영토를 확보했다. 또한 이 시기에 앙코르와트를 완성하여 캄보디아 문화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앙코르와트는 12세기 초에 건립되었으며 앙코르는 왕도를 뜻하고 와트는 사원을 뜻한다. 당시 크메르족은 왕과 왕족이 죽으면 그가 믿던 신과 합일한다는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왕은 자기와 합일하게 될 신의 사원을 건립하는 풍습이 있었다. 앙코르와트는 앙코르 왕조의 전성기를 이룬 수리야와르만 2세가 브라만교의 비슈누와 합일하기 위하여 건립한 바라문교 사원이었다. 후세에 이르러 불교도가 브라만교의 신상을 파괴하고 불상을 모시게 됨에 따라 불교사원으로 보이기도 하나 건물·장식·부조 등 여러 면에서 브라만교 사원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이 사원의 뛰어난 미술적 건축 양식은 인도의 영향도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건물의 형태나 석조 장식 등 모든 면에서 앙코르 왕조의 독자적인 양식을 지니고 있다.
자야와르만 5세의 신하 키르티판디타는 불교 신도로서 다른 나라들로부터 전래해온 불교 문학과 철학에 깊은 조예를 보였다. 이후 캄보디아는 세력이 약해져서 1177년에는 참파의 공격을 받아 수도가 함락되었으나 캄보디아의 아쇼까 왕 또는 전륜성왕이라고 불리는 자야와르만 7세(1181~1220)가 즉위하면서 캄보디아는 다시 흥기하여 참족을 몰아내고 참파를 다시 17년간 지배하는 등 마지막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자야와르만 7세는 수도를 재건하여 앙코르톰(Ankor tom)이라 불렀다. 그는 관세음보살을 숭배하여 스스로를 ‘보살’이라고 일컬었으며, 오늘날 ‘앙코르의 미소’ 또는 ‘크메르의 미소’라고 알려진 독특한 미소를 머금은 입술과 눈을 반쯤 뜬 채 아래로 향한 선정에 든 형태의 눈, 많은 머리를 가진 기념상들을 각지에 세웠다. 이 조각들은 크메르 불교미술의 대표작으로 크메르인들은 자신들을 불행으로부터 지켜주기 위해 온 보살이라고 믿었다.
자야와르만 7세가 세운 또 다른 사원으로는 1186년 세워진 타프롬 사원이 있다. 이 사원에는 스스로를 보살이라고 칭했던 자야와르만 7세의 어머니(황태후) 즉 보살의 어머니상이 세워져 있으며, 자야와르만 7세의 전지전능을 찬양하는 글이 새겨진 비문이 있다. 모계를 찬양하는 타프롬 사원 외에도 자야와르만 7세는 부계를 찬양하는 사원인 프레아칸(Preah Khan)을 지어 보살에게 헌공하였다. 이런 불교적 치세와 함께 자야와르만 7세는 백성들의 국리민복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 주요 도로를 만들고 병원을 지었다.
한편 왕은 외국과의 불교 교류에도 힘써 아들 타말린다를 스리랑카에 파견하여 스리랑카의 마하비라 사원에서 승려로서 득도하고 빠알리 경전을 수학하고 정통 상좌부불교를 공부하게 하였다. 특히 자야와르만 7세의 왕비였던 자신의 여동생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왕비가 된 인드라데위는 타이에서 도입된 상좌부불교를 깊이 수행하였다. 그녀는 계급에 대한 편견을 갖지 않아서 낮은 계급 출신의 나젠드라퉁가, 틸락그다라, 나렌드라슈라마를 비구니로 득도시켜 공경하였다. 이들 비구니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 설화를 담은 <자타카>를 연극화하기도 했다.
14세기에 상좌부불교가 완전히 정착한 캄보디아는 불교를 통해 이웃 국가와 선린외교를 펼쳤는데 특히 라오스와 활발한 교류를 했다. 라오스의 왕 화농과 캄보디아의 공주가 결혼하였는데 캄보디아에서 상좌부불교를 교육받은 공주의 영향으로 라오스 왕실은 물론 라오스 전국에 걸쳐 상좌부불교가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고 불기 1967년(서기 1423년)에는 마하나나시디를 좌장으로 하는 8명의 캄보디아 승려가 스리랑카의 승려를 은사로 하여 구족계를 받았다.
그러나 14세기 들어, 3차에 걸친 타이족의 앙코르톰 공격으로 앙코르와트는 쇠락하기 시작했다. 특히 캄보디아의 서쪽 즉 지금의 태국에서 아유타야 왕조(1350~1569)가 강해지자, 캄보디아인들은 1431년 수도를 프놈펜으로 옮기게 되면서, 마침내 전성기를 구가하던 앙코르와트 시절을 마감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