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오신날-아시아종교 20] 태국②···몽꿋의 ‘탐마윳띠까니까이 운동’
3일은 불기 2561년 부처님오신날입니다. <아시아엔>은 부처님의 자비와 은총이 독자들께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아시아엔>은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스리랑카·미얀마·태국·캄보디아·라오스·인도네시아·베트남 등 아시아 각국의 불교의 어제와 오늘을 <불교평론>(발행인 조오현)의 도움으로 소개합니다. 귀한 글 주신 마성, 조준호, 김홍구, 송위지, 양승윤, 이병욱님과 홍사성 편집인 겸 주간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편집자)
아유타야 왕국(Ayuthaya, 1350~1767)
[아시아엔=김홍구 부산외국어대 동남아창의융합학부 교수] 쑤코타이 왕국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우텅(U-thong) 왕국은 1350년 독립 선언 후 아유타야 왕국을 건설했다. 417년의 역사를 유지하게 되는 아유타야 왕국은 33명의 왕이 통치했으며 상좌부불교가 크게 번성했다. 아유타야 시 안팎에는 교육, 병원, 회합의 장소가 되었던 수많은 사원과 파고다가 만들어졌으며, 불교는 국민의 정신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 건축과 불상 건립 등 불교예술도 번창했다.
초기 아유타야 왕국(14세기 중엽~15세기 말)의 불교 발전은 뜨라이록까낫(Tralokkanat, 1448~1488) 왕 때부터 이루어졌다. 그는 재위 기간이 40년이나 돼, 이 시기에 불교 발전이 공고해질 수 있었다. 뜨라이록까낫 왕은 쑤코타이 불교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그의 왕비는 쑤코타이 탐마라차 4세(Phra Maha Thammaracha IV, 1419~1438)의 딸이었다. 람캄행 대왕 이후 탐마라차 4세까지 쑤코타이의 왕들은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이런 영향을 받아서 뜨라이록까낫 왕은 불심이 돈독했다.
그는 부왕(副王) 시절과 왕이 된 후 두 차례나 과거 아유타야의 식민지였던 쑤코타이를 직접 관리했던 핏싸누록(Phitsanulok)에서 통치했다. 핏싸누록은 불교왕국 쑤코타이의 잔재가 강력히 남아 있던 곳이다. 이런 사정도 그의 불심을 돈독하게 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뜨라이록까낫 왕은 중요한 불교 업적을 많이 남겼다. 그는 원래 사용하던 왕궁을 사원으로 만들도록 하고 왕궁을 롭부리로 옮겼는데 이 사원이 왓프라씨싼펫(Wat Phra Si Sanphet)이다. 그는 3년에 걸쳐(1458~1460) 500개의 보살상을 주조했으며, 핏싸누록의 쭐라마니(Chulamani) 사원 등을 신축하고 수많은 사원을 복원시켰다. 그는 쭐라마니 사원에서 2388명의 귀족, 왕족과 함께 수계를 받았는데, 이는 아유타야 왕조 개국 이래 가장 큰 수계식이었다. 왕은 8개월 15일 동안 이 사원에서 승려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의 수계는 이웃나라들에도 자극이 되어 홍싸와디(Hongsawa-di)의 탐마쩨디(Thammachedi) 왕은 승려들을 실론에 보내서 새롭게 수계를 받게 했으며, 귀국 후에는 새로운 종파를 만들게 했다. 치앙마이 왕국의 띠록까랏 왕은 뜨라이삐독(Traipidok, 삼장) 결집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뜨라이록까랏 왕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는 쑤코타이의 리타이 왕과 여러 가지 면에서 유사했다. 그는 <마하찻캄루엉(Mahachatkhamluang)>이라는 작품도 썼다. 이 책은 부처의 일대기로서 아유타야 왕국 최초의 불교문학 작품이다.
중기 아유타야 시기(15세기 말~18세기 중엽)에 해당하는 쏭탐(Song-tham, 1610~1628) 왕 때 태국 승려들은 실론으로 유학을 많이 갔는데 실론에 가서 부처의 발자국을 찾아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실론의 승려들로부터 태국에도 다섯 곳에 부처의 발자국(佛足跡)이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쏭탐 왕은 불족적을 찾아보도록 지시해 싸라부리(Saraburi) 도지사로부터 다음과 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사냥꾼이 사냥을 나갔다가 사슴을 쏘았다. 사슴은 도망을 갔으며 사냥꾼은 사슴을 쫓았다. 사슴은 상처를 입은 채 동굴로 숨어들어 갔다. 잠시 후 동굴에서 나온 사슴은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 이상하게 여긴 사냥꾼이 동굴로 들어갔을 때 발자국을 발견했는데 그 속에는 물이 고여 있었으며 그 물은 신비하게도 치료의 능력이 있었다. 사냥꾼은 그의 오래된 상처에 물을 바르게 되었는데 상처가 씻은 듯이 나았다.”
이후 쏭탐 왕은 실론 승려들의 이야기가 진실이라고 확신하게 되어 토지를 하사해 불족적을 안치할 4각형의 구조물을 만들고 매년 음력 3월과 4월에 참배하도록 했다. 불심이 돈독한 쏭탐 왕은 삼장을 빠알리어로 가르쳤으며 궁정은 불교 교육의 장이 되었다.
나라이(Narai, 1656~1688) 왕 때는 불교 시험이 처음으로 치러졌다. 승려에게 자격을 부여하기 위한 시험이었다. 도시 승려(town-dwelling)인 캄마와씨(Gamavasi)는 시험에 응한 반면, 산림 승려(forest-dwelling)인 아란야와씨(Ara??avasi)는 국가가 주도하는 시험에 반대했다. 시험을 치른 후 많은 무자격 승려들이 승적을 박탈당했다.
말기 아유타야 왕국(18세기 중엽 이후)의 버롬마꼿(Borommak-ot, 1733~1758) 왕은 실론에 태국 승려들을 파견해 실론 승려들에게 오히려 수계를 주기도 했다. 실론은 포르투갈의 식민통치를 경험하면서 가톨릭화되고 사원과 불탑, 삼장 등이 파괴되었다. 불교를 다시 부흥시키고자 했으나 비구승은 없고 사미승만 남아 있어 수계식을 갖지 못했다. 버롬마꼿 왕은 우빨리(Upali)를 단장으로 하는 16명의 승려를 파견해 실론불교의 부흥을 꾀했으며 삼장과 금불상을 선물로 보내기도 했다. 우빨리와 사절단은 실론에서 3년 동안 거주하며 700명의 승려와 3000명의 실론 사미승에게 계를 내렸고, 우발리는 그곳에서 사망했다.
이들은 실론 불교 최대의 종파인 우빨리파(Upali-vamsa, Siam-vamsa)를 만들었다. 버롬마꼿 왕 때 관리들은 일시적으로 승려생활을 하지 않으면 고위직에 임명될 수 없었다. 엑까탓(Ekathat, 1758~1767) 왕 때인 1759년에는 실론에 2차 사절단(Visuddhacariya, Varananamuni)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랏따나꼬신 왕국(Rattanakosin, 1782~현재)
랏따나꼬신 왕국(Rattanakosin) 들어 라마 4세 몽꿋(Rama Ⅳ, Mongkut, 1851~1868) 왕은 탐마윳띠까니까이(Thammayutikani-kai) 종파를 만들어 불교를 근대화시키고, 라오스와 캄보디아 불교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몽꿋은 태국이 서양과 접촉하는 근대화 과정에서 정치·사회적 근대화와 함께 불교개혁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는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나 장 칼뱅(Jean Calvin)의 종교개혁과 같이 상좌부불교의 근본적인 개혁을 급진적으로 추진했다. 몽꿋은 왕위에 오르기 전 27년 동안 승려생활을 하면서 빨리어 경전 연구에 심취했으며 경전과 태국 승려들의 실제 관습 사이에 상이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또한 승려생활을 하는 동안 서양 선교사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신지식을 획득하여 서구의 합리주의 사상을 갖게 되었다. 몽꿋은 오랜 전통이 있는 몬(Mon)불교 관습이 원래의 불교 관습과 가깝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몬불교를 모델로 설정한 후 자신과 유사한 신념을 가진 승려들을 모아서 기존의 태국불교 종파인 마하니까이(Mahanikai)와는 다른 탐마윳띠까니까이(Thammayutikanikai)를 만들었다.
몽꿋의 탐마윳띠까니까이 운동은 경전주의(scriptu-ralism), 주지주의(intellectualism), 합리주의(rationalism)를 특징으로 삼았다. 이 운동은 두 가지의 중요한 결과를 초래했다. 첫째, 서구과학에 일치하는 불교의 재해석 시도는 전통불교에 인식론적 변화를 가져왔다.
몽꿋의 개혁운동은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불교 세계관을 새로운 방식으로 인식하도록 만들고, 사회개혁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둘째, 당시에 지역적으로 나누어진 다양한 불교 세력들의 이단적 교리해석을 거부하고 탐마윳띠까니까이를 중심으로 한 종교적 절대주의(a religious absolutism)를 구축했다. 더 나아가 국왕이 절대권을 갖는 정치체제를 정당화했다.
몽꿋 왕의 탐마윳띠까니까이 불교개혁운동을 이어받은 사람은 태국의 근대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한 그의 아들 쭐라롱껀(Rama V, Chulalongkorn, 1868~1910) 대왕이다. 당시 태국에서는 서구 열강의 식민주의 침투가 노골화되었으며 이는 국가안정과 왕권에 대한 큰 위협 요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쭐라롱껀 대왕은 통치체제와 왕권의 강화 필요성을 절감하고 탐마윳띠까니까이를 새로운 사회적, 종교적 이데올로기 도구로 사용해 근대화와 개혁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근대화 작업의 일환으로 쭐라롱껀 대왕은 교육개혁을 시행했다. 근대 이전 태국의 교육은 보통 사원에서 행해졌는데, 쭐라롱껀 대왕은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이 같은 전통적인 사원 교육에 주목했다. 교육 프로그램의 진흥을 승가가 주도하게 되면서 보다 효율적으로 계획을 수행하기 위하여 전국적인 승가 조직의 필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1902년 태국 최초의 승가법을 제정했다. 승가법은 정부의 중앙집권식 행정체제의 모델을 따른 것으로 종교의 수호자로서 국왕의 권위를 전국적으로 확대시키고 승가의 중앙집권적 위계질서를 확립시켰다.
이러한 승가와 정치권력의 밀착은 쭐라롱껀 대왕의 통치에 대한 정당성을 확고하게 해주고, 그의 정부를 정의롭고 자비로운 정부로 자리매김하게 해주었다.
1902년, 승가법에 따른 승가의 중앙집권적 행정체제는 쌍카랏(승완, 僧王)이 이끄는 마하테라싸마콤(Mahatherasamakhom, 원로회의)이 모든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는데 이는 4개 지역의 승가 행정 대표와 행정부 대표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모두 왕이 직접 임명하였다. 4개 지역 중 3개 지역은 중부(Khana Klang), 남부(Khana Tai), 북부(Khana Nua) 지역을 의미하지만, 나머지 한 개는 지역이 아니라 탐마윳띠까니까이(Khana Thammayutika)를 의미한다.
태국은 동남아의 어떤 상좌부불교 국가보다도 국가권력과 승가와의 관계가 밀접하다. 그것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 승가법이다. 1902년 이래 승가법은 세 차례의 개정을 거쳤는데, 국가권력의 정치적 목적을 실현시키려는 의도에 부응해 개정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1902년 최초의 승가법은 라마 5세의 근대화 정책 일환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승가는 근대화된 관료체제의 통제하에 고도로 중앙집권화된 조직이 되었다.
1932년 입헌혁명 이후 만들어진 1941년의 승가법은 입헌혁명의 영향을 받아 승가의 구조를 민주화하고, 국가로부터 보다 많은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게 했다. 1962년의 승가법은 싸릿의 권위주의 정치체제 구축과 국가개발에 부응한 것으로 승가는 정부의 강력한 통제를 받으며 중앙집권화되었다.
현재 태국은 민주적인 정치체제를 유지하고 있음에도, 기본적으로는 권위주의적인 1962년 승가법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1990년대 이후 정치가 세속화되고 불교도 점차 탈정치화하고 있기 때문에 불교가 세속적 정치권력의 형태를 반영하고 있는가에 관한 관심이 없어졌기 때문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1962년 승가법 제정 이후 지금까지 승가법은 1992년과 2004년 두 차례 개정되었는데, 1990년 이후 승가법은 정치적 기능보다는 종교적 기능에 충실하면서 변화해 왔다고 볼 수 있다. 구체적인 예는 개정 승가법의 내용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92년 승가법의 중요 개정 조항은 쌍카랏(승왕) 임명에 관한 것이다. 즉 “쌍카랏의 직이 공석일 때 총리는 마하테라싸마콤(원로회의)의 동의로 쏨뎃프라라차카나(Somdet Phra Ratchakhana) 중 연장자의 이름을 국왕에게 제출해서 쌍카랏을 임명한다”고 되어 있다.
태국에는 국왕이 고위직 승려들에게 위계(Samanasak, 싸마나싹)를 수여하는데, 쏨뎃프라라차카나는 가장 높은 직에 있는 10명의 원로승려다. 그 밑의 위계를 프라라차카나(Phra Ratchakhana)라고 부른다. 프라라차카나는 5등급으로 나뉘는데 이에 속하는 승려 수는 500명이 넘는다. 성직에 따른 쏨뎃프라라차카나 중 연장자가 직무를 수행하지 못할 때 총리는 마하테라싸마콤의 동의로 차순위의 쏨뎃프라라차카나의 이름을 국왕에게 제출해 승왕에 임명한다. 이는 국왕의 쌍카랏 임명권이 제한되고 대신 마하테라싸마콤의 권한이 증대됐음을 의미한다. 2004년 승가법은 승왕이 병석에 눕자 그 직무를 대신할 7명의 고위 승려(쏨뎃프라라차카나)로 구성된 위원회를 임명했다. 이는 대행을 한 명으로 할 경우 분란의 소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승가법 개정은 태국 사회의 변화를 반영한 승가 자체의 필요성에 의한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국가권력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서 실시되었던 과거 승가법 개정과는 성격이 다르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승가 행정체제는 중앙집권형이다. 모든 권한은 원로회의 21명(승왕, 마하니까이 10명, 탐마윳띠까니까이 10명)에 집중되어 있다. 그 밑에 5개 행정지역(Administrative Sectors)을 담당하는 짜오카나야이(Chao Khana Yai)는 중부, 북부, 남부, 동부의 4개 지역과 탐마윳띠까니까이 각 1명씩 모두 5명으로 구성된다. 지역 행정체제를 살펴보면 승가 지역 담당자(Chao Khana Phak)는 두 종파에서 각각 18명(지역은 몇 개의 도를 8개의 지역으로 묶은 것을 의미함)으로 구성되며, 승가 도지사(Chao Khana changwat)는 두 종파 각각 77명(전체 도는 77개, 각 도 1명씩)으로 구성된다. 한편 짜오카나야이 밑으로는 마하니까이와 탐마윳띠까니까이가 독립적으로 종단을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