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오신날-아시아불교 17] 미얀마④···아웅산·우누, 독립운동 및 ‘불교사회주의 국가’ 수립
3일은 불기 2561년 부처님오신날입니다. <아시아엔>은 부처님의 자비와 은총이 독자들께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아시아엔>은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스리랑카·미얀마·태국·캄보디아·라오스·인도네시아·베트남 등 아시아 각국의 불교의 어제와 오늘을 <불교평론>(발행인 조오현)의 도움으로 소개합니다. 귀한 글 주신 마성, 조준호, 김홍구, 송위지, 양승윤, 이병욱님과 홍사성 편집인 겸 주간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편집자)
[아시아엔=조준호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교수, 동국대·인도 델리대 불교학과 석박사, BK 21 불교사상연구단·동국대 불교학술원 전임연구원, 한국외대 인도연구소 연구교수 역임. 주요논문 ‘대승의 소승폄하에 대한 반론’ ‘위빠사나 수행의 인식론적 근거’ 등. <우파니샤드 철학과 불교> 저자, <인도불교 부흥운동의 선구자-제2의 아소카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 역자]
미얀마 독립에 크게 역할을 한 또 다른 단체는 1930년 학생들을 주축으로 조직되었는데, 자신들의 이름 앞에 ‘떠킹(Thakin)’이라는 단어를 붙였다. ‘떠킹’은 미얀마 말로 주인이란 뜻으로 꺼인(Kayin), 까친(Kachin) 그리고 샨(Shan)족 출신 병사들이 영국군 장교를 ‘떠킹’으로 여기고 있는 것에 반발하여 ‘미얀마인이 주인’이라는 의식을 심어주기 위하여 이름 앞에 떠킹을 붙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전국을 돌면서 강한 민족의식과 독립의식을 고취했고 1940년에는 출가 스님들도 이러한 운동에 동참하였다. 이들은 교육 문제와 관련하여 학생파업을 주도하기도 했는데, 이 운동의 지도자는 마웅 아웅 산(Maung Aung San)과 마웅 누(Maung Nu)였다. 아웅 산은 후일 미얀마 독립을 이끈 인물이 되고 마웅 누는 미얀마의 초대 수상이 되었다.
직전 식민국 영국 손잡고 일제로부터 독립
미얀마청년불교도연맹(YMBA)은 1917년과 1919년 미얀마의 자치권을 얻기 위해 인도와 영국에 가서 활동하였으나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인도에는 자치제를 허용한 반면, 미얀마에는 허용하지 않은 영국에 대한 국민의 불만은 더욱 고조되어 불교가 앞장선 종교적 투쟁보다는 종교와 분리된 정치적 투쟁으로 점차 선회하였다.
1930년대 말기에 이르러 스님들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주의 운동이 점차 젊은 학생들이 주도하는 투쟁으로 방향이 옮겨갔다.
1942년 3월에 이르러 미얀마는 다시 일본의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일본군이 진입한 시기에 일본은 미얀마 내 일본에 대한 국민적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도쿄에서 열린 ‘대동아불교대회(Great-er East Asia Buddhist Conference)’에 미얀마 불교도를 초청하였다. 그리고 미얀마가 형제의 나라이며 같은 불교국임을 주지시키기 위해, 양곤에 새 파고다를 건립하고 불사리를 봉안하여 미얀마인의 인심을 얻고자 노력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이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이란 구호 속에 미얀마를 다시 종속시키려는 의도를 보이자, 아웅 산은 일본군과 함께 퇴각시켰던 영국을 다시 끌어들여 1945년 3월 27일 일본군을 미얀마에서 몰아냈다. 미얀마는 이날을 미얀마의 ‘국군의 날’로 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마침내 1945년 8월 28일,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함으로써 미얀마는 약 3년 남짓한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 다시 영국의 영향권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미얀마 독립을 위한 아웅 산과 영국과의 협상이 성공하여 드디어 1948년 1월 4일에 완전한 독립을 맞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안타깝게도 아웅 산(Aung San, 1915~1947)은 독립을 보지 못한 채 반대파에게 암살당했다.
불교와 관련한 아웅 산의 입장을 살펴보면, 1940년 아웅 산은 불교를 앞세운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견지에서 정치와 종교는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종교는 정치와 본질적으로 달라 함께하면 종교의 순수성이 떨어질 것을 우려한 것이었다.
슈마허 ‘작은 것이 아름답다’ 모델 국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우 누(U Nu)를 중심으로 하는 ‘버마연방공화국’의 가장 중요한 사안은 불교사회주의와 불교국교화 문제였다. 독립 후에도 미얀마가 불교를 중요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우 누의 불교관에서도 잘 나타난다. 우 누 수상은 영국 식민지배 기간에 생긴 미얀마의 대립과 무질서를 불교를 통해 바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사회주의를 불교적 입장으로 수용하는 것을 강조했는데, 불교와 사회주의는 유사점이 있어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다고 보았다. 나아가 경제적 평등을 이루고 욕망을 절제하여 많은 휴식과 명상으로 해탈로 나아가야 함을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경제이념은 ‘불교경제(Buddhist Economics)’라고 불렸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은 것이 아름답다>를 쓴 경제학자 E. F. 슈마허(1911~1978)가 우 누의 경제 자문역이었다. 그가 1955년 미얀마를 방문했을 때, 소득수준은 낮지만 행복한 삶을 사는 미얀마 사람들을 보고 체득한 새로운 경제철학 저서가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고 한다.
우누는 사회주의도 종교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어야 함을 강조하며 자신의 불교사회주의를 민주주의와 조화를 이루려고 시도했다. 특히 개인의 의지와 자유를 존중하는 불교와 민주주의는 서로 부합한다는 견해를 자주 표명했다. 또한 경제문제에서 사회주의 경제정책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영국 식민지배로 인해 미얀마인보다는 영국인, 인도인, 중국인 등 외국인들이 미얀마 경제권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도입이 필요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누는 초대 수상으로서 불교철학을 중심으로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를 접목하여 미얀마 연방을 새롭게 건설해 보려고 하였다. 우 누는 네 윈과 같은 ‘30인 지사’의 일원은 아니었지만, 독립 후 최초의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어 미얀마연방의 수상에 취임했으며 다시 1960년에도 2대 수상으로 취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