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오신날-아시아불교 16] 미얀마③···영국지배 맞서 옥뜨마 스님 등 ‘참여불교’ 큰 역할

옥뜨마(U Ottama) 스님

3일은 불기 2561년 부처님오신날입니다. <아시아엔>은 부처님의 자비와 은총이 독자들께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아시아엔>은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스리랑카·미얀마·태국·캄보디아·라오스·인도네시아·베트남 등 아시아 각국의 불교의 어제와 오늘을 <불교평론>(발행인 조오현)의 도움으로 소개합니다. 귀한 글 주신 마성, 조준호, 김홍구, 송위지, 양승윤, 이병욱님과 홍사성 편집인 겸 주간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편집자)

영국의 식민지배와 독립운동

[아시아엔=조준호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교수, 동국대·인도 델리대 불교학과 석박사, BK 21 불교사상연구단·동국대 불교학술원 전임연구원, 한국외대 인도연구소 연구교수 역임. 주요논문 ‘대승의 소승폄하에 대한 반론’ ‘위빠사나 수행의 인식론적 근거’ 등. <우파니샤드 철학과 불교> 저자, <인도불교 부흥운동의 선구자-제2의 아소카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 역자] 

1886년 1월 1일, 영국령으로 선포된 미얀마는 다시 영국령 인도의 한 주(州)로 편입되었다. 영국은 ‘분할통치(divide & rule)’ 방식을 택하여, 미얀마의 지배민족인 버마족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산간이나 주변부의 소수종족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고 했다. 오래전부터 미얀마에 들어와 선교하려 했으나 쉽게 개종을 이끌어내지 못하던 기독교 선교사들은, 불교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적고 부족의 토속신앙이 강한 문맹의 산악 지역의 사람들을 개종시켰다. 영국은 이렇게 개종한 주민들을 미얀마 식민통치의 부역자로 이용하였다.

현재도 기독교로 개종한 지역의 부족은 분리독립을 위해 중앙정부와 계속해서 충돌을 빚고 있어 미얀마 정국을 불안케 하는 주요한 요인 중 하나가 되고 있다. 인도에서 이주해온 이슬람교와 함께, 미얀마의 종족 간, 종교 간 갈등과 반목을 초래한 역사적 배경이 바로 기독교 개종이라고 할 수 있다.

미얀마 민족주의 운동은 1916년 영국인들이 불교사원에 신발을 신고 들어온 행위가 계기가 된 것으로 유명하다. 원래 인도를 비롯하여 동남아 불교권에서는 사찰 내에서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것이 기본 예의다. 성스러운 장소에 신발을 신고 들어가는 것은 대단히 불경스러운 실례를 범한 것으로 간주한다. 영국인들의 이러한 무례에 청년불교도연맹은 영국 식민당국에 사원 내의 탈화(脫靴)를 법적으로 규정해 달라고 성명서를 냈으나 거절당했다. 이에 스님들은 성명서에 서명하는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다시 1919년 유럽 관광객들이 또다시 신발을 신고 사찰에 들어오자 스님들과 불교도들은 식민정부를 격렬하게 비판하는 집회를 열었고, 위협을 느낀 영국은 정식으로 사과하고 사찰 내에 들어갈 때는 신발을 벗도록 공표하였다.

옥뜨마(U Ottama) 스님

미얀마의 청년불교도연맹은 계속해서 자치권을 얻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면서 점차 정치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다. 전국적인 모임을 통해 ‘전국불교도평의회(GCBA)’로 이름을 바꾼 청년불교도연맹은 이후 다시 다른 조직과 힘을 합쳐 ‘전버마평의회(General Council of Burmese Associations)’로 확대 개편되었다. 전버마평의회는 영국 상품 불매운동을 전개하여 스님들이 시장을 돌며 국민에게 운동의 지지를 호소하였다.

미얀마에는 청년불교도연맹과 같은 불교운동단체 외에도, 이미 1897년부터 전국 각지에서 불교단체들이 결성되어 불교를 보호하고 진작시키려는 활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중북부인 만달레이의 불교협회(Buddhasasananugaha), 남부 지역인 몰라민의 불교수지회(Sasanadhara), 서부 뻬테인의 아쇼까협회(Asoka Society) 등이 대표적이다. 미얀마 근대사를 보면 이처럼 출가 스님들이 역사와 민족을 위해 그리고 민중의 고통을 달래주고자 적극적으로 참여한 ‘참여불교’를 만나게 된다.

청년불교도연맹(YMBA)의 지도자는 반식민지·반영 투쟁운동으로 유명한 우 옥뜨마(U Ottama) 스님이다. 그는 미얀마 대중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처음에는 양곤대학의 학생들이 중심이 되었던 투쟁운동은 곧 다른 학교로도 파급되었다. 영국 지배에 항거하는 민족해방운동을 펼친 우 옥뜨마 스님은 우 위자라(U Wissara) 스님과 함께 전국적 규모로 반영운동을 확대시킨 지도자로 존경받았다. 그는 “불교 교단은 한마음으로 자신들의 정신적 이익을 위해 집중해 있을지라도 민중들의 고통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불법의 위상은 신앙심이 좋은 존재들과 연결되어 있다. 교단의 보살은 반드시 고난 속에 있는 중생들을 이끌어야만 한다”고 ‘보살’이란 말을 사용하면서 승가의 사회참여를 독려하였다.

간디 저항운동 배워 외국상품 불매운동

그는 인도의 간디에게서 영국 식민정부에 협력하지 않는 저항운동을 배워 미얀마 각지에 세금을 내지 말 것, 외국상품을 구입하지 말 것을 등을 선동하고 미얀마 문화를 파괴하는 영국을 비판하다 결국 여러 차례 체포와 구금을 반복했다.

우 옥뜨마 스님과 함께 청년불교도연맹에 속했던 우 위자라 스님은 경찰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반영 설법을 하다가 투옥당하기를 거듭했다. 그는 세 번째 투옥 시 단식으로 대항하다 166일 만에 옥사하였다. 감옥에서 죄수복 대신 가사를 입도록 해주고 형무소에서도 보름마다 포살을 허용할 것을 주장하는 166일간의 단식농성 끝에 옥사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영국 정부는 다른 스님들이 투옥되었을 때 가사 착용과 포살을 인정했다.

우 위자라 스님이 옥사한 다음 해에 영국 통치에 저항하는 최대 규모의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1932년 진압되기까지 1만명이 사살되고, 8000명이 체포되었으며 28명이 사형, 270명이 무기징역형을 받은 후에야 봉기는 막을 내렸다. 이때 농민봉기를 이끈 지도자는 사야 산(Saya San) 스님이었다. 사야 산 스님 또한 체포되어 1937년에 교수형을 당했다. 이어 우 옥뜨마 스님도 거듭되는 투옥 끝에 1939년 결국 옥사하였다.

이후에도 수많은 출가 스님들은 영국의 압박에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국민의 지도자가 되어 반영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는 과정에서 많은 스님이 투옥되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 같은 불교 승려들의 투쟁과 반복적인 투옥은 미얀마 국민에게 반영 사상을 더욱 고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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