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오신날-아시아불교⑮] 미얀마②···상좌부불교 수용·발전 과정
3일은 불기 2561년 부처님오신날입니다. <아시아엔>은 부처님의 자비와 은총이 독자들께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아시아엔>은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스리랑카·미얀마·태국·캄보디아·라오스·인도네시아·베트남 등 아시아 각국의 불교의 어제와 오늘을 <불교평론>(발행인 조오현)의 도움으로 소개합니다. 귀한 글 주신 마성, 조준호, 김홍구, 송위지, 양승윤, 이병욱님과 홍사성 편집인 겸 주간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편집자)
[아시아엔=조준호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교수, 동국대·인도 델리대 불교학과 석박사, BK 21 불교사상연구단·동국대 불교학술원 전임연구원, 한국외대 인도연구소 연구교수 역임. 주요논문 ‘대승의 소승폄하에 대한 반론’ ‘위빠사나 수행의 인식론적 근거’ 등. <우파니샤드 철학과 불교> 저자, <인도불교 부흥운동의 선구자-제2의 아소카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 역자]?버마계의 또 다른 선주민으로는 몬족 외에도 쀼(Pyu)족을 꼽을 수 있다. 중국에서 쀼는 ‘표(驃)’라는 말로도 알려졌다. 쀼족은 몬족과 함께 이라와디 강(에야워디(Ayeyarwaddy)라고도 부른다) 하류에 몇 개의 도시왕국을 세웠다.
그중 가장 강성했던 나라가 이라와디 강 중류의 삐 왕국이었는데, 대략 B.C.E. 200년에서 C.E. 900년 정도의 기간으로 본다. 7~8세기경 이 나라를 방문했던 중국인들의 문헌에는 국왕이 적극적으로 불교를 보호·장려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의 네 모퉁이마다 불탑과 금은으로 장엄한 수많은 사찰이 있었고, 백성들 역시 불심이 두터워 성품이 온화하고, 생명을 귀히 여겨 함부로 살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남녀 모두 7~10세 정도에 이르면 삭발하고 절에 들어가 불교 공부를 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은 현재의 미얀마 불교문화를 그대로 보는 것 같다. 즉 미얀마인의 온화한 성품과 신쀼(Shin Pyu) 의식을 생각하게 한다. 앞에서 언급한 더가웅(Tagaung) 왕국을 쀼족과 관련한 미얀마의 첫 불교왕국으로 본다.
버마계의 쀼족 이후 상좌부불교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인 왕조는 11세기경 버강(Bagan) 왕조이다. 버강 왕조의 아노여타(Anawy-ahta, 1044~1077 재위) 왕이 몬족 국가의 수도인 타통을 공격했을 때, 500여명의 몬족 승려와 함께, 빠알리 경전 등의 불교문화를 대대적으로 도입하였다 한다. 그리고 몬족 출신의 ‘신 아라한(Shin Arahan)’이라는 스님으로부터 자문을 구하였다. 이로 본다면 ‘버마’계의 버강 왕조가 처음 상좌부불교를 수용하였던 것은 전적으로 몬족의 불교문화였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왕은 적극적으로 스리랑카에 몬족 출신의 불교 사절단을 파견하여 불교 경전과 주석서 등을 구해 오게 하여 연구하도록 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빠알리어 공부와 경전 연구 등의 교학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버마족의 불교, ‘버강 왕조’
현재 미얀마불교의 특징은 같은 상좌부불교권에서도 아비달마 교학과 경전어인 빠알리 문법학 연구의 비중이 비교적 높다. 인도에 유학 온 상좌부불교국 스님들 중 아비달마와 빠알리 문법학에 특출한 미얀마 출신 스님들이 많은데, 이는 미얀마불교의 정초가 이미 12세기 때 확립되어 현재까지 계승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즉 800년이라는 교학 연구 전통이 현재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버강 왕조의 수도는 버강(Bagan)이다. 미얀마 최초의 통일국가로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4백만 파고다의 도시’로 알려졌다. 캄보디아의 앙코르 유적, 인도네시아의 보로부두르 유적과 함께 세계 3대 불교 유적지로 손꼽히는 버강은 지금도 수많은 파고다가 도시 전체에 산재해 있어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많은 파고다 가운데는 거의 완전한 형태로 옛 모습이 보존된 경우도 있지만 훼손된 유적도 많다. 마치 숲과 같은 버강의 수천 파고다 사이를 둘러보면 미얀마인들의 지극한 불심이 절로 느껴진다. 안타깝게도 버강 왕조는 1287년 몽골의 침략으로 멸망했다. 하지만 여전히 당시의 주요 불교문화 유적은 현존하여 우리를 친절하게 맞이하며 많은 것을 이야기해준다.?
1310년경, 몽골군이 물러간 이후 미얀마 중북부에는 샨(Shan)족에 의한 잉야(Innwa) 왕조가, 남부에는 버고(Bugo) 왕조가 성립되어 두 개의 왕조 시대가 열렸다. 버고 왕조에서는 미얀마불교사에서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 있는데, 담마제디(dham-mazedi, 1472~1492 재위) 왕이다. 그는 1476년에 비구와 사미를 해로로 멀리 스리랑카에 보내 스리랑카의 대사파(大寺派, Ma-havihara)로부터 여법한 수계를 받게 하고, 바른 수계법(受戒法)을 배워오게 하였다. 당시에 잘못 행해지고 있던 수계법과 계율 수지를 바로 잡아 승단을 쇄신하고자 하는 시도였다. 사적인 수계나 비밀 수계 등을 엄하게 금하고 율장에서 말하는 바에 맞는 구족계 수계가 이루어지도록 한 것이다. 이때 스리랑카에서 들여온 수계 전통은 정통으로 간주되어 현재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또한 이에 관한 역사적인 기록이 담마제디 왕이 1476년에 건립한 마하까리야니시마(Mahakalyanisima) 계단(戒壇)의 비문에 남아 있다.
버고, 잉야 그리고 따웅우 왕조
잉야 왕조의 샨족은 현재에도 미얀마 인구의 9%를 차지하고 있다. 이 왕조 역시 불교를 수용하고, 모든 왕이 불교 보호와 진흥에 열성적이었다. 하지만 왕들에 따라 불탑을 파괴하고 승려를 학살하는 경우도 있었다. 잉야 왕조의 불교 수용은 상좌부불교가 미얀마 북부 산악지대까지 멀리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대에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미얀마인에 의한 불교 저작 활동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초기불교 전통의 경전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나 논서에 대한 주석서 그리고 초기경전어인 빠알리어 문법서 등이 그것이다. 예를 들면, 논서에 대한 주석서로는 마하아리야왐사(Maharyavamsa) 스님의 Abhidhammatthavibhavaini와 빠알리어에 관한 Ganthabharana 등이 그것이다. 마하아리야왐사 스님은 15세기 중반에 활약했으며 그가 저술활동을 했던 사원은 현재에도 보존되어 있다.
이 외에도 이 시대의 많은 스님들이 붓다의 생애나 본생담을 소재로 한 작품을 남겼다. 그래서 불교학자들은 미얀마의 버강 왕조를 ‘불교가 미얀마화한’ 시기라고 평가한다.
16세기에 이르러 샨족은 다시 버마족에 주도권을 내주게 되었다. 1510년, 버마족의 왕이 즉위하면서 따웅우(Taung Oo) 왕조가 미얀마 거의 대부분을 통일했다. 스리랑카로부터 장로 스님이 건너왔고 왕들은 많은 사찰을 건립하여 승원불교를 발전시켰다. 버잉나웅(Bayinnaung) 왕의 경우 잉야 왕조를 멸망시키고 인도의 마니뿌르, 중국의 윈난성 그리고 태국 등지까지 정복에 나섰다.
그는 독실한 불교도로 정복지의 사람들로 하여금 불교를 믿도록 강요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많은 불탑을 보수하고 불교 경전을 일반에 보급하는 데 노력하였다. 또한 스리랑카에서 불교가 발전되도록 지원하였고 샨족의 산간벽지에도 전법사를 파견하였다. 왕조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많은 학승이 배출되고 빠알리어로 쓰인 많은 초기불교 전적이 미얀마어로 번역되었다. 따웅우 왕조는 약 200년간 지속되었는데, 태국의 침입과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등의 서구 세력의 압박을 받다가 멸망하였다.
꽁바웅 왕조
1753년에는 꽁바웅 왕조 시대가 열렸다. 이 왕조는 미얀마 역사상 세 번째 통일왕조이자 마지막 왕조로, 미얀마는 이 왕조를 끝으로 식민통치의 질곡에 놓이게 된다. 이 왕조 역시 이전의 왕조와 같이 불교진흥에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아 일반 대중에게까지 불교가 널리 보급되었다고 한다. 여러 곳에 사찰을 건립하고 양곤의 쉐다곤 파고다도 재건했으며, 불교 전적을 미얀마어로 번역하고 연구했다. 특히 디가니까야(D?gha Nik?ya) 같은 경장의 주석서가 이 시기에 번역되었다.
이 시기에 스님이 마을에 들어갈 때 복식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가 큰 논쟁거리로 대두했다. 승복으로 양쪽 어깨를 모두 감싸는 통견(通肩)과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는 편단(偏袒) 복식이 대립한 것이다. 결국 이에 대한 시비를 가리는 종교회의가 1788년 개최되어 두 파가 논쟁을 한 후 통견이 옳다는 결론을 내렸다. 또한 이 시대에는 사찰 내에서 불교 이외에도 춤, 무용, 점성술, 안마술, 승마술, 무술 등도 가르쳤다고 한다. 인도에서 많은 산스끄리뜨 문헌도 전해져 새로운 문물을 접촉할 수 있었다.
더 흥미로운 역사적 사실은 스리랑카와의 불교 교류이다. 당시 스리랑카에서는 왕명에 의해 상류 계층에만 구족계를 받는 출가를 허용했다. 그러자 출가를 원하는 하층민들은 반발하였고, 급기야 이들은 벵골만을 항해하여 미얀마에 도달하여 구족계를 받아 돌아가고자 하였다. 1800년 미얀마에 들어온 스리랑카 스님들은 왕의 환대와 함께 구족계를 받고 1802년 다섯 명의 미얀마 스님들과 함께 많은 빠알리 전적을 가지고 스리랑카로 돌아갔다.
스리랑카 불교 교단의 대표인 승왕(僧王, sangharaja)에게 전하는 서신도 가지고 귀국하였다. 이후 스리랑카에서는 그들에 의해 ‘아마라뿌라 상가(Amarapura Sangha)’라는 새로운 상가가 생겨, 현재까지 스리랑카불교의 한 종파로 내려오고 있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1192년에 미얀마의 스님이 스리랑카에 가서 구족계를 받아 미얀마에 상가를 형성한 이래 다시 스리랑카에 되돌려 준 일로서 상좌부불교권이 하나로 통하는 역사와 전통을 보여준다.
외침 대비 미얀마판 고려대장경
꽁바웅 왕조 시대에 또 하나 중요한 사건은 불교 역사상 제5차 결집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제5차 결집은 민돈(Mindon, 1853~1878 재위) 왕의 주재로 1868년에서 1871년까지 약 3년 동안 만달레이에서 2400명의 학승에 의해 이루어졌다. 불교에 정통한 학승들의 감독 아래 빠알리 삼장(三藏)을 독송하며 교정했는데, 패엽경이 필사되어 오는 과정에서 발생한 오자나 탈자 등을 교정하기 위해 참여자의 합송(合誦)만도 무려 5개월 동안 진행되었다고 한다. 오류를 바로잡아 교정된 삼장은 총 729매로 4년에 걸쳐 주변에서 구하기 쉬운 흰 대리석에 새겼는데, 율장 11매, 경장 410매, 논장 208매였다.
민돈 왕의 제5차 결집의 의도는 자주국가의 면모를 세계에 알리고 불심으로 국난을 극복하기 위한 일환이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 시기는 영국이 강력한 무력을 바탕으로 이미 미얀마 중·하부를 장악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얀마의 자주권을 지키고자 했던 민돈 왕은 수도를 잉와(Ava)에서 만달레이로 옮기고, 내륙 중심부를 흐르는 이라와디 강의 항로를 정비하고 교통체계를 확대하는 등 산업화와 근대화에 최선을 다하는 한편, 서구열강의 위협에 흐트러진 민심을 불법으로 수습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제5차 결집이라는 불사를 통해 대내외적으로 미얀마의 위상을 높이고 구심점을 모아 절박한 시대 상황을 타개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노력으로 영국과도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영국을 견제할 수 있는 다른 유럽 세력과도 균형을 이루는 외교력을 발휘해 미얀마를 외침으로부터 지켜나갔다. 이는 고려 시대 몽골의 침입 시에 국난극복의 방법으로 대장경을 간행했던 우리의 역사를 떠오르게 한다. 특히 미얀마에서의 제5차 결집은 1856년이 부처님 탄생과 성도 그리고 반열반 2400주년임을 기념하는 불사였다고 한다. 현재에도 제5 결집의 결과물인 대리석판에 새겨진 석경은 만달레이 구릉에 잘 봉안되어 있는데 그 모습은 실로 장관이다. 각각의 석경은 파손을 막기 위해 탑 속에 안치되어 있는데, 입구에는 다채롭고 화려한 모습의 꾸도더(Kuthodaw) 파고다가 있다. 이 파고다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책(The World’s Biggest Book)’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독실한 불교도였던 민돈 왕은 평소 위빠사나 수행을 하고 교단의 정화와 발전 그리고 포교를 위해 노력하였다. 이 외에도 그는 1858년에 타락한 승려들을 참회시키는 정화와 외세가 침투한 남부 미얀마로의 전법 활동을 장려했으며, 불교 성전 시험을 대대적으로 여는 정책 등을 펼쳤다. 또한 이 시기에 미얀마의 2대 분파인 셰진(Shwezin) 종파와 수담마(Sudhamma, 또는 뚜담마(Thudhamma)) 종파가 확립되었다고 한다. 민돈 왕이 죽고 난 후 그의 아들 띠보(Thibaw)가 왕위를 물려받았지만 그는 꽁바웅 왕조의 마지막 왕이 되었다. 미얀마는 영국 제국주의와 벌인 1824년과 1852년의 두 차례의 전쟁에 이어 마지막 세 번째 침탈에 결국 무너져 1886년,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