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오신날-아시아불교②] 인도네시아①···’만다라’ 스리비자야 왕국

만다라 문양

3일은 불기 2561년 부처님오신날입니다. <아시아엔>은 부처님의 자비와 은총이 독자들께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아시아엔>은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스리랑카·미얀마·태국·캄보디아·라오스·인도네시아·베트남 등 아시아 각국의 불교의 어제와 오늘을 <불교평론>(발행인 조오현)의 도움으로 소개합니다. 귀한 글 주신 마성, 조준호, 김홍구, 송위지, 양승윤, 이병욱님과 홍사성 편집인 겸 주간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편집자)

스리비자야 왕국과 경쟁 왕국들

[아시아엔=양승윤 한국외대 명예교수, 인도네시아 가쟈마다대학교 초빙교수, <인도네시아사> <Budaya Spirit dan Politik Korea>(한국의 정신문화와 정치) <작은 며느리의 나라, 인도네시아> 등 저자] 동남아 고대국가의 구조는 만다라(曼陀羅) 형태였다. 해양부 동남아에서는 만다라를 만달라(Mandala)로 칭하는데, 사람이름으로도 많이 쓰인다.

불교용어로 만다라는 중생들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덕(德)을 나타내어 둘러앉은 모양의 그림으로 그려진 군신상(群神像)을 말한다. 동남아 고대국가의 통치구조는 지배자를 정점으로 한 피라미드 형태가 아니라, 지배자가 중앙에 서는 동심원 형태, 즉 만달라 형태였다. 호수에 돌을 던지면 파문이 번져나가는 것처럼 처음에는 선명하지만 파문은 점차로 약해지는 현상을 말한다. 중심은 있고 변경이나 울타리가 없는 것과 같다.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고 세금과 노역을 바친다.

7세기에 이르러 동남아에 등장한 제국(帝國) 형태의 만달라는 이전 시대의 불교문화권의 만다라와 달리 더욱 세련된 모습을 갖추고 왕권의 중앙집중화가 이루어졌다. 수마트라의 빨렘방(Palembang)을 중심으로 7세기부터 13세기까지 장장 7세기에 걸쳐 장수한 스리비자야(Srivijaya) 왕국과 캄보디아 톤레사프(Tonle Sap) 호수 인근에서 9세기부터 13세기까지 번영한 앙코르(Angkor) 왕국이 각각 해양부와 대륙부 동남아를 대표하는 제국형 만달라 왕국이다.

말라카해협 중심 700년간 번창?

스리비자야(650~1377)는 수마트라와 말레이반도 사이의 말라카해협을 중심으로 전 수마트라와 말레이반도, 태국 남부, 자바와 칼리만딴 일부 지역에 걸쳐서 크게 발흥했던 불교왕국이다. 스리비자야를 스리위자야(Sri Wijaya)로도 표기하는데, 이는 자바(Java)를 자와(Jawa)로 표기하는 인도네시아 신철자법(1972년)에 따른 것이다. 스리비자야 왕국은 역사적 유물이나 유적을 많이 남기지 못하였기 때문에 정확한 사료(史料)를 통한 분석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고고학자들은 이 고대왕국의 생존방식이 농업에 의하지 않고 해상무역에 치중했을 것이라는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이 거대한 왕국은 20세기 초에 이르러서 프랑스의 동양학자 세데스(George Coedes, 1886~1969)에 의해서 복원되었다.

스리비자야왕국의 중심지는 수마트라 빨렘방(Palembang)이다. 이곳에서 발굴된 산스끄리뜨어로 된 비문을 통하여 스리비자야는 불교왕국이자 강력한 해상무역 왕국이었음이 밝혀졌다. 말라카해협의 전략적 해상 요충지에 위치했던 이 왕국은 일찍이 인도와 중국을 왕래하는 항로를 개척하고 있었다. 당(唐)나라 승려 이징(義淨)이 당시 상황을 상세하게 기록한 < 리비자야왕국 여행기> 전해지고 있다. 귀로에 그는 믈라유 전 지역이 이미 스리비자야왕국의 영향하에 놓여 있음을 발견했다. 믈라유는 오늘날의 말레이반도를 말한다.

산자야 왕국과 사일렌드라 왕국

스리비자야 왕국의 발흥과 거의 같은 시대에 좁은 순다(Sunda)해협을 사이에 두고 자바에서는 산자야(Sanjaya) 힌두왕국과 사일렌드라(Sailendra) 불교왕국이 등장하였다. 스리비자야는 수마트라와 말레이반도 사이의 말라카해협과 수마트라와 자바 사이의 순다해협의 주요 항로를 장악했으나, 내륙의 농업 지역을 충분하게 확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식량을 쌀의 섬 자바로부터 공급받아야 했다. 스리비자야의 국제교역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말레이반도 남단의 조호르(Johor)와 수마트라 북단의 아쩨(Aceh) 등지에서도 식량 일부가 조달되기도 하였다.

산자야 왕국이 곧 스리비자야의 주요 식량 공급지가 되었으나 머지않아 수마트라와 자바 간의 해상무역 주도권을 놓고 경쟁관계에 돌입하였다. 이로 인해서 스리비자야와 산자야는 한동안 긴장관계였다. 스리비자야 왕국의 멸망에 관한 사료는 거의 없으나 산자야와 조호르-아쩨 간에 동맹이 이루어졌고, 이들의 삼각 동맹으로 스리비자야에 식량 공급이 축소되어 점차 목을 조이는 효과가 나타났다는 것이 정설로 보인다.

스리비자야는 이처럼 항상 식량 공급원에 신경을 썼다. 산자야와 쟁패하는 동안 스리비자야 왕국은 자바 동북부에서 발흥한 불교문화 배경의 사일렌드라 왕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같은 불교왕국인 사일렌드라가 산자야를 대신하여 스리비자야의 새로운 식량 공급원이 되었고, 인도네시아 군도의 불교문화는 이때 만개하였다. 현존하는 주요 인류 문화유산의 하나이자 공식적인 세계 최대의 불교유물인 보로부두르(Borobudur) 사원도 사일렌드라 왕국의 전성기에 축조되었다. 9세기 초에 축조를 시작하여 825년경에 완공한 것으로 믿어지는 보로부두르는 산스크리트와 발리 문자의 합성어로 ‘언덕 위의 승방(僧房)’이라는 뜻이다.

힌두 산자야 왕국의 후손들도 사일렌드라 왕국의 외곽지대에서 지속적으로 세력을 키워나갔다. 850년경 산자야 왕과 사일렌드라 공주 간의 결혼동맹으로 중부 자바의 통제권이 다시 산자야 왕국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산자야 왕국을 전성기로 이끈 라카이삐카탄(Rakai Pikatan) 왕은 자신의 위업을 기념하기 위해서 보로부두르에 견줄 수 있는 힌두사원을 남기고 싶었다. 보로부두르에서 멀지 않은 곳에 850년부터 856년 사이에 축조된 쁘람바난(Prambanan) 힌두사원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안고 세워졌다.

세계적인 힌두 유적지의 하나로 알려진 이 미려(美麗)한 석조건축물은 로로 종그랑(Loro Jonggrang)사원이라는 별칭으로 오늘날 중남부 자바의 족자카르타(Yogyakarta)에 남아 있다. 쁘람바난 사원이 세워진 동네 이름이 쁘람바난이다. 이 사원이 축조될 당시 쁘람바난은 부유하고 화려한 왕국의 중심지였을 것이다.

산자야 왕국의 번영에 따라 중부 자바는 한동안 힌두왕국에 의해서 성공적으로 통치되었다. 동부 자바로 세력권을 확대한 힌두왕국은 10세기 후반에 전성기를 맞아 990~991년 사이에 스리비자야 왕국을 공격하여 한때 왕국의 중심부를 점령하기도 하였다. 25년 후 스리비자야는 막강한 해군력을 동원하여 자바의 힌두왕국의 위대한 군주 다르마왕사(Dharmawangsa)를 제거한 후, 그의 영토를 수많은 봉토(封土)로 분할하였다. 이후 다르마왕사의 조카 아이르랑가(Airlangga)가 다시 산자야 왕국을 회복하기까지는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는 스리비자야 왕국의 군대를 물리치고 1019년 다르마왕사의 왕위를 계승하였다. 중부와 서부 자바에는 오늘날까지 거리와 호텔 이름으로 다르마왕사가 많이 남아 있다.

아이르랑가는 자바 힌두왕국의 옛 영토 대부분을 회복하고 번영을 되찾았다. 아이르랑가 통치 시기에 수많은 인도 고전이 산스크리트어로부터 자바 고어로 번역되고, 자바의 토착문화가 꽃을 피웠다. 이 시기에 자바의 전 지역은 이전의 왕국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번영하였다. 동부 자바를 계승한 통치자들은 내륙의 농업을 크게 발전시켰고, 동시에 이익을 많이 남길 수 있는 해상무역 활동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1222년 자바의 새로운 강자 싱하사리(Singhasari) 왕국이 동부 자바 말랑(Malang)에 세워졌다. 싱하사리 왕국은 1275년과 1291년 두 차례에 걸쳐서 스리비자야의 대군이 침공하는 것을 성공적으로 방어하였으며, 계속해서 증가일로에 있던 자바 주변의 해상무역을 엄중한 자신의 통제하에 두었다. 이즈음 몽골의 쿠빌라이 칸(Khubilai Khan)이 1293년 강력한 함대를 앞세워 싱하사리 왕국의 정복에 나서 자바에 등장하고 있다. 경쟁 상대가 바뀌고 자바에서 후원 세력이 사라진 스리비자야 왕국은 주변으로부터 식량 공급까지 원활하지 못하여 국력이 서서히 소진(消盡)되었다.(인도네시아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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