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오신날-아시아불교⑫] 스리랑카③···’폴론나루와’ 시대와 포르투갈의 불교박해

3일은 불기 2561년 부처님오신날입니다. <아시아엔>은 부처님의 자비와 은총이 독자들께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아시아엔>은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스리랑카·미얀마·태국·캄보디아·라오스·인도네시아·베트남 등 아시아 각국의 불교의 어제와 오늘을 <불교평론>(발행인 조오현)의 도움으로 소개합니다. 귀한 글 주신 마성, 조준호, 김홍구, 송위지, 양승윤, 이병욱님과 홍사성 편집인 겸 주간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편집자)

[아시아엔=마성 팔리문헌연구소장, 동국대 불교문화대학원 겸임교수, 스리랑카 팔리불교대 불교사회철학과·동 대학원 졸업, 동방대학원대학교 박사, 박사논문 ‘삼법인설의 기원과 전개에 관한 연구’, <마음비움에 대한 사색> 저자] 위자야바후 1세(Vijayabāhu Ⅰ, 1059~1114) 왕의 통치 시기에 수도를 폴론나루와(Polonnaruwa)로 옮겼다.

이때 승가의 단절된 계맥도 되살렸다. 미얀마로부터 승려들이 들어왔고, 대사의 본부도 폴론나루와로 옮겨 고대 사원의 전통을 다시 되살렸다. 위끄라마바후 2세(Vikramabāhu Ⅱ, 1116~1137) 왕의 통치 시기에는 사찰이 황폐해졌고, 승려들의 항의는 무시되었다. 그러나 빠라끄라마바후 1세(Parakramabāhu Ⅰ, 1153~1186) 왕의 통치 시기에 승가를 정화하여, 세 개의 부파를 하나로 통일시키고자 시도하였다. 그리고 가마와사(Gāmavāsa, 마을 거주자)와 아란냐와사(Araññavāsa, 산림 거주자)를 재건하였다. 또한 복주서(ṭīkā)들을 체계적으로 편찬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와 남인도의 상좌부불교 국가들과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이때 승가의 성직 계급제도의 조직이 형성되었다.

닛상까 말라(Nissaṅka Malla, 1187~1196) 왕은 승려들에게 호의적이었다. 세 개의 승가 단체를 하나로 통일하도록 칙서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승가에 누가 되는 행동을 삼가라고 승려들에게 요구하였다. 하지만 그 뒤 깔링가(Kāliṅga)의 막가(Māgha, 1214~1235) 왕의 통치 시기에 불교는 완전히 멸망하여 승가의 계맥이 끊어지고 말았다. 이와 함께 폴론나루와 왕국의 시대도 막을 내렸다.

폴론나루와 시대 이후

위자야바후 3세(Vijayabāhu Ⅲ, 1232~1236) 왕의 통치 시기에 담바데니야(Dambadeniya) 왕국이 시작되었다. 그때 작은 규모로나마 불교와 승가의 명맥을 되살렸다. 이어서 왕위에 오른 빠라끄라마바후 2세(Parākramabāhu Ⅱ, 1236~1271) 왕의 통치 시기에 본격적으로 승가를 재조직하였다. 그리고 승가를 정화하여 승가에서 추방된 자들이 다시 승가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등 승가 내부의 성직 계급제도의 조직이 절정에 달하였다.

부와나이까바후 4세(Bhuvanaikabāhu Ⅳ, 1302~1346) 왕의 통치 시기에는 수도를 강가시리뿌라(Gangasiripura, 현재의 Gampola)로 옮겼다. 아란냐와사(Araññavāsa) 승려들이 가달라데니야(Ga-dalādeniya)에 불교의 본부를 세우고, 다르마끼르띠(Dharmakīrti) 대승정의 지도 아래 세 개의 부파를 정화하였다. 이와 함께 아란냐와사 승려들은 씨암(Siam, 지금의 태국)에 싱할라 승가를 설립하였다.

꼿떼(Kotte)의 빠라끄라마바후 6세(Parākramabāhu Ⅵ, 1410~1468) 왕의 통치 기간은 불교와 승가가 마지막 영광을 누린 시기였다. 왕은 승가를 정화하고 규정을 제정하였으며, 꼿떼 주변과 섬의 남쪽 사찰은 학문의 중심지로 각광을 받았다. 그 뒤 부와나이까바후 6세(Bhuvanaikabāhu Ⅵ, 1473~1480) 왕의 통치 시기에 미얀마의 담마쩨띠(Dhammaceti) 왕이 미얀마 승려들을 스리랑카로 파견하였다. 이 승려들은 껠라니야(Kelaniya)에서 구족계를 받고 미얀마로 돌아가 깔라니시마(Kalyāni sīmā)를 설립하였다.

1505년 포르투갈이 스리랑카에 침입하였다. 그때부터 불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위말라다르마수리야 1세(Vima-ladharmasūriya Ⅰ, 1592~1604) 왕의 통치 시기에 락캉가(Rakkhaṅ-ga, 현재의 Arakan)로부터 구족계의 계맥을 되살렸다. 아라칸(Arakan)은 지금의 미얀마에 있던 나라였다. 그리고 위말라다르마수리야 2세(Vimaladharmasūriya Ⅱ, 1687~1707) 왕의 통치 시기에 또다시 아라칸으로부터 구족계의 계맥을 되살렸으나 이러한 복구도 오래가지 못하고 곧 단절되었다.

그 후 끼르띠스리라자싱하(Kīrti Śrī Rājasiṅgha, 1747~1782) 왕의 통치 시기인 1753년 태국의 우빨리(Upāli) 장로가 스리랑카의 캔디를 방문하여 다시 한번 승가를 복구시켰다. 이때 복구한 부파를 우빨리 장로는 자기 모국의 이름을 따서 ‘씨암모빨리 마하니까야(Syāmopāli Mahānikāya)’라고 명명(命名)하였다. 이 이름은 ‘씨암 우빨리 계보(Siam Upāli lineage)’라는 뜻이다. 줄여서 ‘씨암 니까야(Siam Nikāya)’라고 불렀는데, 이는 스리랑카에서 전승해 오던 대사파의 전통이 단절되었음을 의미했다. 씨암 니까야는 아스기리야(Asgiriya)와 말왓따(Malwatta) 사원에 각각 아란냐와사(산림 거주자)와 가마와사(마을 거주자)의 전통과 예전의 성직 계급제도를 재건했다. 태국의 우빨리 장로의 초청을 주도했던 웰리위따사라낭까라(Veliviṭa Saraṇaṅkara, 1698~1778) 장로는 승왕(Saṅgharāja)에 임명되었다.

끼르띠스리라자싱하 국왕 ‘승가’ 복구 

이와 같이 끼르띠스리라자싱하 왕의 통치 기간에 다시 한번 상좌부 전통의 계맥을 되살렸는데, 왕은 동생 라자디라자싱하(Rājadhi Rājasiṅgha, 1782~1798)에게 왕위를 넘겨주었고, 라자디라자싱하 왕은 그의 조카였던 스리 위끄라마라자싱하(Śrī Vikrama Rājasi-ṅgha, 1798~1815)에게 왕위를 인계하였다. 이 왕이 비운의 싱할라 왕조의 마지막 왕이었다.

싱할라 왕조는 그 이전에도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침략을 받았지만, 왕조는 계속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1815년 영국의 군대가 수도 캔디를 공격했을 때, 싱할라 왕이 체포되었다. 1815년 3월 2일 캔디 왕조의 대표자들과 스님들로 구성된 식민지 의회에서 왕은 통치권을 영국 왕실로 넘긴다는 식민조약(일명 캔디협약)에 서명하고 폐위되었다. 이렇게 해서 기원전 486년 위자야(Vijaya)가 왕위에 오른 이래 2,301년 동안 이어져 왔던 영광스러운 스리랑카의 불교 왕조는 막을 내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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