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오신날-아시아불교⑪] 스리랑카②···아누라다푸라 시대

아바야기리위하라(Abhayagiri-vihāra, 無畏山寺)

3일은 불기 2561년 부처님오신날입니다. <아시아엔>은 부처님의 자비와 은총이 독자들께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아시아엔>은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스리랑카·미얀마·태국·캄보디아·라오스·인도네시아·베트남 등 아시아 각국의 불교의 어제와 오늘을 <불교평론>(발행인 조오현)의 도움으로 소개합니다. 귀한 글 주신 마성, 조준호, 김홍구, 송위지, 양승윤, 이병욱님과 홍사성 편집인 겸 주간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편집자)

[아시아엔=마성 팔리문헌연구소장, 동국대 불교문화대학원 겸임교수, 스리랑카 팔리불교대 불교사회철학과·동 대학원 졸업, 동방대학원대학교 박사, 박사논문 ‘삼법인설의 기원과 전개에 관한 연구’, <마음비움에 대한 사색> 저자] 기원전 1세기 후반에 스리랑카의 불교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로하나의 띳사(Tissa)라는 바라문이 기원전 43년 왓따가마니아바야(Vaṭṭagāmaṇī-Abhaya, B.C. 43~29) 왕에게 전쟁을 선포하였다. 그때 마침 남인도로부터 일곱 명의 타밀들이 마하띳타(Mahātittha)에 상륙하여 강한 무력으로 무장한 채 수도 아누라다푸라를 향해 진군해왔다.

남쪽으로부터 북쪽에 이르기까지 나라 전체가 전쟁에 휩싸였다. 기원전 43년부터 14년간 다섯 명의 타밀들이 번갈아 가면서 아누라다푸라를 지배하였다. 이 기간에 왓따가마니 왕은 멀리 떨어진 곳에 숨어 지냈다.

그때 전례 없는 대기근이 들어 나라 전체가 황폐해졌다. 먹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잡아먹었는데, 그들이 존경하던 비구들의 시신까지 먹었다. 수천 명의 비구와 재가자들이 죽고, 많은 사찰이 황무지로 변했다. 마하위하라(大寺)는 완전히 폐허가 되었고, 마하투빠(Mahāthūpa) 또한 완전히 방치된 상태였다. 많은 비구들은 섬을 떠나 인도로 건너갔다. 국가는 그야말로 대혼란 상태에 빠져들었다.

대장로들과 싱할라의 지도자들은 불교의 미래가 매우 위험하다고 판단하였다. 불교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웠기 때문이었다. 싱할라 왕들도 불교를 지원해 줄 수가 없었다.

스승으로부터 제자로 이어져 온 삼장(三藏)의 구전(口傳) 전통을 계속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비극적인 시기에 승려들의 주된 관심사는 “어떻게 해야 붓다의 가르침을 보존할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미래를 내다본 대장로들은 지역 족장들의 보호를 받아 마딸레(Mātale)의 알루위하라(Aluvihāra)에 모여 ‘진실한 교법을 유지하기 위해서(ciraṭṭhitatthaṃ dhammassa)’ 그때까지 구전으로 전승되어 오던 삼장을 문자로 기록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불교사에서 최초로 주석서를 포함한 삼장 전체를 문자로 기록하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현존하는 팔리 성전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뒤, 왓따가마니 아바야 왕이 14년간의 격렬한 전투 끝에 타밀을 물리치고, 수도 아누라다푸라를 다시 탈환하게 되었다. 그는 니간타(Nigaṇṭha, 자이나교)의 산사(山寺)를 파괴해 버리고, 그곳에 자신의 이름을 앞에 붙인 거대한 아바야기리위하라(Abhayagiri-vihāra, 無畏山寺)를 지었다. 왕은 이 절을 자신이 불행했던 시기에 자기에게 큰 도움을 주었던 마하띳사(Mahātissa) 장로 개인에게 헌납하였다. 또한 왕의 신하였던 다섯 명의 대신들도 자신들을 도와주었던 띳사 장로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각자 사찰을 지어 띳사 장로에게 바쳤다. 이것이 개인에게 사찰을 헌납한 최초의 역사적 사례이다.

마하띳사는 초기에는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고, 외진 곳에 살았다. 그런데 나중에 왕이 특별히 초빙하여 아누라다푸라의 마하위하라에 머물게 하였다. 그런데 그가 권력을 과도하게 휘둘러, 마하위하라 승려들의 명예와 권위를 훼손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러자 마하위하라 승려들은 마하띳사가 속인과 교류했다는 죄목을 들어 빳바자니야깜마(pabbājaniya-kamma, 驅出羯磨)를 실시하겠다고 위협하였다. 이것은 왕과 대신들의 행위에 대한 불만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마하띳사의 추종자들은 이러한 갈마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마하위하라 승려들은 율장에 따라 욱케빠니야깜마(ukkhepaniya-kamma, 擧罪羯磨)를 부과하려고 하였다. 마하띳사의 제자들은 분노하여 많은 승려들을 데리고 아바야기리로 간 뒤, 마하위하라로 되돌아오지 않고 그곳에 머물렀다. 이것이 스리랑카 최초의 승가 분열(saṅgha-bheda)이었다. 이때부터 스리랑카의 불교는 마하위하라파(大寺派)와 아바야기리위하라파(無畏山寺派)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비록 무외산사의 승려들이 대사에서 떨어져 나갔지만, 초기에는 두 부파 사이에 교리나 실천적 측면에서 차이점이 없었다. 다만 무외산사파는 대사파가 율장에 따라 마하띳사를 징계하려고 한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도의 밧지뿌뜨라(Vajjiputra, 犢子部)에 속하는 담마루찌(Dhammaruci, 法喜部)가 스리랑카에 도착하자, 무외산사에서 그들을 받아들였다. 왕은 무외산사를 좋아했기 때문에 새로운 부파 혹은 그들의 견해를 공식적으로 탄압하지 않았다. 그 후 무외산사의 승려들은 인도에서 형성된 여러 부파들과 접촉하였다. 외국에서 들어온 새로운 이념들을 받아들여 비교적 진보적이었던 그들은 상좌부와 대승을 함께 공부하였다.

보하리까띳사(Vohārikatissa, 269~291) 왕의 치세 때 최초로 베뚤라와다(Vetullavāda, Skt. Vaitulyavāda, 方廣部)가 들어왔다. 이때는 인도에서 대승불교가 크게 발전하던 시기였다. 보하리까띳사 왕은 방광부를 탄압하였다. 그 후 무력을 써서 왕위에 오른 고타바야(Goṭhābhaya, 309~322) 왕은 불교도로서 모범적인 삶을 보여준 강력한 군주였다. 그의 통치 시기에 무외산사에서 방광부를 받아들였다. 또한 무외산사에 있던 승려들이 담마루찌(법희부)와 단절하고, 닥키나기리위하라(Dakkhiṇāgiri-vihāra, 南寺)로 옮겨 갔다. 그곳에서 사갈리야(Sāgaliya, 海部)라는 새로운 부파가 생겨났다.

한편 고타바야 왕은 방광부를 탄압하기 위해 취조했는데, 그들의 책을 불사르고 60명의 승려를 국외로 추방했다. 섬에서 추방된 승려들은 남인도의 촐라(Chola)에 머물렀다. 그들은 인도의 대승불교 승려였던 상가미뜨라(Saṅghamitra)와 접촉하였다. 나중에 상가미뜨라는 스리랑카로 건너와 대승불교를 전파했다. 고타바야 왕은 그의 두 아들의 교육을 상가미뜨라에게 맡겼다.

상가미뜨라는 두 왕자 중 형인 제타띳사(Jeṭṭha-tissa)는 자기가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동생인 마하세나(Mahāsena)가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지원했다. 그런데 왕의 사망 후 형인 제타띳사(Jeṭṭha-tissa, 323~333)가 왕위에 오르자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스리랑카를 떠났다. 그러나 나중에 동생인 마하세나(Mahāsena, 334~362)가 왕위에 오르자 다시 스리랑카로 돌아왔다.

상가미뜨라는 무외산사에 머물면서 대사파의 승려들을 대승으로 개종시키려고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제자인 마하세나 왕을 설득시켜 대사파 승려들에게 공식적으로 공양을 베풀지 못하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래서 대사파의 승려들은 아누라다푸라를 떠나 로하나(Rohaṇa)와 말라야(Malaya)로 갔다. 그곳은 대사파에 의해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사(大寺)는 9년 동안 황무지로 방치되었다. 상가미뜨라는 왕의 승낙과 소나(Soṇa)라는 대신의 도움을 받아 대사의 7층 건물인 로하빠사다(Lohapāsāda)를 비롯한 많은 다른 건축물들을 파괴한 뒤, 그 자재들을 무외산사의 새로운 건물을 짓는 데 이용하였다. 한편 쩨띠야빱바따(Cetiya-pabbata, Mihintale)는 무외산사의 법희부들이 차지하였다.

왕의 이러한 행동에 대사파를 지지하던 국민은 큰 충격을 받고 왕에게 등을 돌렸다. 왕의 절친한 친구이자 신하였던 메가완나아바야(Meghavaṇṇa-Abhya)는 말라야(Malaya)로 달아나 그곳에서 군사를 일으켜 왕에게 전쟁을 선포하였다. 마하세나 왕은 그때야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고 비밀리에 회담을 했다. 이 자리에서 왕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대사를 복구하기로 약속하고 양측은 서로 화해하였다.

그러나 성난 군중들은 이들에게 보복을 감행하였다. 왕이 총애하던 부인 가운데 한 명이었던 필경사의 딸은 비통한 심정으로 목수를 시켜 상가미뜨라를 죽여 버렸다. 상가미뜨라의 친구이자 대신이었던 소나(Soṇa)도 살해되었다. 대사는 특히 훌륭한 공직자였던 메가완나-아바야에 의해 복구되었다.

비록 왕이 메가완나아바야의 제안에 동의하였으나 그는 여전히 대사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대사의 경계 내에 거대한 제따완나위하라(Jetavana-vihāra, 祇陀林寺)를 지었다. 이것이 스리랑카에서 세 번째 성립된 부파였다. 그리고 왕은 많은 사람의 강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사갈리야(Sāgaliya, 海部)를 따르는 닥키나라마(Dakkhiṇārāma) 혹은 닥키나기리(Dakkhiṇāgiri, 南寺)의 띳사(Tissa)라는 장로에게 제따완나를 바쳤다. 이 때문에 대사파는 다시 한번 왕과의 관계를 9개월 동안 단절하였다. 제따완나위하라(祇陀林寺)를 접수한 띳사 장로는 승가회의에서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혐의를 받았다. 공정하고 공평하기로 이름난 사법부 장관은 왕의 반대가 있었음에도 띳사를 환속시켰다.

마하세나 왕의 뒤를 이은 시리메가완나(Sirimeghavaṇṇa, 362~ 409) 왕은 자신의 아버지가 저지른 잘못을 대사파의 비구들에게 사죄하였다. 그리고 파괴된 대사를 복구하는 데 최선을 다하였다. 이 왕의 통치기에 깔링가(Kāliṅga)로부터 불치사리(佛齒舍利)가 도착하였다.

이때 중국의 법현(法顯) 스님이 스리랑카를 방문하여 무외산사에 머물렀다. 법현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무외산사에는 5,000명의 승려가 있었던 반면, 대사에는 3,000명만이 머물고 있었다고 한다. 한편 마하나마(Mahānāma, 409~431) 왕의 통치 시기에는 붓다고사(Buddhaghosa, 佛音)가 스리랑카에 도착하여 대사에 머무르면서 삼장에 대한 주석서를 팔리어로 옮겼다.

실라깔라(Silākāla, 524~537) 왕을 계승한 악가보디 1세(Agga-bodhi Ⅰ, 568~601) 왕 때에는 인도에서 온 ‘조띠빨라(Jotipāla)’라는 승려가 공개 토론에서 방광부를 패배시켰다. 그 이후 더 이상 방광부로 개종하는 사람이 없었으며, 무외산사와 기타림사 두 파의 승려들은 자존심을 버리고 대사파에 복종하면서 살았다.

그다음 왕위에 오른 악가보디 2세(Aggabodhi Ⅱ, 601~611) 왕은 방광부의 공식적인 패배에도 불구하고, 대사보다도 무외산사와 기타림사를 더 좋아하였다. 왕비 역시 무외산사에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후 약 50년 동안 정치와 종교의 갈등이 계속되었다.

이 시기부터 왕들은 대개 오래된 종교의 건축물들을 수리하고 사찰을 확장하였으며, 대중적인 축제를 개최하고 불교를 정화하려고 시도하였다. 이 시기의 ‘승단 정화(Sāsana sodhanā)’는 율장의 규정에 따라 담마깜마(dhamma-kamma, 法羯磨)를 실행하는 것이었다. 정화는 왕의 명령에 따라 승가에서 실시하였다. 대부분의 승려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하였고, 보수적인 승려들은 그것을 ‘타락’이라고 간주하였다. 그때마다 왕들과 고승들은 정화를 시도했다.

실라메가완나(Silāmeghavaṇṇa, 617~626) 왕의 통치 시기에 무외산사에서 큰 소란이 일어났다. 무외산사에 거주하던 ‘보디(Bodhi)’라는 장로가 그 절에 있던 많은 스님이 계율을 지키지 않는다고 왕에게 보고한 것이다. 그리고 율장에 따라 담마깜마(法羯磨)를 실행하라고 왕에게 요청하였다. 왕은 장로에게 정화의 권한을 위임하였다. 그러나 계율을 지키지 않았던 승려들이 동조하여 보디 장로를 죽여 버렸다. 왕은 격노하여 범죄에 가담한 자들의 손을 절단해 버리고, 족쇄를 채워 저수지 감시인으로 만들었다. 또한 왕은 100명의 승려를 국외로 추방하고 승단을 정화하였다. 그 후 왕은 두 부파 간의 화합을 이끌어내기 위해 대사파의 승려들에게 무외산사파와 함께 우뽀사타(Uposatha, 布薩)를 실시하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대사파의 승려들은 왕의 요청을 거부하였다.

다토빠띳사 2세(Dāṭhopatissa Ⅱ, 650~658) 왕의 통치 시기에 다시 왕과 대사파 사이에 불화가 생겼다. 왕이 대사파의 영역에 무외산사를 위해 빠리웨나(Pariveṇa, 講院)를 짓고자 하였다. 대사파의 승려들은 왕에게 이의를 제기했지만, 왕은 자신의 계획을 강행하였다. 그러자 대사파의 승려들은 왕의 공양을 거부하는 빳따닉꿋자나깜마(pattanikkujjana-kamma, 覆鉢羯磨)를 결행했다. 그러나 왕은 대사파에게 어떠한 제재도 가하지 않았다.

그 후 마나밤마(Mānavamma, 676~711) 왕 때에는 분소의(糞掃衣, paṃsukūlika)를 입은 승려들이 유명해졌다. 세나 1세(Sena Ⅰ, 831~851) 왕 때에는 ‘바지리야(Vājiriya, 金剛部)’가 전해졌다. 이어서 세나 2세(Sena Ⅱ, 851~885) 왕 때에는 무외산사의 분소의를 착용한 승려들이 다른 부파를 형성하였다. 왕은 이단의 견해들이 섬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해안선을 따라서 감시하도록 했으며, 세 부파를 정화하였다. 하지만 빠라끄라마 빤두(Parākrama Paṇḍu, 972~981) 왕의 통치 시기에 이르러 정치적 격변을 겪으며 불교와 승가 역시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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