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 조오현 스님의 선시조③] 불교의 뿌리를 캐들어 가다
[아시아엔=배우식 시인] 선(禪)은 산스크리트어 ‘dhy?na’에 대응하는 음사어(音寫語)다. 어근(語根)은 ‘dhyai’(정념)으로 ‘선’은 직접 산스크리트 음(音)을 본뜬 것이 아니고, 그 속어형 ‘jh?na’(禪那)를 음사한 것이다. 혹은 그 어미의 모음에서 ‘jhan’을 본뜬 것이다. 중국에서 ‘선’은 “천자(天子)가 행하는 하늘의 제사, 천자가 지위를 양도하는 일” 등의 의미를 갖는다.
여기에서 비롯되는 오해를 막기 위해 ‘dhy?na’의 의역어인 정(定)과 사(思)를 덧붙여 선정(禪定), 선사(禪思) 등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동일한 선정의 자세도 자리를 잡고 좌선하는 경우도 있다. 이 밖에 정려(靜慮)·사유수(思惟修)·기악(棄惡)·공덕총림(功德叢林) 등으로도 해석된다.
이들은 어의·방법·목적·효과 등을 나타내는 설명적인 해석어이지만, 선 그 자체에는 다의성이 내포되어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동의어로서 사만디(三昧, 等持)와 사마파티(三昧, 等至)가 있다. 이것들도 선(禪)이나 선정(禪定)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선은 음사어인 까닭에 디야나라는 말로 선정을 표시할 뿐만 아니라 다르게 나타내기도 한다. 그 외에 요가(yoga)·아디칫타(adhicitt, 定)·사만타(等引, 定)·사마타·비파샤나 등 동의어는 여러 갈래로 전해진다.
일반적으로 음사는 그 개념에 해당하는 술어가 없는 경우에 쓰인다. 깨달음의 지혜를 획득하는, 또한 불가사의한 신통력을 얻는 수단으로서 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개념이었다. 후에는 불교에서 실천적인 입장을 총칭해 선으로 명명했다.
승려를 선사(禪師)·법사(法師)로 나누고, 다양한 종파를 교종(敎宗)과 선종(禪宗)으로 분류하기도 하는 것이 그것이다. 특히 선종(혹은 선중)은 원래 산거은서(山居隱棲)해서 실천을 한결같이 하는 부류를 가리켰지만, 후에 다르마로 시작한다고 여겨지는 종파를 특정하는 용어가 되었다.
선은 실천 일반의 의미에서 보리달마에 시작된다는 종파인 선종을 나타내는 것으로도 전해졌다. 그들은 또한 자신의 입장을 ‘종교’라 일컫고 있다. 종교란 궁극적 진리(宗)의 언어표현(敎)이지만 점점 궁극적 진리는 언어화할 수 없으므로 종교 그 자체가 모두 딜레마의 가운데에 있다.
그 모순을 ‘신(信)’에 의해 실천적으로 지양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었다. 그에 정신화된 사구게, 즉 교외별전(敎外別傳)·불립문자(不立文字)·직지인심(直指人心)·견성성불(見性成佛)이 이를 잘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는 언어의 부정도 설명되어 있으나 부정되는 언어행위란 정언적 결론과 이항대립적(二項對立的) 개념을 갖고 정부(正否)를 선택적으로 갖는 합리주의적 입장이다.
그 이외의 언어행위의 끝에 시문과 고정적 개념 파괴 때문에 부정사 혹은 상징적 표현은 오히려 과용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는 언어에 의한 정연한 교리체계 형성에 대한 강렬한 안티테제가 있다. 이렇게 구체적인 일상생활에서 불법의 실험을 나타내고, 그런 제상을 ‘공안(公案)’으로서 후진의 교육에 사용한 독특한 수행 패턴이 나왔다. 그 방법은 현대의 승당(僧堂) 생활에도 이어지고 있다. 종파의 존립 근거를 나타내는 조등설에 의하면 종조(宗祖) 달마는 인도에서 남송으로 왔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중앙아시아 전란을 피해 중국 남북조시대 북위(北魏)에 망명해온 도래승이다. 그것이 종파의 발전과 함께 신화전설로 윤색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도래전설은 그때까지 부지런히 진행된 중국 불교사의 과정을 부정하고 새로운 전통을 형성하는 선종의 의도를 보이고 있다. 한편, 이 시대의 사상적 과제의 하나가 ‘말법사상’이다. 이는 인도 이래의 전통을 부정하고 중국적인 간명한 실천불교를 개발하는 기호로서 확실하게 이용되었다.
그 일은 뒤의 선종이 여래선(如來禪)과 조사선(祖師禪)을 대립시켜 조사선을 표방하는 태도 안에도 보인다. 이렇게 중국 고유의 유교와 도교를 혼용한 완전히 새로운 중국불교, 즉 선종이 성립했던 것이 실제로는 선행하는 교학적 입장인 삼론종(三論宗)·화엄종(華嚴宗)·천태종(天台宗) 등의 가장 강한 영향으로 그들을 이용해 자기 사상과 실천 체계를 창출했다고 할 수 있다.
후에 하택(荷澤) 신회(神會)(685~760)는 스스로 남종(南宗) 혜능(慧能, 638~713)과 북종(北宗) 신수(神秀, 606~706)를 대치해 중국적인 속수(速修)를 말한 ‘돈오(頓悟)’의 선과 인도적인 단계적 깨달음을 말하는 ‘점오(漸悟)’의 선을 대표해서 그것을 비교해 후자를 부정했다. 때마침 안사의 난(755~763)에 의해 교학적 종파는 큰 타격을 입어, 이후 실천을 주로 하는 남존 계통의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과 석두희천(石頭希遷, 700~791)의 두 사람으로 시작되는 선종이 중국을 석권하기에 이른다. 선종의 사실상 성립도 이 시기에 이뤄진다.
선의 원체험(原體驗)은 언제나 문자에 의한 교설(敎說)로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대상논리적인 사유의 입장을 떠난 직접 체험에서 스스로 깨닫게 된다. 전(傳)은 계(契), 즉 개념의 매개를 떠나서 직접경험의 하나가 되는 것이다. 문자교설(文字敎說)은 이 체험을 시사(示唆)하고 이것이 오입(悟入)한 수단으로 되어 있는 한에서 의의가 있으며, 이 원체험의 뒷받침을 가지는 한, 생명을 가진다고 본다.
불립문자(不立文字)에는 ‘문자에 구애받지 않음’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법(法)이란 것은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하는 것이므로 따로 언어문자를 세워 말하지 않는 데 참뜻이 있다.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은 선종의 오도(悟道), 즉 깨달음을 보이는 말이다. 좌선에 의지해서 바로 스스로의 심성을 꿰뚫어볼 때 본래의 면목이 나타나서 여러 종류의 부처 혹은 모든 부처인 제불(諸佛)의 묘경, 즉 불가사의한 경계에 이른다는 뜻이다.
중생의 마음과 부처의 마음은 원래 하나이므로 부처도 다른 데서 찾을 것이 아니며, 성불이라고 하는 것도 단지 스스로의 심성에 대한 지견(知見)으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선종의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교학 밖에 따로 전한 것으로 문자를 세우지 않고, 바로 마음을 가리켜 부처를 이루게 한다(敎外別傳 不立文字 直指人心 見性成佛)”는 구절이다. “선(禪)은 사고와 감정의 근원을 추적해 들어가는 수행법이며,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깨달음, 그 자체”이다.
또한 “그들(임제와 덕산)은 그 깨달음의 섬세한 느낌을 전달하기 위하여 시를 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란 언어의 설명적인 기능을 최대한 억제시킨 비언어적인 언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승들은 그들의 깨달음을 시를 통하여 표현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첫번째 선시의 출현(以詩寓禪)이다.”
무주생사(無住生死)·무주열반(無住涅槃)의 무주행(無住行)으로서 반야바라밀의 보살행을 근간으로 한 대승불교의 실천사상을 나타내는 것이 선의 정신이다. 언어를 부정하는 불립문자(不立文字)로 시작하는 선(禪)의 핵심은 ‘깨달음’에 있다.
말하자면 △‘변화하지 않고 멸하지 않는’ 상(常)과 변화하는 무상(無常) △고(苦)에 대립되는 낙(樂)과 무락(無樂) △정신과 육체의 결합체인 자기(自己)를 나타내는 아(我)와 아트만이나 영혼 같은 실체는 없다는 무아(無我) △망상이 일어나지 않는 정(淨)과 마음이 청정하지 못한 부정(不淨)의 양극단을 모두 부정하며 더 나아가 이 부정하는 생각까지도 부정하는 선은 그 종지(宗旨)가 불립문자·교외별전·직지인심·견성성불이다.
이는 달마대사가 그의 오성론(悟性論)으로 제시한 것으로 여기에서 “교외별전·불립문자는 문자로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한 이치를 별도의 방법을 통해 전한다는 말”이다. 또 직지인심·견성성불은 “사람마다 지닌 마음이 본래 청정하여 부처와 다름이 없으므로, 그 마음을 곧바로 가르침으로써 부처와 동일한 성품임을 깨닫고 해탈, 곧 성불(成佛)한다는 것이다.”
교외별전에서 ‘별(別)’은 “교(敎)가 아닌 심(心)으로써 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외별전·불립문자 대신에 이심전심(以心傳心)·불립문자(不立文字)로 설명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별전(別傳)의 선은 “언어 표현으로 전하지 않을 수 없을 때, 그 언어 표현은 되도록 압축 내지는 함축성을 띠어, 극도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선가문학은 말에 대한 불신에 근거하고 있지만 말로써 설명할 수 없는 선의 뜻을 말로 나타내 보이는 역설적 논법에 입각해 있다. 따라서 선시조의 이해에는 깊은 선의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선의 세계를 노래한 선시는 ‘무형식의 형식’이란 파격적인 특성을 갖는다. 선시조에서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격외적(格外的)인 형식과 표현이 나타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