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수 칼럼] 공정사회 위해 ‘형평성 평가제’ 도입 시급
공정사회 구현의 핵심적 실천 과제는 무엇보다 공정한 경쟁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적 틀을 만드는 데 있다. 19세기 후반 이래 사회과학자들은 다윈(C. Darwin)의 진화론을 사회발전 메커니즘으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즉 적자생존(適者生存, survival of the fittest) 이론의 핵심 개념인 ‘경쟁’을 ‘사회진화’의 기본 동력으로 인식해 경쟁의 원칙을 제도화함으로써 사회 전체의 지속적인 발전을 도모하고자 한 것이다.
경쟁규칙 공정화의 과제는 정치·경제·사회적 측면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정치적 경쟁은 1990년대 들어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고 관권선거가 사라지게 되면서 어느 정도 공정화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기득권을 옹호하는 경향성을 띠는 행정상의 불공정성은 크게 개선되지 않고 있다. 정부가 계급중립적 조정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규칙과 제도가 공정하게 설계되고 관리되어야 한다. 공정한 사회 제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2005년 7월 도입된 부패영향평가 제도처럼, 새 정책이나 제도를 설계할 때는 그것이 각 사회집단과 계층에 미치는 가치배분 영향을 사전에 분석해보는 가칭 ‘형평성평가제도’를 도입하는 것도 한 방안이 될 수 있다. 우리나라 정부는 부패영향평가 제도의 도입을 통해 2005년부터 2011년까지 5808개의 제ㆍ개정 법령에 대한 부패영향을 평가하여 그중 1058(18.2%)개 법령에 대해 2479건의 부패유발요인을 발굴, 소관기관에 개선을 권고하였다(국민권익위원회, 2011: 5).
특정 정책의 가치 배분 영향을 사전에 평가해보는 ‘형평성평가제도’는, 사업의 경제성을 사전에 평가해 보는 ‘예비타당성조사’ 제도 못지않게 큰 정치ㆍ행정적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경제적 경쟁규칙의 공정화는 주로 공정거래 제도를 통해 구현된다. 물론 경제 활동에 대한 전반적인 규율은 민법과 상법을 통해서도 이루어지지만, 공정성은 주로 공정거래법을 통해 확보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정부가 강력한 공정거래 질서확립 의지를 거듭 밝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정거래위원회가 스스로 평가하고 있듯이, 대기업-중소기업 간 불공정 거래 관행이 상존’하고 있을 뿐 아니라, ‘경쟁을 제한하고 가격을 교란하는 담합 및 독과점 행태’ 역시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시장의 불공정 관행이 근절되지 않는 근본 원인은 정부의 조치가 지나치게 미온적이라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대자본의 불공정 행태를 근본적으로 교정하기 위해서는, 기업이 문을 닫을 각오를 하지 않고는 공정거래 질서를 위반할 엄두를 내지 못하도록 엄정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일자리 창출’, ‘국민경제에의 기여’ 등을 명분으로 위반업체에 대해 상징적인 과태료만을 부과하는 재벌 편향적 풍토를 바꾸기 위해서는 대자본에 의한 관료집단 포획(capture) 통로부터 차단해야 할 것이다.
마침 우리나라에서는 2011년 9월 30일부터 민간기업의 ‘공정 경쟁 침해’ 행위를 신고한 내부고발자도 보호받을 수 있도록 한 ‘공익신고자 보호법’이 시행되고 있다. 기존의 ‘부패방지 및 국민권익위원회의 설치와 운영에 관한 법률’은 ‘공직자 부패’ 관련 행위 신고자만 보호받을 수 있도록 한정하고 있으나, 이 법에서는 기업의 불공정 거래 행위 고발도 ‘공익’의 범주에 포함시킨 것이다. ‘공익신고자 보호법’의 시행으로 대기업에 의한 공정 경쟁 침해 행위가 크게 감소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사회적 차원의 규칙 공정화를 위해서는 먼저 제도 곳곳에 뿌리박혀 있는 기득권 보호 장치부터 허물어야 한다. 사회적 경쟁 규칙의 공정화는 공정한 인사(人事) 절차를 마련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인사는 세상일의 근간이 되기 때문이다. 공공부문의 인사는 사회 전반에 광범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특히 공정해야 한다. 국회의 고위공직자 인사청문 기준이 상황에 따라 달라지고 공기업 사장추천 기준이 입맛에 따라 바뀐다면 일반 국민들은 얼마나 큰 가치 혼란을 겪을 것인가?
인사 절차의 공정성은 공개경쟁(open competition) 제도에 의해 확보될 수 있다. 동양 사회에서 수천 년 전부터 시행되어 온 과거(科擧) 제도와 서양 사회에서 19세기 말 도입된 실적제(實績制, merit system)는 공무원을 공개경쟁채용시험(open competitive examination)에 의해 선발하도록 제도화하였다. 외교부장관 자녀 특채 사건에서 보듯이 특별채용 제도는 자칫 방심하면 곧바로 기득권 보호 장치로 전락할 위험성을 지닌다. 특히 기준이 애매한 면접 등에 의한 전형제도는 공사(公私)부문을 막론하고 더욱 그러하다. 근년 들어 확대되고 있는 ‘입학사정관’ 제도도 그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겠다.
한국 사회가 지난 세기 경이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하게 된 배경으로는 여러 가지 원인을 들 수 있겠으나, 주된 요인 가운데 하나는 비교적 공정한 경쟁 시스템이 유지된 데서 찾을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그동안 사회경제적 계층 상승 통로로 교육ㆍ시험 사다리와 시장 사다리가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경제적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시장의 공정경쟁 시스템은 거대 자본들에 의해 급격하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교육ㆍ시험 사다리는 그나마 아직 우리 사회에서 작동되고 있는 계층간 이동통로다. 그러나 사회계층 구조가 고착화되면서 이 메커니즘도 점차 무력화됨으로써 적지 않은 우려를 불러일으킨다.
공정한 경쟁 규칙의 확립을 위해서는 또한 그 최후의 보루라 할 수 있는 사법적 공정성이 우선적으로 확보되어야 한다. 최근의 ‘스폰서 검사’ 사건, ‘벤츠 여검사’ 사건 등에서 보듯이, 끊이지 않고 불거져 나오는 사법부의 비리 사건은 사법 절차의 공정성과 신뢰성을 크게 훼손하고 있다. 법조계의 흐트러진 규범을 근본적으로 바로잡기 위해서는 고위공직자 비리수사처 신설과 같은 특단의 조치도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공직자들이 일상적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이해충돌 상황을, 제도적 장치를 통해 사전에 회피시켜 주는 것도 사회적 게임의 공정성 확보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우리 사회가 21세기에도 지속적 발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회 각 부문의 경쟁 시스템이 기득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왜곡·변질되지 않도록 사회구성원 모두가 감시의 눈을 소홀히 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