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수 칼럼] ‘아메리칸드림’ 혹은 “점령하라!”
지금은 그 의미가 많이 퇴색했지만, 미국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단어가 ‘아메리칸 드림’이다. 2012년 미국 대선에서도 미셸 오바마 영부인이 오바마 대통령을 ‘아메리칸 드림’의 본보기로 내세웠었다. 1989년 버클리대학에 교환 교수로 가 있을 때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되는 한 신문에 ‘아메리칸 드림’을 주제로 칼럼을 쓴 적이 있다. 20년도 더 된 옛 일이라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그 당시에 느낀 아메리칸 드림은, 일확천금을 꿈꾸면서 주말이면 편의점에 가서 ‘로또’를 사 맞춰보는 고달픈 보통사람들의 헛된 꿈이 아닌가 하는 취지로 글을 썼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난 30대 중반의 중동 출신 변호사는 “이제 돈은 벌만큼 벌었으니, 2~3년 내에 은퇴하여 앞으로는 세계 여러 도시로 크루즈여행을 다니는 여유 있는 삶을 살고 싶다”고 말했지만, 다른 한편에는 직업을 두세 개씩 가지고도 고달픈 삶을 이어가는 교민들도 적지 않았다. 당시의 내 눈에 비친 미국사회는 계층간의 소득격차가 지나치게 크고, 계층상승의 기회가 그렇게 넓게 열려 있지 않은 폐쇄된 사회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미국은 아직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다.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다. 미국의 경우 ‘기회균등’과 ‘능력주의’ 원칙을 요인으로 드는 사람들이 많다.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면 계층상승을 할 수 있는 ‘꿈과 기회’의 나라가 미국이며, 이러한 사회적 조건이 미국의 번영을 초래한 주된 요인이라는 것이다.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용어는 미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중심 개념이다. 이 용어는 1931년 미국의 역사가이자 문필가인 애덤스(James Truslow Adams)가 그의 저서 <미국의 서사시>(The Epic of America)에서 처음 사용한 말이다. 애덤스는 이 책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능력에 따라 보다 나은 삶과 부를 이룩할 수 있는 나라의 꿈”이라고 규정하였다. 이 용어는 그 뒤 진화하여 유럽과 대비된 신세계, 즉 ‘젖과 꿀이 흐르는 지상낙원’으로의 ‘신화적 이미지’(mythic images)와, 하느님에 의해 선택된 청교도의 나라라는 ‘종교적 이미지’(religious images), 그리고 ‘자연법’(natural laws)과 ‘자연적 권리’(natural rights)가 구현된 나라로서의 ‘정치적 이미지’(political images) 등 다양한 의미를 지닌 용어로 다양하게 분화되었다.
‘아메리칸 드림’은 ‘기회균등’과 ‘능력주의’를 바탕으로 사회구성원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면 계층상승을 이룰 수 있다는 미국인들의 꿈을 잘 나타낸 개념이다. 그러나 오늘날 아메리칸 드림은 고장났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봤자 그동안 수백만 이민자를 매혹시켰던 그런 계층상승을 이제는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고 적지 않은 미국인들은 불평한다. 기득권 계층이 사회 구석구석에 특권 장치를 제도화한, 막힌 사회가 오늘날의 미국이라는 것이다.
소득 양극화 현상만을 단순히 아메리칸 드림이 고장 난 증거로 내세울 수는 없겠으나, 미국의 계층간 소득격차는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있다. 오히려 양극화는 더 심화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미국 의회예산처(CBO)의 분석에 의하면 1979년부터 2007년 사이 소득 상위 80-99%의 소득은 65% 증가하는데 그친 데 비해, 상위 1%의 소득은 281% 상승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2008년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크루그만(Paul Krugman)의 분석에 의하면, 1967년부터 2008년까지 미국 가계소득의 최상위 5%와 20%의 소득은 크게 증가했으나 3분위(소득 41-60% 구간) 가구 즉 중산층의 소득은 1980년 이후 오히려 정체된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최하위 20%(81%-100%)의 소득은 오히려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1980년대 이후의 경제성장 과실은 최상위 계층 일부에 집중된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Krugman, 2012). 이러한 소득 격차의 심화가 2011년 미국의 여러 도시로 들불같이 번진, “점령하라!”(Occupy!)는 시위의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든 ‘아메리칸 드림’의 바탕을 이룬 ‘기회균등’과 ‘능력주의’의 규범이 그동안 미국을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로 만든 데 크게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평민에게까지 신분 상승의 기회를 폭넓게 열어준 로마의 정책이 세계 제국 건설에 기여하였듯이. 미국사회는 아직도 엘리트의 순환이 이루어지는 비교적 공정한 사회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기업환경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그렇게 판단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2006년 공정거래위원회가 지정한 기업집단 상위 40위 안에 든 신생기업이 1960년 이후 하나도 없는데 비해(1967년 창업한 대우그룹 제외), 미국에서는 시가총액 상위 40개 회사 중 13개가 1970년 이후에 설립되었다. 기업환경의 변화 없이는 사회발전은 먼 나라 얘기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의 또다른 과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