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것에 목숨 거는 당신께 드리는 ‘성탄절 질문’···”인간의 본질은?”

[아시아에=지춘경 포도나무교회 목사] 얼마 전 아내와 오페라 <프랑켄슈타인?을 보았다. 주인공은 빅터 프랑켄슈타인이다. 그는 인류를 병과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생명창조의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만난 친구 앙리는 빅터가 저지른 살인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교수대에서 처형받게 된다. 그 이유는 ‘친구의 꿈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에 빅터는 죽은 앙리의 형체에 생명을 불어넣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생명이 복원된 앙리의 모습은 괴물 그 자체였다.

새로운 피조물인 괴물은 세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절망과 슬픔 가운데 방황한다. 세상 그 누구도 그를 사랑해 주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의 창조주이자 친구인 빅터마저도 그를 버렸기 때문이다. 오페라는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것으로 끝난다.

오페라를 보면서 내게 한 가지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것은 “인간의 본질은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인간의 본질은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생명의 입김과 하나님의 마음인 사랑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났다. 그러나 오페라 주인공 빅터는 하나님의 마음인 ‘사랑’이 없이 생명창조라는 신의 영역을 넘어섬으로써 비극이 시작되었다.

무엇이 죽고 사는 문제인가

모든 만물은 사랑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섬기며 화목하며 살도록 창조되었다. 해와 달은 빛을 비침으로써 생명을 주었고 만물들은 하늘을 향해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또한 하나님은 공의와 진리 가운데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사랑과 평화가 넘치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길 소망하셨다.

또한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두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선악을 판단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다”(창세기 2:17)는 본질적인 사실을 인정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자신이 선악을 판단하는 주체가 되고자 하였다. 인간이 신처럼 되고자 하는 교만한 마음은 자아라고 하는 에고이즘과 나르시시즘으로 단단히 무장하게 되었으며 ‘만인에 대한 만인에 투쟁’이라는 이기적인 세상을 만들었다.

성경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에 나오는 사건들은 죄와 죽음의 연속이다. 창세기 6장11절은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고 기록돼 있다. 또한 아담의 계보에 의하면 ‘낳고 죽고’가 반복된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영생하도록 지어진 인간이 죄로 인해 부패할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죽는 것이다.

하나님은 처음이자 끝인 분이다. 다른 표현으로 하면 하나님 안에 거했을 때 우리는 영생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면 죽게 된다. 따라서 인생의 본질인 하나님 안에 머무르는 것은 인간이 자유로워지고 행복해지기 위한 첫번째 조건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죽고 사는 문제’, 즉 ‘영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그런데 조건이 있었다. 그것은 예수를 ‘주’로 인정하라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내가 주인이 되고 내가 왕이 되어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예수를 주인 되게 하고 왕 되게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영생할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를 메시아 즉 구세주로 믿는다는 사실은 ‘죽고 사는 문제’이며 결코 타협할 수 없는 본질에 관한 문제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자신을 메시아로 믿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무섭게 꾸짖는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것은 ‘죽고 사는 것’과 관련된 본질의 문제이기 때문에 이를 믿지 못하는 자들은 이미 ‘어둠의 자식들’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삶의 본질, 신앙의 본질 앞에서는 모든 것을 걸고 타협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을 어기면 살아 있으나 죽은 것이요 그 인생은 불행과 좌절과 고통만이 남기 때문이다.

본질이 아니면 관용하라

그러나 세상을 살면서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면 우리는 목맬 필요가 없다. 모든 것을 품고 관용해야 한다. 마태복음 18장21~35절에 보면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천국백성에 대해 가르치고 있었다. 그때 베드로가 나아와 예수께 묻는다. “주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하면 됩니까?”(마태복음 18:21)

이에 대해 예수께서 “일곱 번이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말한다. 셈법으로 하면 490번까지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이다. 당시의 랍비들은 이웃의 범죄는 3회까지만 용서하고 그 이상은 금지하라고 가르쳤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무한대로 용서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어서 예수께서는 용서해야 하는 이유를 예화를 들어 말했다. 예수는 먼저 “천국이 그 종들과 결산하려 했던 어떤 임금과 같다”고 정의한다. 왕이 결산을 하는 중에 10,000달란트 빚진 자가 있었다. 왕은 그에게 “네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팔아 빚을 갚으라”고 말한다. 이에 그 종은 엎드려 절하며 다 갚을 것이니 조금만 참아달라고 애원하는데 이를 불쌍히 여긴 왕이 그 빛을 탕감해 주었다.

그런데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100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사람을 만난다. 그를 만나서 목을 잡고 돈을 갚으라고 윽박지르다가 조금만 참아달라는 동료의 간청을 묵살하고 그를 감옥에 가두어 버린다.

이 장면을 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보고하였는데 이에 주인은 그 종을 잡아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빛을 전부 탐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마태복음 18:32-33) 그리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에게 넘겨 버렸다.

예수 당시의 유대와 로마 사회에서 1달란트는 노동자 한 사람의 품삯인 1데나리온의 6천배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10,000달란트는 한 사람이 20만년 가까이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었다. 따라서 왕은 종에게 10,000달란트 빚진 자를 용서해 주었는데 용서받은 종은 그 친구에게 100데나리온 빚을 갚지 않는다고 그를 고발하여 옥에 가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이 받은 은혜의 60만분의 일에 해당하는 가치를 가지고 친구를 용서하지 못한 것이다.

예수께서 예화를 통해 말씀하고자 하는 의도는 무엇일까? 우리가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은혜를 깨닫는다면 우리에게 빚진 자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표현으로 하면 ‘죽고 사는 문제’를 우리는 하나님 은혜로 해결하였는데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닌 것은 다 관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사소한 것들에 목매는 경우가 가끔 있다. 주차문제로 이웃 주민을 살해하는가 하면, 얼마 전에는 할머니들끼리 사소한 다툼 때문에 사이다에 살충제를 타서 2명을 숨기게 하는 일도 발생했다.

그러나 이 같은 미움의 감정의 이면에는 자신이 선악을 판단하는 주체가 되고자 하는 이기심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주인 되고자 하는 자아가 손상되었기 때문에 남을 미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폭발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태복음 6:14~15)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친 직후에 한 말씀이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의 핵심은 용서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소한 것들에 목매지 말자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기 원하는 것을 형제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것은 기독교의 황금률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자비를 얻고자 하면 형제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하고, 하나님과의 화해를 원하면 형제와 화해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 달리실 때 자기를 못 박는 자들을 위해서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복음 23:34)라고 기도하셨다.

또한 스데반집사도 유대인들로부터 돌에 맞아 죽으면서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사도행전 7:60)라고 기도했다. 이것이 바로 관용의 단계를 넘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죽음으로 실천한 이들의 모습이다.

우리는 평소에는 관용하기가 어렵다. 더욱이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시피 하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주로 믿고 예수의 마음 안에 거할 때 관용할 뿐만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는 단계에 까지 이를 수 있다.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세상의 모든 미움과 시기와 질시를 다 감당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사소한 것들에 목매지 말아야 한다. 미움은 부질없는 자기애의 감정적인 찌꺼기일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진리 안에서의 자유와 행복을 맘껏 누리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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