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리고 시냇가 나무처럼 흔들리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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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엔=지춘경 포도나무교회 목사] 요즘 권력의 어두운 모습들이 매일처럼 새롭게 드러나고 있다. 권력은 통제되지 않으면 이처럼 타락하는 것이다. 이 어둠의 세력들에 의해서 말 한마디 못하고 힘들어 했을 영혼들이 얼마나 많은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할 길이 없던 한 경찰관은 권력의 메커니즘 앞에서 자살로서 불의한 권력에 항거했다. 그런데도 언론은, 수많은 인권단체들은, 또한 우리는 오랫동안 침묵해 왔다. 그것은 귀가 있으나 듣지 못하고, 눈이 있으나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10:23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 뒤에는 “너희가 듣는 것을 듣는 귀가 복이 있다”는 말씀이 생략되어 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들어야 하고 무엇을 보아야 한다는 말인가? 과연 우리가 듣고 보는 것은 실상이 아니란 말인가?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 답해야 할 필요가 있다.

팔레스타인으로 전도 떠난 70인

누가복음 10:17에 보면 팔레스타인 각 지방으로 복음전도를 떠났던 70인의 전도대가 이제 예수님께 돌아와 사역의 결과를 보고하는 장면이 나온다.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님의 70인 제자들은 복음전도의 수단으로 병 고치는 능력과 귀신 쫓는 권능을 행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보이지 않는 귀신들이 주님의 이름 앞에서 쫓겨나가는 것을 보고 신기해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감격과 기쁨 가운데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라며 흥분해서 말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보고를 받으시고, “사단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이 귀신들을 추방할 때, 귀신들의 왕인 사단이 그 보좌에서 추락하는 것을 신령한 눈으로 똑똑히 목도했던 것이다.

보이는 것에 기뻐할 것인가, 안 보이는 데 충실할 것인가?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신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누가복음 10:20)

이 말씀을 하시고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기뻐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기뻐하셨다’는 표현은 복음서에 유일한 구절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 그렇게 기뻐하셨을까? 앞뒤의 문맥으로 볼 때 이 기쁨은 단순히 인간적인 감정에서 나온 기쁨이 아니다. 복음전도로 인해 사람들이 회개하며 더 이상 죄의 노예로 종노릇할 필요가 없게 된 사실로 인해 기뻐한 것이다. 사단의 왕국이 무너지고 하나님이 나라가 세워짐으로 인해 기뻐하셨던 것이다.

제자들의 기쁨과 예수님의 기쁨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제자들은 보이는 것으로 인해 기뻐하였으나,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인해 기뻐하셨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돌아보시고 조용히 말씀하신다. 중요한 교훈을 주시려는 것이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누가복음 10:23-24)

보지 못하는 것들에 관해

예수님은 늘 우리와 다른 차원에서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베짱이와 하루살이가 하루 종일 놀다가 베짱이가 하루살이에게 말했다. “우리 내일 만나서 또 놀자” 하루살이는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에게는 내일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벽에 갇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때문에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지 못하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삶의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 예수님과 같이 멍에를 메고 그에게 배워야 하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늘 영으로 말씀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육으로 듣기 때문에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이다. 육은 육이요 영은 영이다. 즉 육이 영을 알 수 없고, 영이 육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보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성령으로 거듭나 삶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여리고 지역에 가면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있다. 물이 귀한 여리고의 시냇가에 뿌리를 내린 나무는 어찌나 울창하고 아름다운지 모른다. 이것이 바로 복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내린 인생이 이처럼 형통의 복을 누리는 것이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죄

선악과를 따먹기 전의 인간은 하나님과 소통하였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에게 욕망이라는 죄가 들어왔으며 이것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켰다. 그래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를 못하게 된 것이다.

죄의 속성 중 가장 강한 것이 소유욕이고 다음이 명예욕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욕망은 늘 남의 눈을 의식하게 만든다. 그래서 선악과를 떠먹은 인간들이 제일 먼저 보게 된 것이 자신의 벌거벗은 상태였던 것이다. 이 욕망들은 인간을 끊임없이 병들게 하고, 타락하게 하며 결국은 죽음에 이르게 한다.

따라서 이것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예수와 함께 죽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의 부조리 앞에서, 하나님의 실존 앞에서 영원한 방랑자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소유욕과 명예욕으로 가득 찬 나의 자아를 죽여 예수님의 참 진리 앞으로 나아와야 한다. 이것이 바로 겸손이며 보는 것을 보는 눈의 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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