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고의 화폐 탐구] 사우디 화폐, 국왕 바뀔 때마다 돈도 변화···왕권 얽힌 슬픈 사연 담겨
[아시아 화폐탐구 사우디 리얄(SR)] 성지 디자인···이슬람 종가 자부심
사우디 화폐들을 잘 분석하면 현재 중동의 정치가 소용돌이 치는 원인을 알 수 있다. 즉 사우디 화폐 속 인물과 장소를 통해 사우디와 중동역사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필자가 처음 사우디 화폐를 수집한 때는 2007년 겨울이었다. 방학을 맞아 터키에 갔었는데, 화폐를 모은다는 것을 아신 친한 아주머니께 50리얄(SR)을 받았다. 얼마 전 성지 순례 차 메카에 다녀오신 아주머니는 돈을 주시면서 “얘야, 이제 이런 돈들이 곧 없어진단다. 다음에 이 돈을 다시 보기 힘들 거야!”라고 하셨다. 1984년부터 쓰인 50리얄은 아주머니 말씀대로 2007년에 사라졌고, 새로운 화폐들이 발행됐다. 그 돈 앞면의 인물은 이전 국왕 파드 빈 압둘 아지즈(Fahd Bin Abdul Aziz)였다. 파드 국왕은 건강이 나빠지면서 2000년부터 동생 압둘라 빈 압둘 아지즈(Abdullah ibn Abdilaziz)에게 실권을 넘겼고, 2005년 그가 사망하자 이미 권력을 이어받은 압둘라 왕세자가 국왕이 됐다. 새롭게 발행된 화폐에 자연스레 현직 국왕의 초상화가 새겨졌고, 동시에 20리얄과 200리얄이 모습을 감추었다. 이렇듯 사우디 화폐가 새롭게 발행되던 시기를 보면 국왕이 바뀔 때마다 돈도 함께 변화하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원래 각 나라의 지폐를 소개할 때 액수가 작은 돈부터 설명하지만, 이번에는 제일 큰 돈부터 살펴보려 한다. 사우디 지폐 중 최고액권은 500리얄이다. 한화로 약 13만원이 넘는 500리얄에는 압둘라 빈 압둘 아지즈 현 국왕이 아닌, 사우디를 세운 압둘 아지즈 알 사우드(Abdulaziz Al Saud) 초대 국왕이 있다. 여기서 신기한 점은 초대 국왕 다음에 5명이 차례로 국왕이 되었는데, 모두 다 압둘 아지즈 알 사우드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이다.
500리얄 앞·뒷면을 장식하고 있는 곳은 사우디 메카(Mecca)에 있는 이슬람 신전 ‘카바(Ka‘bah)’다. 이슬람교도들은 카바를 향하여 예배한다. 전 세계 인구 20%인 약 15억만명이 그 건물을 향해 하루 5회 예배를 드리며, 카바로 순례를 향한다. 필자가 보기에는 사우디 정부가 이슬람 종교 핵심 건물인 카바를 자국 지폐에 넣음으로써 그 자부심을 통해 이슬람 세계에 어떤 메시지를 주려는 것 같다.
최고액권 500리얄 앞뒷면 신전 ‘카바’ 장식
두 번째로 큰돈은 100리얄이며, 한화로 약 2만7천원의 가치를 지닌다. 500리얄을 제외하면 모든 사우디 지폐 앞면에 압둘라 빈 압둘 아지즈 현 국왕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압둘라 국왕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형제들 중 가장 평화롭게 왕위에 오른 사람이다. 사우디 왕국에선 쿠데타가 빈번히 발생했고 초대 국왕 압둘 아지즈 알 사우드가 별세한 뒤, 그를 이어 아들 사우드 빈 압둘 아지즈가 왕이 되었지만, 가문 내 잦은 파벌투쟁으로 반란이 일어나 왕권에서 물러나게 됐다. 나머지 왕들도 같은 운명에 처했고, 이후로도 왕권에 얽힌 형제들의 슬픈 사연들이 오고 갔다.
100리얄도 500리얄처럼 앞면과 뒷면에 비슷한 그림이 놓여있다. 500리얄이 메카를 상징한다면 100리얄은 이슬람의 성지 메디나(Medina)를 대표한다. 100리얄에 그려진 건물은 ‘사도의 사원’이라는 의미를 가진 알 마스지드 알 나바위(Al Masjid al Nabawi)다. 알 마스지드 알 나바위는 이슬람의 첫 사원이고, 무함마드 사도의 묘지가 있는 성스러운 장소다. 이슬람교에서 메카의 카바 다음으로 성스럽게 여기는 곳이다. 평생 한번은 성지순례를 떠나야 하는 의무를 가진 이슬람 신도들은 카바를 돌아본 후, 메디나에 가서 알 마스지드 알 나바위를 방문한다.
사우디 돈 가운데 가장 신기한 화폐는 역시 50리얄이다. 50리얄 앞면에 있는 건물은 ‘바위돔(Dome of the Rock)’이라고도 불리는 마스지드 쿱밧 아스-사크라(Kubbet es Sakhra)다. 현존하는 이슬람 건물들 중 가장 오래 됐고, 사우디가 아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있다. 그리고 뒤쪽에 있는 건물은 알 악사(Al-Aqsa)사원으로 이슬람에서 카바, 알 마스지드 알 나바위 다음으로 성스럽게 여기는 사원이다. 역시 이 사원도 마스지드 쿱밧 아스-사크라처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위치한다.
타국이 자국 역사유적지를 지폐에 담았다면 유적지를 보유한 국민들은 자부심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한편으론 위협이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불국사가 아르헨티나 화폐에 그려져 있다면 한국인 눈에는 자랑스러운 현상이지만, 한국과 가까운 중국이나 일본이 한라산을 자국 화폐에 새긴다면 뭔가 어색하게 느껴질 것이다.
현재까지 사우디는 다수의 이슬람 국가들처럼 이스라엘과 공식 수교를 맺지 않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불안감을 느낄지도 모르나 이스라엘이 이 문제에 대해 그렇게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사이 유적도 담아
알 악사와 쿱밧 아스-사크라 사원은 팔레스타인 자치구에 있지만, 이스라엘 정부는 애초부터 두 사원이 위치한 지역을 자국 영토에 합병하려 했다. 또한 이스라엘 정부는 2009년부터 알 악사 사원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사우디를 포함한 많은 이슬람 국가들은 팔레스타인 자치구 독립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사우디 왕국이 이 두 곳의 성지를 자국 화폐에 담는다는 것은 이스라엘을 협박하는 것이 아닌, 팔레스타인과 함께 이슬람문화권에서 3번째로 중요한 지역의 독립을 원한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