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3월 3일, 인산은 자식들을 모두 불러 모아놓고 후세에 남기는 마지막 유언을 하였다. 유언이라고 해서 일반인들처럼 ‘무슨 재산을 어떻게 처리하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

1992년 3월 3일, 인산은 자식들을 모두 불러 모아놓고 후세에 남기는 마지막 유언을 하였다. 유언이라고 해서 일반인들처럼 ‘무슨 재산을 어떻게 처리하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
함양에 내려와서 6년 동안 인산은 노구(老軀)를 돌보지 않고 찾아오는 환자들을 상대했고, 틈틈이 공개 강연회를 열어 자신이 알고 있는 신의학(神醫學)의 비밀을 세상에 알렸다. 이제 자신이 임종의
1988년, 어느덧 인산의 나이 팔십 하나였다. 술을 통해서나마 무지한 현실을 망각하고 싶어했고 고통뿐인 지구를 한번 떠나면 두 번 다시 오지 않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인산의 육신도
<신약>의 출간 이후 난치병으로 꼼짝없이 죽을 날만 기다리던 전국의 암환자들이 지리산 도사를 찾아 함양으로 몰려들어와 인산은 평생 그러하듯이 무료 처방을 써주었고 말기암으로 병원에서 포기한 환자들은
인산은 1957년 처음으로 경상남도 함양 땅에 발을 들여놓은 이래 두세 차례에 걸쳐 2~3년씩 그곳에 내려가 산 적이 있다. 그러다가 73세가 되던 1981년에는 아주 내려가 그곳
인산이 수송동에서 살던 시절은 여러 모로 뜻있는 시기였다. 앞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변함없이 수많은 난치병 환자들을 일으켜 세워 새로운 인생의 활로를 열어주었던 보람은 말할 것도
서울 종로구 수송동에 종전까지 혈액은행으로 사용하던 건물이 있었다. 개인 소유의 그 건물은 대지 2백여 평에 연건평 60여 평의 2층 구조였는데, 소유자가 그 건물을 담보로 하여
서울 광나루 부근의 어느 절에 법명(法名)도 없이 그저 ‘어(魚) 대사(大師)’라고 불리며 지내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승려도 아니었고, 오랜 세월 동안 그 절에서 더부살이를 하는 사람이었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세상은 마치 새로운 천지가 열리기라도 한 듯 들떠 있었다. 하지만 세상의 변화라는 것조차도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인산은 잘 알고 있었다. 만년(萬年) 대통령으로서
인산은 해방 이후 이북에서 아내를 데려온 이후로 1992년 사망할 때까지 도합 여든 번의 이사를 하였다. 짧게는 한 달에서 길게는 2~3년간 머물러 살던 곳에서 또 다른
1967년 봄, 서울 중구 충무로 5가에 위치한 성혜(聖惠)한의원의 현관문을 요란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이미 외출 채비를 갖추고 있던 인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20여 분 전에
기적일까 신의 조화(造化)일까 박인순(가명)은 어렸을 때 감나무에 올라갔다가 떨어져 한동안 앓은 뒤에 등뼈가 구부러진 척추 장애인이었다. 그 뒤로 ‘꼽추ㆍ곱사등이ㆍ병신’ 따위의 놀림을 받으며 자랐고, 나이 30이
인산은 약속시간에 맞추어 서울 삼각지 로터리 한켠에 자리잡은 OO다방으로 갔다. 미군부대에서 일하는 남씨 성을 가진 문관(文官) 한 사람을 알게 되었는데, 그의 간청에 따라 그날 그
인산의 아내 장영옥은 가녀린 몸에도 정신만큼은 평안도 출신의 여성답게 강인하였다. 어린 나이에 천하에 다시 없을 특이한 남편을 만나 그의 등 뒤에서 온갖 신고(辛苦)를 겪으면서도 불평
애초에 인산이 함양으로 간 데에는 운둔하고자 하는 뜻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함태영 부통령과 김병로 대법원장을 중간에 내세워 이기붕을 차기 부통령으로 해서 자신이 4대 대통령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