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3월 3일, 인산은 자식들을 모두 불러 모아놓고 후세에 남기는 마지막 유언을 하였다. 유언이라고 해서 일반인들처럼 ‘무슨 재산을 어떻게 처리하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
Author: 최은아
[인산 김일훈 73] 인류를 병마에서 구제할 ‘신약본초’ 남기고
함양에 내려와서 6년 동안 인산은 노구(老軀)를 돌보지 않고 찾아오는 환자들을 상대했고, 틈틈이 공개 강연회를 열어 자신이 알고 있는 신의학(神醫學)의 비밀을 세상에 알렸다. 이제 자신이 임종의
[인산 김일훈 72] 세상을 구하기 위해 왔던 ‘큰 빛’
1988년, 어느덧 인산의 나이 팔십 하나였다. 술을 통해서나마 무지한 현실을 망각하고 싶어했고 고통뿐인 지구를 한번 떠나면 두 번 다시 오지 않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인산의 육신도
[인산 김일훈 71] “지리산 초막은 지구촌 최고의 암센터였다”
<신약>의 출간 이후 난치병으로 꼼짝없이 죽을 날만 기다리던 전국의 암환자들이 지리산 도사를 찾아 함양으로 몰려들어와 인산은 평생 그러하듯이 무료 처방을 써주었고 말기암으로 병원에서 포기한 환자들은
[인산 김일훈 70] 중병 앓는 뭇생명 건진 ‘우주와 신약’
인산은 1957년 처음으로 경상남도 함양 땅에 발을 들여놓은 이래 두세 차례에 걸쳐 2~3년씩 그곳에 내려가 산 적이 있다. 그러다가 73세가 되던 1981년에는 아주 내려가 그곳
[인산 김일훈 69] 화상환자를 완치시키다
인산이 수송동에서 살던 시절은 여러 모로 뜻있는 시기였다. 앞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변함없이 수많은 난치병 환자들을 일으켜 세워 새로운 인생의 활로를 열어주었던 보람은 말할 것도
[인산 김일훈 68] 수송동 혈액은행 시절
서울 종로구 수송동에 종전까지 혈액은행으로 사용하던 건물이 있었다. 개인 소유의 그 건물은 대지 2백여 평에 연건평 60여 평의 2층 구조였는데, 소유자가 그 건물을 담보로 하여
[인산 김일훈 67] 소경의 눈을 뜨게 하다
서울 광나루 부근의 어느 절에 법명(法名)도 없이 그저 ‘어(魚) 대사(大師)’라고 불리며 지내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승려도 아니었고, 오랜 세월 동안 그 절에서 더부살이를 하는 사람이었는데,
[인산 김일훈 66] 드러내놓을 수 없는 병, ‘간질’을 치료하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세상은 마치 새로운 천지가 열리기라도 한 듯 들떠 있었다. 하지만 세상의 변화라는 것조차도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인산은 잘 알고 있었다. 만년(萬年) 대통령으로서
[인산 김일훈 65] 결핵성 척수염을 치료하다
인산은 해방 이후 이북에서 아내를 데려온 이후로 1992년 사망할 때까지 도합 여든 번의 이사를 하였다. 짧게는 한 달에서 길게는 2~3년간 머물러 살던 곳에서 또 다른
[인산 김일훈 64] 독극물 중독자 치료···꺼뜨릴 수 없는 생명의 불꽃
1967년 봄, 서울 중구 충무로 5가에 위치한 성혜(聖惠)한의원의 현관문을 요란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이미 외출 채비를 갖추고 있던 인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20여 분 전에
[인산 김일훈 63] 척추장애인 뜸으로 치료
기적일까 신의 조화(造化)일까 박인순(가명)은 어렸을 때 감나무에 올라갔다가 떨어져 한동안 앓은 뒤에 등뼈가 구부러진 척추 장애인이었다. 그 뒤로 ‘꼽추ㆍ곱사등이ㆍ병신’ 따위의 놀림을 받으며 자랐고, 나이 30이
[인산 김일훈 62] 국적·인종·신분 관계없이 오직 질병 치료에 혼신의 힘
인산은 약속시간에 맞추어 서울 삼각지 로터리 한켠에 자리잡은 OO다방으로 갔다. 미군부대에서 일하는 남씨 성을 가진 문관(文官) 한 사람을 알게 되었는데, 그의 간청에 따라 그날 그
[인산 김일훈 61] ‘운명’…두살배기 윤수 남기고 떠난 아내 장영옥
인산의 아내 장영옥은 가녀린 몸에도 정신만큼은 평안도 출신의 여성답게 강인하였다. 어린 나이에 천하에 다시 없을 특이한 남편을 만나 그의 등 뒤에서 온갖 신고(辛苦)를 겪으면서도 불평
[인산 김일훈 60] 함양 삼봉산 살구쟁이의 ‘김함배기’
애초에 인산이 함양으로 간 데에는 운둔하고자 하는 뜻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함태영 부통령과 김병로 대법원장을 중간에 내세워 이기붕을 차기 부통령으로 해서 자신이 4대 대통령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