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산 김일훈 74] 한의학 새 지평, 평생 뭇생명 구제 ‘의황’

국내 최초 죽염 발명가이자 한방 암의학 창시자인 인산 김일훈 선생(1909~1992)은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로도 활동했다.

1992년 3월 3일, 인산은 자식들을 모두 불러 모아놓고 후세에 남기는 마지막 유언을 하였다. 유언이라고 해서 일반인들처럼 ‘무슨 재산을 어떻게 처리하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 나라와 백성들이 인간으로서 올바로 살고, 사는 동안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길이 무엇인지 일러주는 내용이었다.

“……인업(人業)을 중시하는 나라가 잘살게 되는 법이야. 자원 중에 으뜸이 국민이란 걸 다스리는 사람이나 백성들 스스로가 잊어서는 안 된다. 현대그룹을 일으킨 정주영씨나 삼성의 이병철씨 같은 사람을 보면 잘 알 수가 있는 것이지. 우리에게 많은 고통을 안겨주긴 했지만, 인업을 중시한다는 점에서는 일본에게서 배울 점이 있어. 인업을 중시하여 큰 부자들이 많이 생겨나야 나라 전체의 경제가 자연적으로 풍요롭게 되는 것이지.…예전에 비해 물질적으로는 월등히 풍족해진 요즈음 사람들은 그와는 반대로 정신적인 빈곤 속에 빠져 있게 되었다. 그래서 각종 종교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부흥하고 있는 것이지. 하지만 종교라는 게 근본적으로는 민심을 현혹하는 폐단 위에 존재하는 것이라서……. 하물며 별 해괴망측한 교리를 가지고 무지몽매한 사람들을 꾀어내 패가망신케 하는 종교들도 많잖아? 그게 다 현대인들이 정신적으로 느끼는 배고픔 때문이지.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

‘효(孝)’라는 가치관을 제대로 지니고 사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공허해지지 않는 법이야. 인간은 육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부모로부터 이어지는 계통을 바탕으로 존재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알아야 해. 지금은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 자식들이 부모에게 효도를 다해야 한다는 미덕이 희미해졌지만, 그것을 바로 세우지 않으면 인간 세상에서 희망이라 것을 찾을 수 없게 되고 말아. 가장 좋은 방법은 국가가 정책적으로 ‘효’의 중요성을 알리고, 모든 국민들이 생활 속에서 그것을 실천해 나가는 풍토를 조성하는 것이지……종국에 가서는 모든 종교가 한 가지로 귀결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사람마다 효심을 갖게 되면, 그게 한 가지로 통일되는 것이다. 효심이란 것이 한 가지이지 두 가지, 세 가지일 수는 없지 않겠느냐? 그래서 나는 ‘효’의 의미를 세밀히 가르치고 그것을 철저히 실천해 나간다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들이 그 범주 안에 귀속될 것이라고 본다. 그렇게 되면 통일하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저절로 종교의 통일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저절로 이루어져야지 억지로 하려고 하면 힘든 것 아니겠니? 내가 후세에 남기는 말 가운데 중요한 하나는…… 지구상에 종교가 여럿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여야 한다. 마음이라는 게 ‘효심’을 이루면 그게 곧 천심(天心)이고 도심(道心)을 이룬 것인데, 그 마음을 여럿으로 쪼개어 나눌 수가 있겠느냐? ‘효’라는 건 백행(百行)의 근본이므로, 모든 종교를 다 아우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죽는 날까지 만인이 ‘효’로써 각자의 삶을 일관하기를 바라는 것이다.”(<신약본초神藥本草> 959쪽)

육신의 기운이 거의 탈진한 상태에서 가까스로 침상에 일어나 앉아 얘기하는 인산의 말소리는, 듣고 있는 자식들의 가슴에 천둥 같은 울림으로 전해졌다. 모두들 아버지에 대한 한없는 존경과 사랑을 느끼고 있었기에, 아니 단순히 육신의 아버지로서뿐 아니라 인생의 크나큰 스승이었던 인산이 남기는 말이었기에 한마디 한마디가 그렇게 크게 들렸던 것이다. 인산의 침상 머리맡에는 언젠가 그가 직접 써서 표구해 놓은 휘호(揮毫) 두 점이 걸려 있었다.

壽福蒼生 지구촌 가족 모두 장수하고 복된 삶을 누리기를 바라며
終身之願忠孝 이 목숨 마칠 때까지 원하는 것은 충효요,
一生之望救世 내 평생의 소원은 인류를 구제하는 일이라.

1992년 5월 19일 임종을 위해 아들들-장남 윤우, 차남 윤세, 3남 윤수, 4남 윤국이 모여들었다. 삼남 윤수는 그날 새벽 아버지가 흰 도포를 입은 외출 차림에 흰 운동화를 신고 ‘나는 간다’ 며 대문을 나서는 꿈을 꾸고 일어나면서 가슴이 서늘해져 하루종일 마음이 언짢았다.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불규칙적인 호흡만을 거듭하던 인산은 오후 11시 25분경 이 세상 기운을 마지막으로 들이마신 뒤에 다시는 내쉬지 않음으로써 영면에 들었다.

중앙 일간지들은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의학자인 인산 선생이 19일 저녁 11시 25분경, 향년 84를 일기로 별세하였다’는 소식을 사진과 함께 보도하였다. 3일장을 치른다는 것과 21일 오전에 발인하여 함양읍 삼봉산 인산농장 내의 장지에서 정오에 영결식을 갖는다는 소식도 덧붙이고 있었다.

세상의 한쪽에 어둠으로서 존재하는 질병을 물리치고, 그 어둠을 밝히기 위해 빛으로 왔던 이는 자신의 빛을 그대로 세상에 남겨놓은 채 홀연히 떠났다. 바로 이틀 전, ‘내일 모레에 나는 떠난다’고 한 고인의 말 그대로, 인산의 법구(法軀)는 5월 21일 3개월여 동안 누워 지낸 윤세의 집을 나섰다. 고인에게는 고향이나 다름없으며 그의 자손들이 뿌리를 내리고 사는 곳인 함양읍을 가로질러 흐르는 위천가에서 노제를 지낸 뒤, 인산의 법구를 안치한 꽃상여는 그가 생전에 머물면서 내방 환자들을 상담하기도 했던 인산농장으로 향했다.

상여에 앞서 가는 오색 만장(輓章)들은 바람에 펄럭이며 애통해 하는 울부짖음을 그 몸부림으로 표현하는 듯했고, 하늘은 오히려 ‘80여 평생 동안 고통밖에 없었던 지구를 떠나게 됨’을 축복하듯 푸른 기운을 더한 가운데 5월의 아름다운 햇빛을 비쳐주었다. 그리고 그 속으로 유족들과 조문객들의 기나긴 행렬이 뒤를 따랐다.

전국 각지에서 인산의 부음을 듣고 달려온 조문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농장 입구의 장지에서 거행된 영결식은 이 세상에 남겨진 이들이 가신님의 고귀한 뜻을 새롭게 마음에 새기는 자리가 되었다. 그러나 시조시인 이상범 선생이 쓰고 불교신문사의 최정희 부국장이 낭독한 조시(弔詩)는 끝내 영결식장을 영별(永別)의 슬픔을 가누지 못해 터져 나오는 울음의 도가니로 만들고 말았다.

녹음의 산하마저 이제 마냥 숙연하고
팔십 평생 구료의 길, 님의 품은 넓었는데
이제 또 어느 누가 있어 고된 외길 밟겠는가?

하늘이 점지하신 신룡(神龍)이 아니던가
아버지, 할아버지 명의(名醫)셨던 그 터전에
어려선 ‘귀신 붙은 아이’ 신동(神童)이라 오해받고…

너무 조숙하여 열여섯에 집을 떠나
광복 위해 혼을 던져 옥고인들 오죽했으리
끝없는 유랑의 길엔 막노동과 치병(治病)의 날.

일경에 쫓기며 백두산 묘향산을 이십여 년
공사판 일 그리고 훈장 생활
그 사이 불치병 난치병에 인술의 손 펼쳤나니,

죽염의 원리를 아홉 살에 터득하고
열여덟엔 아홉 번 구워 죽염을 완성했네
천하에 으뜸가는 신약(神藥), 이만하다 하겠는가?

때로는 쑥뜸으로 장님을 눈뜨게 하고
진폐증을 완치하여 삶을 찾아주었네
한평생 안주(安住)를 버린 신의의 길, 구세의 길.

떠도는 인술의 발길 이사만 팔십여 회
집 한 칸 장만하기 그토록 힘에 겨워
쉰여섯 저문 나이에 문패 하날 달았었네.

님께서 펴낸 <구세신방(救世神方)> 그리고 <신약(神藥)> 등등
또다시 펼쳐 보일 <신약본초(神藥本草)> 초고 앞에
이승을 떠나시다니 믿어지지 않습니다.

산천은 녹음을 이고 짙푸른 빛을 띠고
세상의 온갖 기운 당신 위에 어렸으니
크나큰 당신의 위업 두고두고 기립니다.

이 나라 이 기운엔 기가 가득 몰렸으니
이 기를 머리에 이고 당신 뜻을 따르리다
멀고 먼 극락의 길에 연꽃 만발하소서.

고개를 돌려 둘러보면 온 산에 봄꽃이 만개해 있었다. 참으로 화창한 봄날이라는 게 유족들과 조문객들의 마음에 더욱 서럽고 애달프게만 느껴졌던 그 자리였다.

인산 선생의 49재는 고인이 1986년 가을에 죽염 굽기를 재개했던 인연이 있는 지리산 실상사에서 1992년 7월 6일 봉행되었다. 자신의 사후에 공개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던 선생의 저술 <신약본초>는 이날 선생의 영전에 봉정된 후 세상에 반포되었다. 그 책은 자신의 밝은 눈으로 통찰한 우주의 비밀을 가슴 속에 감춰두거나 세속의 가족에게만 남모르게 전수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 지구인을 자식으로 품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며 세상에 훌훌 털어놓고 허허롭게 살다 간 선생의 태양보다 밝은 지혜가 빚어낸 또 하나의 위대한 신의학(神醫學)의 결실이었다.

“나는 의학과 약학 창조에 전무후무(前無後無)하고 지감혜명(智鑑慧明)한 선각자이다. 옛적 지구촌의 선각자는 아시아에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자(天上天下 唯我獨尊者)’가 고금을 통하여 계승한다. 그러나 금일은 인지미달(人智未達)한 사회에 지도자의 선법폐단(宣法弊端)은 위험하고 무능에 손색이 없으니 얼마나 무서운가. 암과 난치병으로 생명과 재산을 바친 수십억의 대중에 나는 무능하여 미안할 뿐이다. 선각자의 무능은 대중의 무지에서 빛을 가리고 만다. 그러나 지금은 핵독(核毒)의 피해가 극에 달하는 시점이므로 나의 지혜는 대중의 전도를 밝히는 광명이요, 태양등(太陽燈)이며 구명경(救命鏡)이다. 현재 지구촌 가족이 50억에 달하나 그 생명을 좌우하는 난치병 중에서 제일 두려운 암병 치료법은 이 사람 장중(掌中)에 있고 후일 영원히 지구촌 가족의 운명도 이 사람이 전하는 기록 중에 있는 태양같은 혜명(慧明)에 있다. 이 사람의 지혜는 이 세상 지구촌 가족에게 억천만년을 명랑(明朗)하고 행복하게 하는 수정궁(水晶宮)의 보경(寶鏡)이다. 그러나 선각자를 속박하는 무지인(無智人) 소행에 팔십 일 년 간 괴로운 심정은 앙천(仰天)하며 일생을 비참하게 살아왔다. 그리하여 지구촌의 광명을 수평으로 이룩하고 갈 이 사람은 최악의 세파에 파죽지세로 고범행로(孤帆行路)가 험난하기만 한 일생 풍운아였다.”(<신약본초>980쪽)

사운정思雲亭
                                                  인산仁山 김일훈金一勳 (1909~1992)
天降儒仙手植林 하늘이 내린 선비신선 심은 상림에서
渭城詩伯揖相尋 위성음사의 시인들 서로 읍하며 찾네
大黃大野金波動 크게 누런 큰 들에 황금 물결 움직이고
長碧長空玉露深 길게 푸른 긴 하늘에 옥같은 이슬 짙네
志樂古今神聖志 뜻은 고금 성현의 뜻을 즐거워하고
心通歷代俊雄心 마음은 역대 영웅의 마음을 통하네
社中賢士治平日 위성음사의 회원 선비들 태평 시대에
擧世孝親頌德音 온 세상이 효도스런 덕성을 칭송하네
                                                        삼남 김윤수 근역

다음은 인산 김일훈 선생 연보다

1909년 함경남도 흥원군 용운면에서 아버지 김경삼(金慶參)과 어머니 강릉(江陵) 유씨(劉氏)사이의 7남 2녀 중 3남으로 탄생.

1915년(7세) 여름 어느 날 비 개인 하늘의 오색 무지개를 보고 우주의 비밀과 자연물의 약리작용을 깨달아 이때부터 구료(求療) 활동 시작.

1916년(8세) 독사에 물려 죽어가는 환자를 명태국으로 고치고 또래 아이의 폐암을 치료.

1917년(9세) 죽염발명.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한번 굽는 약소금 제조법’을 개량, 발전시켜 대나무에 소금을 다져 넣고 황토로 입구를 봉한 다음 소나무 장작불로 굽기를 아홉 번 반복하여 고열로 용융시키는 세계 최초 ‘죽염(竹鹽)’의 제조법을 창안.

1924년(16세) 의주읍에서 행패를 부리던 일본인 소년들을 때려눕힌 뒤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가서 변창호 선생이 대장으로 있던 독립군‘모화산 부대’에 입대, 독립운동에 투신

1926년(18세) 독립투사로 피신해 있으면서 평안북도 북신현면 묘향산 기슭에서 죽염을 제조하여 온갖 질병의 환자들, 만성위장병 환자, 신장염 환자, 담낭염 환자, 기관지염 환자, 심장병 환자들, 가지가지 병명도 모르는 산골 오지의 환자들에게 나누어줌.

1927년(19세) 죽염과 한약, 쑥뜸요법을 병용하여 죽음의 병인 진폐증을 완치시킴.

1934년(26세) 철원경찰서 습격작전에 가담한 뒤 변창호 대장(독립군)의 지령을 받아 철원으로 가던 중 금화군 금성면에서 왜경에 체포되어 손톱,발톱이 빠지는 모진 고문을 당하고 춘천형무소에 투옥.

1942년(34세) 김두운 선생이 주도한 조선총독부 습격 계획 참여, 계획이 무산되자묘향산에 들어가 설령암과 강선암에 은거.

1943년(35세) 장영옥(張永玉)과 약혼(約婚).

1945년(37세) 묘향산 영덕사에서 하산, 해방조국에 입경. 방주혁·김규식 선생 자택에 머물면서 송진우·정인보 김준연·조병옥·김병로 등 애국지사들과 국사를 논함.

1948년(40세)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 전통의학과 서양의학의 장점을 살린 양한방 종합병원과 한의과 대학 설립을 건의.

1950년(42세) 부산에서‘세춘(世春)한의원’을 개설, 운영.

1955년(47세) 함태영 선생이 주도한‘삼일정신선양회’의 조직활동에 참여.

1957년(49세) 경남 함양 지리산 기슭의‘살구쟁이’마을에 5년간 은거하며 함지박을 깎으며 생계를 잇다.

1961년(53세) 인산쑥뜸법(靈灸法)으로 서울 광나루 어느 절의 스님인 소경 어대사(魚大師)의 눈을 뜨게 한 것을 비롯 이즈음 서울에서 지내면서 꼽추의 등을 펴게 하는 등 신묘한 의술을 펼쳐“장안에 묘향산 활불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나다.

1967년(59세) 서울에‘성혜(聖惠)한의원’개설, 수많은 난치병 환자와 급사자를 구제함.

1970년(62세) 대한화보에 ‘신종철학 역비전(神宗哲學易秘傳)’ 기사 연재. 오핵단, 유황오리, 한방암치료법 공개.

1973(66세) 경남 함양으로 거처를 옮김.

1975~78년 박정희 대통령에게 ‘의약부국(醫藥富國)의 길’을 제시. (총 8차례)

1980년(72세) <宇宙와 神藥> <救世神方> 등 저술, 출간.

1986년(78세) 암 난치병과 각종 괴질에 대한 일생의 경험 의방(醫方)을 집대성한 불멸의저술 <神藥> 출간. 각 일간지 및 잡지에 대서특필되고 이때부터 경남 함양의 초막에 난치병 환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다(하루 150~300여명). 이 무렵 인류 최고의 천연항암제 난담반이 본격적으로 보급됨.

1986~92년 지리산 산골 초막에 매일같이 몰려드는 난치병 환자에게 무료 처방과 함께 천연항암제 난담반 보급, 1986년 6월 20일 한국일보사 대강당에서의 강연회를 시작으로 92년 3월 3일 마지막 30회 강연회까지 총 53시간 동안 인산의학의 비밀을 대중들에게 전하다.

1992년(84세) 경남 함양 자택에서 84세를 일기로 타계. 사후 49일 째인 92년 6월 1일 선생의 육성 강연 전문은 활자화되어 선생의 유언에 따라 <神藥本草>라는 이름으로 출간되다.(끝)

필자 최은아 원장은 스승이자 시아버지인 인산 김일훈 선생의 대를 이어 한의학 개발과 함께 인술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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