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산 김일훈 70] 중병 앓는 뭇생명 건진 ‘우주와 신약’

김일훈 선생의 <우주와 신약>

인산은 1957년 처음으로 경상남도 함양 땅에 발을 들여놓은 이래 두세 차례에 걸쳐 2~3년씩 그곳에 내려가 산 적이 있다. 그러다가 73세가 되던 1981년에는 아주 내려가 그곳 사람이 되었다. 함경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주로 평안북도에서 보내면서, 그때에도 수차례 낯선 곳으로 이주하면서 살았다. 특히 16세 이후로는 독립군으로 일본군에 쫓기면서 국경을 넘어 만주, 백두산, 압록강, 묘향산, 금강산 각처를 떠돌며 지냈고 해방 후에는 서울과 계룡산 일대를 다니다가, 마침내 지리산 자락 함양에 자리잡았다.

서울 생활의 마지막 거처인 수유리에 살 때에는 ‘의약 부국(富國)의 길’을 열어 나가고자 하는 충정으로 자신의 견해를 정리하여 전후 여덟 차례나 대통령에게 건의문을 제출하였으나 아무런 반향(反響)도 얻지 못했다.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나라를 되찾은 직후부터 한방과 양방의 장점을 조화롭게 살려 국민 보건을 확립하자는 뜻으로 한방양방종합병원과 한방양방종합의과대학 설립의 필요성을 주창했던 그는 당시 해방 후 혼란한 정치현실에서는 도저히 뜻을 펼칠 수 없음을 깨닫고 포기했다가 박정희 대통령의 강력한 새 정치가 대두되자 다시 한번 이 나라 국민들에게 영원한 번영과 행복과 무병건강을 가져다주고 나아가 인류구원의 대업을 완수하고자 하는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아직 선각자가 설 자리는 마련되지 못했다.

1970년대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올린 건의문에서 인산은 지구에서 천연 약물질 함유량이 가장 풍부한 지점에 위치한 한국 땅과 한국 바다에 존재하는 천연약용동식물과 광물을 활용하여 바이오의약품을 개발하면 한국은 세계 경제대국을 일궈내고 한국이 전세계를 주도할 최문명 선진국이 될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인산은 건의문마다 자신을 대각자로 소개하면서 살인핵, 살인독, 살인균 암병이 창궐하는 세계역사상 유래없는 위험한 인종개벽의 시대에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 지구상에 왔노라고 밝혔다.

“나는 억조만세에 건강장수의 비법을 전할 신비신묘한 약물을 발명한 자로 사후에는 인류생명과 건강의 원천으로 영원토록 후세에 이름을 전할 것이다. 천추만세에 활인구세할 활인핵을 발명한 자이나 기성세대가 철의 장막을 쳐 막으니 이로써 조국발전에 보조하지 못할 뿐더러 세계의약발전에 치명상이 될 것이다. 수십억 인류의 생명을 구할 수 없으니 이것 또한 운명인가 하노라. 안타깝도다. 그러나 나는 조국이 만고의 문명선진국이 될 때까지 백번 건의하리라.”

그 당시는 이승만 대통령 시대가 물러가고 인산의 특출함을 알던 정부요직 인사들이 하나 둘 다 사라져 세대교체가 이뤄진 후라서 박정희 정권에서는 인산을 아는 이가 한 사람도 없었으니 건의문의 내용에 관심을 둘 리도 만무하거니와 오히려 이 이상한 건의문을 제출한 인산이라는 이북 출신 인물을 수상히 여겨 인산은 관이 관리하는 요주의대상자가 되었다. 그래서 함양에서는 정기적으로 경찰서 형사가 일없이 인산의 초막을 들러 ‘선생님, 잘 지내십니까?’ 하는 실없는 인사를 하고 가곤 했다.

인산의 1970년대 건의문과 강연에 수없이 나타나는 그의 발명품 죽염, 유황오리 등 천연 기능성물질은 그 후 20여년이 지난 1990년대에 와서 비로소 식약청의 허가를 받아 처음으로 상품화되고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인산은 시대에 너무 앞서 한국만의 독특한 천연약물 개발을 정책적으로 시행해 나가야 한다는 소신을 피력했으나 양의학 위주의 보건 정책과 민족 의학 멸시 풍조에 떠밀려, 그의 견해는 이승만 정부를 거쳐 박정희 정부에서도 그 어떤 설득력도 발휘하지 못했다. 바야흐로 현대문명이 내뿜는 각종 공해물질과 농약으로 대표되는 무서운 화공약독의 확산이 점점 더 극심해지고 있는 현실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는 인산으로서는 그대로 좌시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사람들은 그런 공해물질로 오염된 공기를 호흡하고, 실험실에서 분석해 보면 어김없이 잔류 농약이 검출될 각종 농수산물을 섭취하면서 살 수밖에 없으니……. 기껏해야 그 무서운 독성 물질들에 대한 기준치라는 것을 정해 놓고, 그 기준치 미만이면 ‘안전’하다고 간주해 버리는 게 보건정책이 아니던가? 살려고 숨도 쉬고 음식물도 섭취하는 것인데, 그것으로 인해 결국 죽게 된다면 그 얼마나 이율배반적이겠는가? 하지만 나라의 보건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나 의료인들은 인산의 의견을 ‘미개한 원시적인 민간요법’쯤으로 치부하였으니, 터진 봇물처럼 밀려오는 질병의 재난을 가능한 한도까지는 인산 혼자서 막을 도리밖에 없었다.

물론 운이 좋아 인산에게 직접 치료를 받는 사람도 부지기수로 많았지만, 그래봤자 전체 환자들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인산 자신도 그 사실을 알기에 일찍부터 자신의 의료 지혜를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 전하겠다고 생각했다. 비록 그 원리가 일반적인 진리로 인정되기에는 백 년, 아니 그보다도 훨씬 더 장구한 세월이 필요할는지 모르지만 최소한 어떤 질병에 어떤 처방의 약을 쓰면 낫는다는 것은 기록으로 남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인산은 그 첫걸음으로 1980년 <우주와 신약>을 저술하여 출간하였다. 어째서 평범한 반찬거리에 불과한 동해산 북어가 뱀에게 물려 죽어가는 사람과 연탄가스에 중독된 사람에게 탁월한 해독 능력을 발휘하는지, 화상을 입은 사람에게 오이의 생즙이 신묘한 생명약이 되는 까닭이 무엇인지 등을 적어놓은 책이다.

지력과 안력이 특수한 자신만이 볼 수 있고, 자신처럼 지혜가 영명한 대각자만이 감지할 수 있는 우주자연의 비밀이기에 글로써 적었다 하여 곧바로 읽는 이에게 이해되리라는 기대는 별반 하지 않았다. 단지 후세에라도 눈이 좀 밝은 사람이 와서 그 내용을 이해하여 그 한 끄트머리라도 세상에 전할 수 있게 된다면, 긴 시간을 두고 그런 일들이 반복된다면 결국 인류 건강 수호의 새로운 지평(地坪)이 열리는 시대가 도래(到來)할 것이라고 믿었다.

<우주와 신약>은 전문 의료인들에게보다는 일반인들, 특히 중병을 앓고 있거나 그런 가족을 둔 사람들에게 많이 읽혔다. 그리고 그 책을 읽은 사람들 가운데 여러 명이 책대로 실행하여 인산을 직접 대면하지 않고서도 신약(神藥)의 신비로운 효능을 체험하였다. 그들의 절실한 필요가 지성적 이해를 능가하는 결과를 만들어낸 실례(實例)라 하겠다.

여담이지만, 전문 의료인이라는 사람들이 자기를 찾아와 자기의 도움을 받고자 하는 환자들의 절실한 마음을 10분의 1이라도 공감하면서 자기의 소임을 다한다면 이 세상은 훨씬 더 건강한 세상이 될 것이다. 그들이 단지 하나의 직업인으로서 쇠와 같이 차갑고 단단한 마음으로 환자를 대한다면, 때로는 자기도 인간이라는 핑계를 앞세워 환자를 귀찮고 성가신 존재로 대한다면, 때로는 환자를 자기의 호주머니를 두둑하게 만들어줄 ‘고객’이라는 생각으로 대한다면 어떻게 바람직한 의료 효과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어떤 의료인도 자신의 본분을 다하는 데 혹시 도움이 될 내용은 없을까 하여 <우주와 신약>을 읽어보고, 저자인 인산에게 그 내용에 대한 질문이나 반론 같은 것을 제기해 온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전국 각처에서 그 책을 통해 놀라운 체험을 하였다는 자가(自家) 치료의 성공담을 담은 편지들이 쇄도해 온 것을 보면, 역시 이 땅의 의료인들은 인술(仁術)이라는 성업(聖業)에 종사하는 존재로서 깊이 반성해 볼 점이 많지 않느냐고 말하고 싶다.

인산은 <우주와 신약>이 지식이 풍부한 사람들보다는 평범한 시민들 사이에 더욱 많이 읽힌다는 사실을 알고, 주로 한자로 쓰인 그 책을 한글로 풀어서 1981년 <구세신방(救世神方)>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펴냈다.

김일훈 선생 아들들이 부친의 <우주와 신약>을 <신약>으로 출판했다

그 후 함양에 내려가 살던 1986년에, 암을 비롯한 난치병들과 각종 괴질들을 고친 일생 동안의 경험 의방(醫方)을 모아 인산의 아들들이 <신약(神藥)>을 출간하였다. 그야말로 누구라도 글자만 읽을 줄 알면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약재로써 질병을 극복할 수 있는 길 하나를 터놓은 셈이었다.

<신약>은 제1편 ‘신약’, 제2편 ‘신방(神方)’, 제3편 ‘의론(醫論)’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는 다시 32장(章)과 부록으로 구분되어 있다. 인산의 아들들은 그 책의 첫머리 ‘이끄는 글’에 중국 남송(南宋) 시대의 유학자 나대경(羅大經)이 지은 <학림옥로(鶴林玉露)>권6에 실려 있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어느 비구니의 오도송(悟道頌)을 인용했다.

봄을 찾아 진종일 헤매었어요.
(산으로 들로 아지랑이 속으로)
짚신이 다 닳도록 헤매었어요.
(지친 걸음으로 집에 돌아와
문득 코끝을 스치는 매화 향기에
그냥 웃어버렸어요.)
뜰 앞 매화나무 가지 끝에
봄이 (이미) 달려 있는 것을…….

盡日尋春不見春
芒鞋踏遍隴頭雲
歸來笑撚梅花嗅
春在枝頭己十分

인간이 갈구하는 진리가 결코 먼 곳에 있지 않음(道不遠人)을 비유한 옛 시인데, 이 점은 의술(醫術)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 생각된다. 주변에 무궁무진한 양(量)의 영약(靈藥)을 쌓아둔 채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각종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다. 공중(空中)에도, 산과 들과 바다 속에도, 처처에 즐비하게 널려 있는 약들을 버려 두고 ‘약이 없어’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과학이 끊임없이 발달하고 의료술이 계속 향상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생명을 위한 진정한 의료술과 약에 대한 무지(無知) 내지 편견은 아직도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 책은 이처럼 진정한 약과 의료술에 대한 무지, 또 무지한 의료인들의 합법적 만행 에 의하여 희생되는 ‘억울한 죽음’을 가능한 한 막아보려는 의도에서 쓰였다. 나아가 산업화에 따른 공해(公害)의 증가와 살인 핵무기의 여독(餘毒)으로부터 인류를 구제하려는 마음에서 미리 그에 대비한 약의 제조 방법을 밝히는 것이다.

병은 시대에 따라 무한한 변화를 거듭하게 된다. 현대 의학의 발달을 오히려 앞지르 듯 계속 나타나는 괴질들은 결국 이 시대 인류가 만든 이 시대의 부산물(副産物)임에 틀림없다.

이 책의 출간으로 인하여 한 사람이라도 더 질병의 고통으로부터 구제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의료기관도, 의료인도, 처방도, 약도 필요 없는 사회……. 필자의 80년 생애를 통하여 한결같은 바람이 있다면 ‘질병 없는 사회의 구현’ 바로 그것이다. 필자는 그것을 위하여 근 80년 동안 형극(荊棘)의 길을 마다 않고 걸어왔으며, 남은 여생도 계속 그렇게 살 생각이다.

86년 5월 咸陽 寓居에서

인산은 <신약>을 출판한 직후인 6월 20일에 한국일보 12층 대강당에서 출판기념 강연회를 열어 ‘신약(神藥)의 실상(實相)과 그 활용 방법’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다.

세상을 구하러 세상에 온 지 78년 동안 그 세상으로부터 이해 받지 못한 채 살아온 인산이었지만, <신약>이 울린 메아리는 실로 놀라웠다. 전국 각지에서는 물론이고 해외에 사는 사람들까지 인산에게 병을 고쳐 달라고 찾아왔다. 인산의 거처인 함양읍 상동(운림리) 일대는 하루 평균 2백여명씩 몰려오는 환자와 그 가족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읍내의 택시 기사나 식당, 여관 등이 덩달아 성업(盛業)의 즐거움을 누린 반면에, 일반 주민들은 환자들이 타고 와 무질서하게 주차해 놓은 승용차 때문에 적지 않은 불편을 겪기도 했다. 좁은 골목길과 대로의 가장자리를 가득 메운 차들로 몸살을 앓을 지경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무튼 이 병원 저 의원을 전전하다가 마지막 종착역을 찾는 심정으로 인산을 찾아온 난치병 환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인산을 단 한 번 만남으로써 생명을 건지는 기쁨을 맛보았으며, ‘지리산 도사’ 할아버지의 의술에 대한 소문은 날개를 달고 세상에 퍼져나갔다. 신문 방송 잡지 등에 인산의 의론이 여러 차례 소개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하지만 정작 이 땅의 의학계나 의료계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들은 인산의 의술에 대해 여전히 철저한 무관심과 비웃음으로 일관했다. 그 많은 환자들이 인산의 지혜와 치료의 손길을 원해 찾아오는 것은 의료 전문가들이 가보라고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단지 그들이 자신들에게 내린 절망적인 진단 결과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자신들의 살 길을 직접 찾아 나서는 과정에서 비롯된 행보였다.

일반적으로 난치성 질환이라 할 수 있는 병들은 내ㆍ외적으로 여러 가지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병하게 된다. 또 하루아침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환자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 오랜 시간에 걸쳐서 형성된다. 때문에 치료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막상 자신이 난치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환자들은 ‘발달한 현대 의학’의 도움을 받으면 얼마든지 병을 고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다가, ‘의학적으로 더 이상 손 쓸 방법이 없고, 설령 어떻게 해본다 하더라도 생명을 건질 수 있다는 보장을 할 수 없다.’는 사망 선고를 의료인들로부터 받게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치료한다는 명분하에 환자의 몸에 칼을 대고, 장부를 도려내고, 방사선을 조사(照射)하고, 수은이 함유되어 있는 항암제를 투여하다가 마침내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어서…….’ 하고 손 들어버리면 그만인 게 그들 의료인들이다. 명백한 의료사고가 아닌 이상 그 누구에게도 책임 추궁을 당하지 않는다. 필요할 때는 의료 과학을 만능인 것처럼 내세우다가도, 막상 환자를 살리지 못할 때는 ‘의료 과학에도 한계가 있어서…….’라고 얼버무린다.

그들 의료인들이나 의료기관과 보건 당국에 속한 사람들도 문제이지만, 만연된 공해 속에서 살아가면서 자신들이 무서운 병독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채 지내는 현대인들의 건강 의식 또한 심각한 문제라 아니 할 수가 없다. 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이 건강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잊은 것처럼 행동하며 산다. 돈을 버는 일에 빠져서, 쾌락에 젖어서, 좀 더 높은 지위에 올라가기 위해서 자신의 건강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다가 건강에 적신호가 오고, 급기야는 회복이 어려운 상태에 빠져 후회를 할 때에는 이미 늦어버린 예가 허다하다. 의학은 결코 만능일 수가 없다. 병에 걸렸을 때 훌륭한 의사를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병에 걸리지 않도록 미리 주의하고 예방하는 일은 더욱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인산은 자신을 찾아오는 수많은 환자들을 상담하여 처방을 내려주면서도, 언제나 ‘아직은 병에 걸리지 않은’ 세상 사람들에 대한 걱정을 더 많이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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