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산 김일훈 69] 화상환자를 완치시키다
인산이 수송동에서 살던 시절은 여러 모로 뜻있는 시기였다. 앞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변함없이 수많은 난치병 환자들을 일으켜 세워 새로운 인생의 활로를 열어주었던 보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다량의 오핵단을 제조하여 그 신비한 효능을 거듭 확인한 것도 그 시기였다. 사사로운 이해타산으로 몰지각한 사람들이 인산에 대해 빚어낸 구설수를 겪은 시기이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글자 그대로 일과성 구설수에 지나지 않았을 뿐 결코 인산이 지닌 지혜의 빛을 다 가릴 수는 없었다.
당시 인산의 거처에는 몸이 아픈 환자들만이 아니라, 인산이 발하는 빛을 좇아 승려와 학인(學人)들도 많이 모여들었다. 한국 제일의 포교 전법 도량인 조계사(曺溪寺)가 바로 인근에 있었기 때문에 불교계의 승려들이 인산을 찾아올 기회가 많았고, 그들 중에는 종단(宗團)이나 사문(沙門)들에 대해 거침없는 비판과 올바른 방향 제시를 술술 풀어놓는 인산에게 매료(魅了)당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런 승려들의 입을 통해 인산의 얘기를 전해 듣고 관심을 가진 승려들이 또 줄을 이어 찾아오는 일이 되풀이되곤 했다. 인산은 그들에게 올바른 불법 해석과 수도 자세에 관한 얘기를 해주는 것 이외에도 수도생활에서 얻기 쉬운 여러 가지 질병에 대한 예방법과 치료법을 일러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인산의 거처에는 또한 여러 가지 목적을 가지고 찾아오는 학인들이 북적거렸으니, 《주역(周易)》과 명리(命理)에 대해 배우고자 하는 사람, 천문·지리의 요체를 얻어가려는 사람, 약리(藥理)를 습득하려는 사람 등 그 갈래가 다양하였다. 그렇게 찾아오는 이들 가운데에는 특히 사주(四柱)나 관상을 보고 점을 치거나 남의 묏자리 잡아주는 일로 생업을 삼고 있는 사람들이 가장 많았는데, 그들은 인산으로부터 《주역》의 오묘한 이치를 배우고자 하였다. 《주역》이라 하면 ‘주(周)나라의 역(易)’을 말하는데, 한마디로 ‘주나라 사람이 점을 치는 데 사용한 책’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점술에 관한 책이 아니라 음양의 교감작용을 철학의 범주로 격상시켜 이 세상의 만사(萬事)와 만물(萬物)을 통일된 체계 아래 둠으로써 동양의 철학사상을 대표하게 된 중요한 책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주역》이 ‘점을 치거나 사주·관상을 보는 데 쓰이는 책’ 정도로 알려졌기 때문에 그런 일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이 인산을 찾아와 배우고자 한 것이었다. 그런 현상은 인산이 세상에 《주역》 해석의 대가(大家)로 알려지게 된 계기가 있었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었다. 인산은 1971년 11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도합 8회(71년 12월만 빼고 매달)에 걸쳐서 월간 『대한화보(大韓畵報)』에 ‘신종(神宗) 철학 역비전(易秘傳)을 공개한다.’는 제목의 기사를 청탁받아 연재하였던 적이 있었다. 매회 2백 자 원고지 20매 내외의 분량으로서, 인산의 수초(手草) 원고가 그대로 실렸었다. 인산은 그 짧은 글을 통해서 우주 생성의 원리와 지구의 팔괘(八卦) 분야, 인류의 기원과 역사의 전개, 앞으로 인류에게 닥쳐올 재앙과 신종 질병의 위험성, 자연계에 존재하는 신약(神藥)의 효능과 그것을 이용하여 인류를 질병으로부터 구제할 방편 등에 관한 개괄적인 내용을 전개하였다. 국배판 잡지의 다섯 면을 빼곡하게 채운 그의 육필 원고는 거의 한자로 표기되어 있는 데다 그 내용마저 매우 난해하였으므로 일반인들의 관심을 끌기는 어려웠지만, 《주역》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나 한학자들 사이에서는 오랜만에 심오한 《주역》의 세계를 명쾌하게 가름하는 논거(論據)를 접하며 관심을 가졌다. 특히 연재가 끝난 후 대담 기사를 통해 ‘화서(華西) 학파의 학통을 이을 전수 제자를 기다리고 있다.’는 인산의 말에 많은 사람들이 주의를 집중했다.
화서 이항로(李恒老) 선생은 구한말의 대학자로서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중암(重菴) 김평묵(金平?), 의암(毅庵) 유인석(柳麟錫) 선생 등의 문하생들과 함께 위정척사(衛正斥邪) 운동의 선두에 섰던 분이다. 이후 화서학파의 여러 지사(志士)들은 한일합병 이후 독립운동의 중심에 서게 되며, 앞서도 얘기했듯이 안중근 의사도 유중교(柳重敎) 선생의 제자인 고능선 선생에게 배움으로써 화서학파의 계보에 이름을 올렸던 것이다. 아무튼 화서 선생의 학통은 그의 문하생 가운데 성재(省齋) 유중교 선생에게 이어졌고, 이후에 화서 선생의 연원인 이광암(李廣庵) 선생에게로 이어졌다가, 해방 이후 인산이 그 이광암 선생으로부터 ‘역비전’과 ‘중용도간(中庸圖看)’을 전수받음으로써 인산에게로 이어졌던 것이다.
인산의 수송동 거처는 병들어 신음하는 난치병 환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데다 역비전의 전수 제자가 되기를 희망하여 찾아오는 학인들로 더욱 붐볐다. 하지만 《주역》의 오묘한 세계를 단시일 내에 터득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뿐더러, 설령 64괘(卦)와 384효(爻)·괘사(卦辭)·효사(爻辭)를 줄줄 왼다 하더라도 그 속에 함축되어 있는 우주적 비밀을 터득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인산은 거두절미하고 곧바로 《주역》의 핵심 내용을 풀어 나가는 방식으로 가르쳤기 때문에 《주역》에 대해 사전 공부가 깊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미상불 어디서부터 시작하여 어디서 끝을 맺어야 할지 정해진 바가 없는 《주역》의 광대한 세계를 몇 마디 강의로써 섭렵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그 분야를 공부하고 나름대로 연구를 거듭해 온 몇몇 학인들은 인산의 가르침을 통해 자신들이 풀지 못해 의문점으로 남겨두었던 부분에 대해 속 시원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신종(神宗) 철학’이란 수식어가 붙은 ‘역비전’에 대해 인산으로부터 배운 6인의 대표 제자들은 학통의 전수 근거를 남기기 위해 뜻을 모아 ‘화서 이항로 선생론’과 그 문인록 및 학통 전수자 명부를 작성하여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그때 인산으로부터 역비전을 전수받은 사람들은 그들 6인 외에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았으나, 인산이 그 이듬해에 거처를 옮기고 그 후로도 1년이 멀다 하고 지방으로 내려가 살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와 살기를 거듭하는 바람에 그들끼리의 연계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런데 그런 이들 가운데 윤재원이라는 사람이 있어서 그와 관련된 ‘치유’의 일화 한 토막을 여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윤재원은 1972년 당시 33세의 기혼자로서 20대 초반서부터 범종(梵鐘) 제작에 종사해 온 사람이었다. 예로부터 범종이라 하면 단순히 물리적인 특성만을 중시하여 만드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깃드는 정신적인 공력이 함께 녹아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제작되어 왔다. 비록 전설이기는 하지만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성덕대왕 신종(일명 에밀레종)의 제작에 얽힌 이야기도 그런 사상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따라서 제대로 된 범종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그에 필요한 기술 이외에도 고도의 정신세계를 아우를 수 있는 철학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윤재원은 《주역》의 세계를 알기 원했고, 그런 목적을 가지고 인산의 문하에 들어왔다.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겠다는 도전정신의 발로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이미 윤재원은 에밀레종(5천 관)의 축소 모형으로 만든 1천 관짜리 범종을 비롯하여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의) 범종과 예산 수덕사(修德寺)의 범종 제작 등 굵직한 불사(佛事)에 참여한 경험을 가진 명실 공히 ‘장인(匠人)’이었다.
그런 그가 1973년 7월 중순의 어느 날, 끔찍한 사고를 당하였다. 용의 형상으로 설계한 종두(鐘頭)를 제작하기 위해 파라핀을 녹이는 공정을 진행하고 있던 중이었다. 범종의 종두나 종신(鐘身)은 모두 청동을 녹인 쇳물을 거푸집에 부어 만드는데, 그 거푸집을 만드는 과정에서 파라핀을 사용한다. 쉽게 녹았다가 쉽게 굳으며, 어떤 형태로든지 깎아내기 용이한 재료가 파라핀이었다. 굳어진 파라핀 덩어리를 조각하여 원하는 모양을 만든 뒤에, 그것을 진흙으로 감싸 말린 다음 가열하면 녹은 파라핀이 밑구멍으로 빠져나오고 진흙 껍데기는 애초에 파라핀을 조각해 만들었던 형태를 빈 공간으로 지니게 된다. 그것이 거푸집이 되는 것이고, 거기에 쇳물을 부어넣은 뒤 진흙을 제거해 내면 비로소 완성된 작품을 얻게 되는 것이다.
밤을 새워가며 일하던 윤재원은 새벽 세시경 파라핀이 담긴 용기를 석탄 불 위에 올려놓고 잠시 바깥으로 나가 땀을 식히고 있었다. 초복을 며칠 앞둔 때였지만 새벽의 시원한 대기는 공장 안에서 고된 일을 몇 시간째 계속해 온 그에게 새로운 힘을 느끼게 해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심상치 않은 냄새가 그의 코끝으로 스며들었다. 휴식 시간이 너무 길었던가 보다. 그는 직감적으로 이상이 있음을 느끼고 반사적으로 공장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과열로 인해 이미 용해된 파라핀에 불이 붙어 있었다. 용기의 뚜껑을 찾아서 덮으면 진화(鎭火)는 가능할 일이었다. 그러나 사고는 사소한 일을 그르치는 데에서 찾아오는 법인지,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하고 다급한 나머지 불붙은 파라핀 용기를 그대로 들고 바깥으로 나가야만 한다는 생각이 그에게 들었을 뿐이었다.
작업용 가죽 장갑을 손에 낄 새도 없이 그냥 맨손으로 용기의 손잡이를 감싸 쥔 채 용기를 들고 바깥을 향해 뛰어 나가던 그는 그만 무엇인가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뜨거운 열기를 끼얹으며 타오르는 불길이 턱 밑까지 넘실거려 앞을 잘 볼 수 없었던 까닭이고, 지나치게 당황하여 서두른 탓이기도 했다. 윤재원은 그때 불붙은 채 펄펄 끓던 파라핀 용액이 엎질러진 위로 자빠지고 말았다. 그러고는 정신을 잃었다.
윤재원이 잠깐이나마 의식을 되찾은 것은 삼선동 자택으로 옮겨진 뒤였다. 목 뒤에서부터 등을 거쳐 둔부와 허벅지에 이르기까지 심한 화상을 입은 그는 거의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심한 통증과 갈증 속에서 정신마저 혼미한 상태의 그는 아내에게 부탁했다.
“빨리…… 인산 선생님을…… 모셔오구려.”
헛소리를 하듯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정신을 놓아버린 그였다.
인산은 그 무렵 수송동 혈액은행 건물에서 창신동으로 거처를 옮겨 지내고 있었다. 연락을 받은 인산이 단걸음에 윤재원의 집에 당도하여 보니 환자는 혼수상태로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화상을 입은 상처 부위는 눈 뜨고 볼 수 없이 처참했다.
“어쩌려고 이 사람을 이대로 두고 있는 겐가? 얼른 생오이 즙을 준비하고, 가까운 병원으로 데려가도록 해.”
넋이 나가기로는 윤재원의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엉엉 울면서 허둥지둥 오이를 구하러 밖으로 내달았다. 날은 이미 밝아 있었다. 혜화동 우석병원에 연락하여 구급차가 오기를 기다리며 환자에게 두 사발가량의 오이 즙을 먹일 수 있었던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우석병원에서는 환자의 상태를 보더니만 ‘화상 전문 치료 병원’인 성가병원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권하였다. 그래서 환자는 다시 미아삼거리에 있는 성가병원으로 옮겨져 입원하였다.
병원에서는 환자의 환부에 얼음찜질을 한 뒤에 세균 감염을 막기 위해 바셀린을 도포하였다. 그리고 항생제와 진통제를 주사하였다. 그러나 치료에 임하는 의사나 간호원들은 환자가 전신의 45~50% 부분에 3도 화상을 입고 있었기에 예후(豫後)가 극히 불량할 것이라고 판단하는 눈치였다. 온몸의 30% 이상에 3도 화상을 입으면 생명을 구하기가 어렵다고 보는 것이 병원 측의 견해였다. 환자가 의식을 되찾아 지독한 통증을 견디다 못해 비명을 지르면 쫓아와서 진통제 주사를 놓아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진통제의 효과도 이내 맥을 추지 못하여 환자는 극심한 통증 때문에 빨리 죽고만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병원에 입원한 그날부터 인산이 일러준 대로 오이의 생즙을 계속 마셨다. 환자의 아내는 대여섯 개의 보온병을 마련하여 오이 즙을 담아 왔다. 그렇게 하여 환자가 원할 때마다, 아니 30분 내지 한 시간 간격으로 환자가 오이 즙을 마실 수 있게 했다. 환자는 혹시 병원 측에서 오이 즙을 마시지 못하게 할까봐 의사나 간호원의 눈을 피해 가며 열심히 마셨다.
본래 화상 환자는 극심한 갈증을 느끼게 된다. 윤재원은 그러한 갈증을 오이 즙으로 해소했다. 오이의 즙이 그처럼 달고 시원하며 맛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가는 동안에 그는 차츰 자신이 죽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기 시작했다. 답답하던 가슴이 확연히 느낄 정도로 편안해졌고 그에 따라 호흡하기도 훨씬 수월해졌다. 그때 환자의 모든 장기와 전신 세포들은 일대 전쟁을 치르고 있는 셈이었다. 직접 화상을 입은 환부는 물론이고 그 밖의 부위들도 내침(內侵)한 화독과 맹렬히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 싸움에서 패하면 죽는 것이고, 이기면 사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 내부 장기와 세포들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가장 유력한 응원군이 계속 답지하고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오이의 생즙이었다.
이틀에 한 번씩 목 아래에서부터 무릎 부위까지 칭칭 감았던 붕대를 풀고 환부에 잡힌 고름을 긁어내는 등 치료를 받을 때에는 지옥과 같은 고통을 겪어야 했다. 환부에서 나오는 진물과 고름이 붕대와 함께 말라붙어 그것을 소독수로 불려 벗겨내는 일, 살 속에 잡힌 고름을 핀셋으로 긁어내는 일 등은 겪어보지 않은 이는 알 수 없을 만큼 지독한 통증을 수반했다. 그러나 놀랍고 신비로운 것은 살아 있는 인체의 복원 능력이었다. 뜨거운 파라핀 용액에 닿아 익어버렸던 살 속에서 새 살이 돋아나오고, 그 속으로 신선한 혈액이 부지런히 드나들었다. 윤재원은 인산이 일러준 방법만이 자신이 살 길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오이 즙 마시기에 모든 것을 걸다시피 하였다.
어느덧 사고가 발생한 지 보름이 지났다. 병원 측에서 윤재원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것은 그때쯤이었다. 담당 의사는 윤재원을 자신의 임상 경험상 일찍이 본 예가 없는 특별한 환자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가 병원에 실려 왔던 초기의 상태로 보아서는 도저히 살릴 수 없다고 판단했었고, 환부에 포도상구균을 위시한 연쇄상구균·녹농균 등의 감염을 막는 것만이 자기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환자의 생명을 며칠간 연장시키는 의미만 있을 뿐, 워낙 광범위한 부위에 화상을 입은 경우이므로 체내 수분과 전해질의 불균형 또는 혈청 단백질의 과다한 손실로 인하여 비관적인 상태에 빠져들거나, 설사 그 시기를 용케 넘긴다 하더라도 신장염이나 폐렴·뇌막염 등의 합병증으로 결국에는 사망에 이를 것으로 내다보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윤재원이라는 환자는 날이 갈수록 상태가 좋아졌으며, 그 회복 속도 또한 놀라울 정도였다. 본래 건강했던 탓이라고 돌려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그것만이 전부는 아닐 성싶었다. 그동안 그로부터 치료를 받다가 사망한 화상 환자 가운데 본래는 건강했던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담당 의사는 윤재원이 죽음의 통로에서 벗어나 완전히 소생하였다고 판단했고, 가능하다면 후유증이 덜하도록 최선을 다해 마무리 치료를 하자는 쪽으로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다.
한편 윤재원은 아내를 다시 인산에게 보냈다.
“인산 선생님을 찾아뵙고, 내가 많이 좋아졌다고 말씀드려 주오. 아마 선생님 말씀대로 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텐데……. 나중에 퇴원하면 직접 찾아뵙고 인사드리겠다는 말씀도 전하고…….”
인산에게 다녀온 윤재원의 아내는 그날부터 윤재원에게 오이 생즙 이외에도 집오리를 삶아 달인 물을 마시게 했다.
“선생님 말씀이 이제 위험한 지경은 벗어났으나 화독이 극심하기 때문에 늘 조심해야 한 대요. 이건 집오리를 삶아 달인 국물인데, 이것도 인산 선생님이 일러주신 약이니 열심히 드셔야 해요.”
화상을 입은 지 한 달이 경과했다. 그때쯤 윤재원의 신체 리듬은 거의 정상을 회복하였다. 환부 치료 시에 느끼던 고통도 어제 일처럼 되었고, 환부에 잡히던 고름도 어느새 끝을 보이고 있었다. 진물은 더 이상 흐르지 않아 미라처럼 온몸을 휘감다시피 하였던 붕대도 부분적으로만 감고 있게 되었다.
“윤재원 씨, 건강한 모습으로 퇴원하시게 된 것을 축하합니다. 댁으로 돌아가시더라도 완전한 건강을 되찾을 때까지는 주의사항을 반드시 지키시고, 정기적으로 내원하셔서 후속 치료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입원한 지 두 달 만에 퇴원하는 윤재원에게 담당 의사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치명적인 화상을 입고 입원했던 그 환자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빨리 회복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끝내 궁금증을 풀지 못하고 있었다.
집에 돌아온 윤재원은 지난 두 달간의 시간이 꿈인 것만 같았다. 사고를 당한 일도 그렇거니와 극심한 통증 속에서 생사의 고비를 넘던 일, 하찮다면 하찮다고 할 수 있는 오이의 생즙을 마시고 살아나게 된 일, 인산 선생의 끝을 알 수 없는 신비한 능력, 가족과 아내의 헌신, 삶과 죽음에 대한 절실한 느낌…….
“자네는 천행으로 오이 생즙을 먹고 살아나기는 했지만 체내에 쌓인 화독은 아직 말끔히 없어진 게 아닐세. 괜찮겠거니 하고 지내다가는 10년 안에 그 화독의 후유증으로 무서운 질병을 앓게 될 걸세. 그러니 내 말을 들은 금일부터 중완과 관원에 5분 이상 타는 쑥뜸을 떠야 할 것이네. 꼭 명심하게.”
퇴원한 지 한 달 뒤, 몸을 대충 추스를 수가 있다고 생각한 윤재원은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스승을 방문하였다. 그때 인산은 윤재훈의 후유증을 염려하며 영구법으로 그것을 예방하고 스스로의 건강을 확고히 하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윤재원은 그 가르침을 즉시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화상을 입은 부위가 아물면서 조직의 수축과 경직 현상이 나타나 가려움증이 심했고, 그것에서 벗어났을 때에는 범보다도 무서운 생활이라는 것에 쫓겨 하루에 몇 시간씩 자리에 누워 쑥뜸을 뜨고 있을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불에 덴다는 사실이 지긋지긋한데, 스스로 뜸 불을 배 위에 올려놓고 살을 지져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꺼려지기도 한 게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는 쑥뜸에 버금갈 수 있는 다른 방도를 찾기로 했다. 인산이 그의 체내에 화독이 남아 있다고 한 말조차도 잊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촉각을 곤두세우고 건강에 좋다는 모든 방법을 찾아 나섰다. 건강 관련 서적도 수십 권이나 읽었다. 운동 요법·식이 요법·단전호흡법·요가·지압·수지침·봉침 등에 탐닉하였다. 그러나 화상을 입은 이래 줄곧 느껴온 무기력함과 피로감, 의욕 상실 등의 현상은 호전되지 않았다. 그렇게 7년이라는 시간을 흘려보냈다.
비쩍 마르고 머리털이 듬성듬성한 그의 외양은 누가 보더라도 건강한 상태라고 할 수 없었다. 음식의 섭취량을 조금 늘려보고도 싶었지만 도무지 소화력이 뒷받침해 주지를 못하였다. 어쩌다 감기에라도 걸리게 되면 대엿새씩 꼼짝을 못하고 누워 있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불현듯 생각했다.
‘아, 그때 인산 선생님께서 쑥뜸을 권하시면서 내가 10년 안에 무서운 병에 걸릴 것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제 내게 남은 시한은 불과 2~3년밖에 안 되지 않는가!’
그는 비로소 자책하는 마음이 들었다.
‘어리석구나, 내가 선생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다니……!’
윤재원은 그렇게 느낀 1980년 가을부터 중완과 관원에 쑥뜸을 뜨기 시작했다. 첫날에는 30초~2분짜리로 1시간 정도 떴고, 그 이후로 점차 뜸장의 크기를 늘려 7일째 되는 날부터는 인산이 일러준 대로 5분짜리로 세 시간가량 떴다. 처음에는 견디기 쉽지 않았으나 이를 악물고 참다 보니, 15일째에는 10분씩이나 타는 뜸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와 더불어 뜸 불의 뜨거움이 차츰 자신의 내부로 스며들어 온몸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만족감을 느끼게 되는 체험을 하였다. 그러한 만족감은 또다시 새로운 만족감을 찾아 떠나는 첫걸음이 되었고, 그 행보의 말미에서는 또 다른 기쁨이나 평온함과 만날 수 있었다.
1980년은 윤재원이라는 사람의 개인사에 ‘다시 태어난 해’로 기록되게 되었다. 비로소 체내의 화독을 제거함으로써 화상으로 인한 후유증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는 실효성 있는 노력을 하기 시작한 해였고, 그 성공적인 결과의 가능성을 여실히 확인한 해였다. 그때로부터 윤재원은 생활의 활력을 찾아 피곤함을 모르고 일에 몰두하게 되었고, 머리카락 숱이 늘어났으며, 소화력도 왕성해져 정상 체중을 되찾게 되었다.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상대방에게 늘 부드럽고 원만하면서도 확고한 신뢰를 주는 면모를 갖추게 되어 하는 일에서마다 기대 이상의 성과를 냈다. 여름에도 더운 줄 모르고, 겨울에도 추운 줄 모르는 강인한 체력이 그의 중년 나이를 튼튼히 받쳐주었고, 머리가 맑아져 이해력과 판단력도 증진되었다.
그 후로 윤재원은 1년에 두 번씩 봄·가을로 시기를 잡아 뜸을 떠오고 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가족이나 이웃들에게도 영구법을 권면하여, 그중 여러 사람이 해묵은 질병에서 치유될 수 있도록 길잡이 역할도 하면서 현재에도 건강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