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산 김일훈 66] 드러내놓을 수 없는 병, ‘간질’을 치료하다

간질 환자가 혼자 있다가 발작을 일으키면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늘 대비를 하고 있어야 했던 것이다. 발작이 일어났을 경우 모두들 환자에게 달려들어 환자의 사지를 붙들고 경련이 멎을 때까지 환자 이상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도 불문가지였다.(본문 가운데) <출처 정보창고/건강과 다이어트>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세상은 마치 새로운 천지가 열리기라도 한 듯 들떠 있었다. 하지만 세상의 변화라는 것조차도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인산은 잘 알고 있었다. 만년(萬年) 대통령으로서 영원한 권력을 구가할 것 같았던 이승만 박사도 ‘독재자’라는 오명을 피하지 못하고 쫓겨나지 않았던가? 어찌하여 사람들은 영원한 것을 추구한다고 하면서 결국은 순간에 탐닉하며 변하고 썩게 될 것들을 좇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서울에 도착한 인산은 제자 되기를 자청한 이영복 군의 인현동 집에 잠시 머물다가 충무로 입구의 친지 집으로 옮겨가 얼마간 지내게 되었다. 그 사이에도 어떻게 소문을 들었는지 어느 곳에서도 고치지 못하는 험한 병증들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꾸역꾸역 인산을 찾아왔다.

간질ㆍ소아마비ㆍ뇌중풍ㆍ뇌성마비ㆍ전신불수ㆍ각종 종양 환자는 물론 악성 치질 환자에서부터 백내장 환자에 이르기까지 별의별 환자가 다 몰려들었다. 여기서 한 가지-인산 선생이 그와 같은 난치병 환자들을 치료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인산 선생의 우주를 꿰뚫는 지혜가 있었기 때문임은 두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를 찾아오는 환자들이 인산 선생을 마주하면 ‘반드시 병이 나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는 점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점은 단순히 환자와 치료자 사이의 신뢰감을 넘어서서 거의 신앙에 가까울 정도였으니, 이는 인산 선생의 풍모와 말투가 범상치 않았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인 것이며, 인산 선생은 처방에 앞서 환자에게 나을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심리 치료법에 있어서도 용의주도하였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치료 효과의 차이는 어디서 오나?

일반적으로 환자가 나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치료에 임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치료 효과 차이는 극명하게 달라진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상식이 아니겠는가?

하루는 인산이 어려서 살았던 곳과 이웃한 동네(평북 의주군 피현면) 출신이라는 김 아무개가 찾아왔다. 인산과는 동갑으로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오랜 친구처럼 말을 놓고 편하게 다가왔다.

“이보게 친구, 고향을 떠나 객지에 나와 있는 것만 해도 고생인데, 이렇게 협소한 공간에서 환자들 보느라 복대기 치는 모습을 보니 영 내 마음이 편치 않네. 우리 집에 가면 쓰지 않는 방이 두엇 여유가 있으니 그리로 거처를 옮기도록 하세.”
인산도 고향 사람을, 그것도 또래의 친구를 만나서 반갑기는 매한가지였지만 선뜻 그가 권하는 대로 따라나설 수가 없었다.

“생각해서 해주는 말은 고맙네만, 사양하겠네. 특별한 이유도 없이 처음 만난 친구에게 신세를 지는 것도 부담스럽고…….”
“허, 사람하고는……. 아, 이 사람아 부담은 무슨 부담……? 내가 괜히 그러는 게 아니고…… 사실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네. 신세는 자네가 아니라 내가 질 참일세.”

고향 친구는 그렇게 말하며 인산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자네가 내게 무슨 신세를 진다는 말인가? 혹시 집안에 무슨 환자라도 있다는 말인가?”
인산이 그렇게 묻자, 고향 친구는 목소리를 낮추더니 속에 두었던 얘기를 끄집어냈다.

“바로 말했네. 실은 내 여식(女息)이 간질 중에서도 가장 고약하다는 돼지간질[猪癎]을 앓고 있다네. 당사자는 물론이고 온 집안이 그 애 때문에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닐세. 이미 용하다는 데는 안 가본 데 없이 모두 찾아가 봤지만, 아무 효험도 못 보고 오늘에 이르렀네. 제발 부탁이네만, 우리 집으로 거처를 옮겨 그곳에서 다른 환자들도 보면서 우리 딸애 좀 고쳐주게.”

보통 간질이라면 환자의 얼굴색 변화에 따라 다섯 가지 종류로 나뉜다. 그중에서도 돼지간질은 얼굴색이 검게 변하는 증상을 보이며 가장 고치기 힘든 질병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인산에게 못 고칠 병은 없었기에 ‘그렇다면…….’ 하는 마음으로 고향 친구의 청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신축(辛丑, 1961)년 설을 쇤 직후에 인산은 중구 주교동(을지로 4가)에 있는 고향 친구 김 아무개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알사탕을 만드는 공장 마당 한쪽에 일본식으로 지은 2층 가옥이었는데, 1층의 널찍한 방 3칸을 모두 사용해도 좋다는 친구의 말에 따라 인산은 모처럼 아이들과 넉넉한 공간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인산은 그 집에 거주하기 전, 그러니까 그해 입춘 무렵부터 그 집을 내왕하며 돼지간질에 걸렸다는 고향 친구의 딸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이 병은 천하의 용빼는 재주를 지녔다 하더라도 고칠 수 없는 병일세. 오직 한 가지 방법이 있다면 뜸을 뜨는 방법밖에는 없네. 1장에 적어도 5분 이상 타는 뜸을 하루에 50장씩 약 1년간 1만 5천 장 정도 뜨면 고칠 수 있다고 내가 장담할 터이니, 환자는 물론이지만 자네도 역시 단단히 마음먹고 치료에 임하도록 하게.”

자신의 생각과 실험으로 개발한 비법

인산은 치료를 시작하면서 자신의 치료 계획을 그렇게 밝히며 환자와 그 가족들이 마음가짐을 단단히 해줄 것을 당부하였다. 말하기가 쉬워서 ‘하루에 50장’이지, 뜸을 그렇게 뜨려면 따르는 고통이 형언할 수 없을 정도라는 것을 인산 자신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산은 묘향산에 있을 때부터 자신의 몸에 최장 35분간이나 타들어가는 뜸쑥을 올려놓고 쑥뜸의 효능을 실험ㆍ확인한 바 있었다. 그리고 스스로의 건강과 보양(補養)을 위해 매일 규칙적으로 쑥뜸을 떠오고 있는 터였다.

인산이 쑥뜸을 처음으로 고안해 낸 것은 아니다. 전래의 의서에도 뜸 치료에 대한 효능과 방법은 소개되어 있다. 쑥뜸에 의해 경혈(經穴)에 가하는 뜨거운 열은 인체의 자가 치유 능력을 활성화시키며, 뜨거운 열기와 함께 체내에 들어간 영묘(靈妙)한 약쑥의 기운이 작용하여 치료 효과를 나타내게 된다. 그리고 뜸에 의해 피부에 생기는 화상(火傷)은 체내의 안 좋은 불순물이나 병균을 몸 밖으로 배출해 내는 배출구 역할을 하게 된다. 이것이 쑥뜸의 원리이다.

그러나 인산의 뜸법은 어느 의서에도 의하지 않고 그 자신의 생각과 실험에 의해 독창적으로 개발된 것이기에 독특한 데가 있었다. 인산은 언제 어디서나 쑥뜸에 대해 얘기할 때에는 ‘기존 의서에 뭐라고 쓰였든지, 역사적으로 이름을 남긴 명의들이 뭐라고 주장하였든지 개의치 말고 쑥뜸을 뜨려면 반드시 1장에 5분 이상 타는 것으로 떠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또 뜸쑥을 치료 혈에 직접 올려놓고 불을 붙여 타들어가는 화기(火氣)가 그대로 몸 안에 전달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뜸쑥으로는 가능하면 ‘사자발쑥’으로 알려진 강화 약쑥을 쓸 것과 일반 떡쑥으로 뜸을 떠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아울러 강조하였다. 그리고 뜸 치료를 시작하면 뜸자리의 상처가 완전히 아물기까지 목욕을 하는 것은 괜찮으나 성관계를 금해야 하며, 술ㆍ돼지고기ㆍ닭고기ㆍ오리고기ㆍ명태국ㆍ생오이ㆍ메밀ㆍ밀가루 음식 등의 섭취를 피해야 한다는 등의 주의사항도 빼놓지 않았다.

인산은 자신의 몸에 직접 실험하여 얻은 결과로 개발해 낸 절대적인 효과의 뜸법에 ‘신령스런 뜸법’이라는 뜻으로 ‘영구법(靈灸法)’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예상했던 대로 주교동 고향 친구의 집안은 간질 환자가 있는 까닭으로 웃을 날이 없는, 불행의 그림자에 싸여 있었다. 환자가 언제 발작을 일으킬지 몰라 온가족이 초긴장 상태에서 지내야 했다. 환자가 혼자 있다가 발작을 일으키면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늘 대비를 하고 있어야 했던 것이다. 발작이 일어났을 경우 모두들 환자에게 달려들어 환자의 사지를 붙들고 경련이 멎을 때까지 환자 이상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도 불문가지였다.

‘병은 자랑해야 한다’

예로부터 ‘병은 자랑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래야 그 병에 적합한 치료 방법을 누군가로부터 들어 알게 된다는, 일종의 민간 생활 지혜에서 나온 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간질병은 누구에게 말할 수 없는 병으로 여겨져 온 것이 사실이다. 환자 자신은 물론 그 가족에게도 감추고 싶은 ‘수치스러운 병’으로 치부했던 까닭이다. 더욱이 환자가 혼기를 이미 넘긴 젊은 처녀이기에 사정은 한층 딱했다. 혼인(婚姻)을 꿈꿀 수도 없는 딸자식을 둔 부모의 심정이 오죽할 것인가 말이다. 대다수의 간질 환자 가족들은 허다한 노력 끝에 그 병은 고칠 수 없는 병이라고 포기한 채, 집안에 드리운 불행의 먹구름을 운명이라고 생각하며 지내게 되는 것이다.

인산은 주교동 집 딸을 치료함에 있어서 먼저 자신의 마음속에 한없는 긍휼과 연민의 불길이 타오름을 느꼈다. 아니, 그런 느낌은 비단 그때의 그 환자에게서만 느낀 것이 아니었다. 언제 어디서고 자기 앞에 병을 고쳐달라고 오는 사람에게는 정도의 차이는 조금씩 있을지언정 인산은 우선 자기 마음속에 환자가 당하고 있는 고통을 생각하고 그 고통을 자신도 느끼려는 자세를 가졌다. 그것이 의자(醫者)로서의 합당한 태도라도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인산은 주교동 집 처녀 환자의 발작 경련이 발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알고 중완(中腕)과 족삼리(足三里)ㆍ은백(隱白)으로 뜸자리를 정하고 뜸 치료를 시작하였다. 각 뜸자리에 5분 이상 타는 뜸쑥을 올려놓고 연이어 뜸을 뜨는데, 환자 자신이 병을 고치겠다는 열망을 지니고 의연하게 치료에 임해 치료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치료를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갔다. 본래 용모가 남의 눈길을 끌 만했던 환자의 얼굴에 서서히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그토록 잦던 발작이 서너 번, 그것도 경미하게 지나갔을 뿐이었다. 환자와 그녀의 부모는 병을 고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어 더욱 열심히 뜸 치료에 임했다. 뜸자리들에는 생살이 타서 새카만 숯처럼 딱지가 앉았고, 그 둘레로 쉴 새 없이 검붉은 피고름이 솟아나왔다. 인산은 뜸을 뜨고 난 뒤에는 그 자리에 고약이나 개의 쓸개즙을 붙여 고름을 계속 뽑아내도록 조치했다.

1년을 작정하고 시작한 치료였건만 채 넉 달도 되지 않아서 더 이상 뜸을 뜰 필요가 없어질 정도로 환자의 쾌차하는 속도가 빨랐다. 치료 말기에는 환자의 얼굴빛이 백옥같이 눈부시게 좋아졌다. 뜸쑥이 타는 뜨거운 온도는 경혈을 타고 체내에 들어가 피를 맑게 하는데, 그것을 거듭하다 보면 피가 맑아지다 못해 얼굴에 영채(靈彩)마저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본래의 인물이 좋은 데다, 그 얼굴이 멀리서 봐도 백옥같이 눈부신 광채를 뿜으니 누가 그녀를 간질병을 앓았던 환자로 볼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인산은 뜸 치료를 받느라 육체의 힘을 소진한 환자에게 원기 보양을 위한 음식을 먹일 것을 그 부모에게 권하고, 마침내 뜸 치료를 중단하였다. 성격조차 명랑해진 처녀는 더 이상 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그 처녀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결혼을 하여 자식들을 낳고 오순도순 잘 살게 되었으며, 다만 자신의 병력이 알려지는 것을 꺼려해 인산 선생 앞에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죽을 때까지도 인산 선생으로부터 입은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다.

인산이 머물던 주교동의 그 집도 갖가지 험한 질병으로 고생해 온 환자들이 마지막 희망을 걸고 찾아오는 순례지가 되었다. 치료받기 위해 자신의 거처를 찾아와 순서를 기다리는 환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인산은 마음속으로 다시 한 번 다짐을 하였다. ‘한 사람 한 사람 치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모든 비밀을 세상에 남겨 세세 영원토록 누구나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라고.

무너진 인체 내 균형을 바로잡다

왜 이 세상에는 그토록 무서운 질병에 걸려 고통만 받다가 죽어가는 생명들이 많아야 하는지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혹자는 조상 탓으로 돌리기도 하고, 혹자는 운명을 잘못 타고 나서 그렇다고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인산은 어렸을 적부터 장차 이 문명 세계에 각종 난치병과 괴질들이 난무할 것임을 내다보고 염려하여 그에 대처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 이치는 간단하다. 본래의 인간은 이 우주의 일부로서, 아니 축소된 우주로서 우주의 운행 원리에 조화하면서 살게 되어 있는 존재이다. 모든 사람이 그 원리만 지키며 살 수 있다면, 이 세상에는 질병 자체가 없어지게 된다.

아니, 질병이 생긴다 하더라도 그 질병 자체가 우주의 질서 안에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어느 정도의 시일이 지나면 인체가 지닌 회복 능력에 따라 자연적으로 치유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편리함을 추구한 나머지 문명이라는 것을 만들어냈고, 그 문명을 유지ㆍ발전시킨다는 명목 하에 우주의 질서를 마구 파괴하였다. 그럼으로써 깨어진 우주의 질서에서 파생되는 무서운 기운들이 인간들의 신체 균형을 무너뜨리고, 급기야는 고치지도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험한 질병들을 야기(惹起)시키는 것이다.

인산은 그렇게 무너진 인체 내에서의 균형을 바로잡는 방법으로 인류의 질병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인산에게 보이는 우주의 운행 질서에는 무너진 인체의 균형을 바로잡아 줄 요소(약 성분)들이 무궁무진하게 들어 있었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그 요소들을 끄집어내어 사용하면 어떤 질병이라도 고칠 수 있었던 것이다. 인산은 자기 생전에 그것들을 모두 기록으로 남겨두어 어느 누구라도 수월하게 자신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길을 열겠다는 결심을 해온 터였다. 그것은 그야말로 인류 건강을 위한 전대미문의 복음서가 될 것이며, 의서(醫書)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이었다.

그해, 신축년의 봄은 주교동 김 아무개의 딸을 비롯하여 인산을 찾아온 수많은 환자들에게 삭막하고 을씨년스러운 인생의 겨울을 보내고 새로운 기쁨으로 인생을 시작하게 하는 진정한 의미의 봄이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5ㆍ16 군사혁명이 일어났던 그 무렵, ‘묘향산 활불(活佛)’이라 회자(膾炙)되던 인산의 인술이 빚어낸 갖가지 구료(救療) 신화가 꽃을 피웠다. 멀리 떨어져 풍문으로 듣기만 한 세인(世人)들은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며 믿지 못했던 기적들이 연이어 현실로 나타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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